'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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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환장하는 성
★촬영지: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왕국의 거리. 모자 수선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그저 그렇게 보내고 있던 검은머리의 처녀 소피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이 권태롭기 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빵집에서 일하는 동생을 만나러 가던 소피의 앞에 갑자기 살랑거리는 금발의 수상쩍은 청년이 나타나고, 소피는 영문도 모른 채 그 청년과 마법으로 움직이는 고무인간들 사이의 추격전에 말려든다. 그 청년과 함께 하늘로 뛰어올라 마치 동화 속 주인공처럼 허공을 사뿐사뿐 걸어가는 체험을 한 소피는, 그와 헤어진 뒤에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랠 길이 없다. 어쩌면 그 청년이야말로 처녀의 심장을 먹는다고 소문이 난 무서운 마법사 하울이 아닐까... 겨우 기운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려는 소피. 하지만 그날 밤, 자칭 하울의 적수라는 황야의 마녀가 나타나서 소피에게 저주를 건다. 쭈그렁 노파의 모습으로 늙어버린 소피는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마을을 떠나 무작정 산과 들을 헤매다가, 신비한 허수아비 카부[무대가리]의 인도를 받아 '움직이는 성'에 도착한다. 그곳이 하울의 저택임을 알게 된 소피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가정부로 취직하는데......

하늘과 땅, 비상[飛翔]과 추락, 전쟁과 평화, 어지러진 방과 청소하는 주부, 마법과 과학, 자연과 인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거절하고 도망치는 영혼... 사실 이 영화에 나오는 소재들은 이제까지의 미야자키 작품에서는 식상할 정도로 써먹은 것들 뿐이라서, 이제와서 새삼스레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18~19세기 유럽을 연상시키는 배경그림과 어디선가 한 번씩 본 듯한 캐릭터들도 정겹긴 하지만 새로움이 없다. (저기에서 사람들 머리통만 멍멍이로 바꿔놓으면 영락없는 명탐정 번개가 되어버릴지도...)

처음에는 쉽다고 생각했던 스토리도 가면 갈수록 뭔가 갈피가 없어지고 맥락이 서로 닿지를 않으며 점점 산만해져서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히 내 지능이 퇴보한 탓일지도 모르지만, 가족영화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지부리 작품에서 이런 실험영화 보는 듯한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미야자키가 늙어서 노망이 든 건가, 혹은 <우테나>를 따라하고 싶어진 건가, 아니면 그냥 스케줄이 모자라서 대충 만들었기 때문에 이 꼴이 된가?;;;)

한마디로 말해서 꽉 짜인 스토리나 참신한 무언가를 기대하고 본다면 실망하기 딱 좋은 괴작이다. 캐릭터들 하나하나가 매력적이긴 한데 그들의 행동원리나 동기가 불확실해서 공감을 느끼기가 힘들고, 여러가지 많은 요소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긴 하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상의 주인공인 소피의 성격도 일정하지가 못해서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애매한 감이 있고, 그나마 매력 덩어리로서 이 작품의 가장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는, '지부리 최초의 본격 여성향 캐릭터'인 마법사 하울은 활약 좀 할 만하면 아프다며 퇴장해서 사람 감질나게 한다. 영화 홍보시에 역점을 두었던 소피가 노인이 되는 저주라던가, 움직이는 성의 활약상도 중반을 넘어가면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제까지 본 미야자키 작품 중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붉은 돼지>의 경우와 비교해 봐도,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이 작품의 감성을 이해하지 못해서 실망한 것이지 완성도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비해, <하울...>의 경우에는 기본적인 완성도나 작품의 의도 자체를 의심하게 되어버리니 훨씬 심각하다.)

키무라 타쿠야가 연기한 하울은 멋지고, 그림도 음악도 당연히 깔끔하며, 신기한 마법과 공중 스펙터클이 넘쳐나긴 하지만,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 건지 알아먹을 수가 없고, 개별적으로는 좋아할만한 요소들이 너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꾸밈새가 흐트러진다는 인상이 강하다. 최근 들어 일본애니계를 뒤덮고 있던 매너리즘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디어 미야자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친 걸까? 아니면 내가 이 영화에 담긴 깊은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내 감상하는 방식이 잘못되어서 재미없게 느껴지는 것 뿐일까? 아무래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 말많은 원작을 살펴보거나,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한 번 감상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현재의 인상은 미야자키 월드 총결산의 의도를 담은 '이벤트 필름'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정도다...;;;)

소피 역으로는 쇼치쿠 영화사의 간판 여배우 중 한명으로,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에서 아무로의 어머니로 특별출연했던 바이쇼 치에코 여사가, 하울의 제자 마르클 역으로는 <가면라이더 아기토>에서 꼬마 암흑신으로 등장하여 시청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카미키 류노스케가, 하울의 단짝인 불의 악마 캘시퍼 역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아오가에루[청개구리] 역으로 출연했던 가슈인 타츠야가 출연. 거기에 더하여 설명이 필요없는 인기성우 오오츠카 아키오가 국왕 역으로 잠깐 등장해서 사람들을 뒤집어지게 했다.
by 잠본이 | 2004/12/31 16:15 | ANI-BODY | 트랙백(6) | 덧글(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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