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Those who hunt the night저자:
바버라 햄블리출판사: 시공사
20세기 초의 영국 런던. 문명의 이기가 도시를 메우고 태평스런 기운이 사람들을 지배하던 시대. 그러나 그 이면에는 밤의 어둠 속에 암약하며 인간의 피로 연명하는 불사의 존재들 - 뱀파이어들의 사회가 존재한다. 인간을 사냥하되 결코 절제와 냉철함을 잊지 않고 비밀을 엄수하는 흡혈귀들. 그러나 언제부턴가, 런던의 뱀파이어들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참혹히 살해당하는 괴이한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스페인 귀족 출신의 뱀파이어 돈 시몬 이시드로는 동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낮에도 활동할 수 있는 인간 중에서 협력자를 찾아내어 사건의 조사를 맡기기로 한다. 그가 선택한 사람은 옥스포드의 비교언어학자로 한때는 정부의 첩보원 노릇을 하기도 했던 제임스 애셔 교수. 사랑하는 아내의 목숨을 담보로 잡혀 어쩔 수 없이 흡혈귀 살해사건을 파헤치던 애셔는, 몇 번의 위기를 넘긴 끝에 서서히 진상에 접근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이제는 흡혈귀뿐만 아니라 인간 중에서도 피해자가 속출하고, 마침내 드러난 진범의 정체는...!
유럽에 민간전승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흡혈귀 이야기를
브램 스토커가 <드라큘라>라는 고딕 문학의 고전으로 되살려낸 이래, 뱀파이어는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서구 환상문학의 단골 아이템으로 자리잡았고, 현대에는 영상매체로까지 그 영역을 넓혀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다. 1988년에 발표된 이 소설 역시, 그러한 뱀파이어 문학의 전통 위에 현대적인 시각을 가미하여 태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973년에
앤 라이스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발표한 뒤로는, 기존에는 단순히 악의 상징이자 인간을 유혹하는 괴물로만 여겨져 왔던 뱀파이어의 캐릭터에도 어느 정도의 변화가 일어났다. 인간과 함께 살아가지만 밝은 대낮의 햇빛 아래에는 결코 설 수 없는 어둠의 주민으로서, 인간과는 다른 생태와 습관, 그리고 인간과는 다른 고뇌와 슬픔을 지닌 매력적인 인격체로 묘사하는 소설도 늘어났다. 스토커 시절의 뱀파이어는 외딴 성이나 버려진 저택에 은둔자처럼 홀로 살며 가끔 가다 재수없이 걸려드는 여행자를 먹이로 삼을 뿐이지만, 현대의 뱀파이어는 어두운 도시의 뒷골목에 무리를 지어 서식하면서 인간의 일상에도 보일락 말락하게 개입한다. 어떤 의미에서 뱀파이어란 하나의 캐릭터가 아니라 일종의 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지탱하는 밤의 법칙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작품 역시 그런 경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시드로를 비롯한 뱀파이어들은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근력과 순발력과 초감각, 그리고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감정을 지배하는 최면술까지 구사한다. 게다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수백 년 동안 사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반면,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보다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혈액을 지속적으로 섭취하지 않으면 감각이 둔해져 시들시들하다가 결국 죽게 된다. 창백한 피부는 전혀 윤기를 찾아볼 수 없는 '가짜 피부'이며 햇빛을 받거나 은제품을 만지면 무섭게 타들어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을 가장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은 보통 인간들보다 훨씬 오래 살다보니 느낄 수 있는 권태와 무력감, 외로움과 환멸이다. 자기가 알던 존재들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가리지 않고 결국 세월의 흐름에 밀려 사라져 버리고, 세상은 점점 나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하지만 인간사회에 개입할 수 없는 그들로서는 어떻게 바꿔 볼 도리조차 없다. 그 꼴을 보지 않기 위해 두 번 죽던가, 아니면 참고 계속 지루한 삶을 이어가던가,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애셔는 사건을 조사하면서 여러 가지 유형의 흡혈귀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에 대한 혐오감과 자기 신변에 대한 걱정으로 긴장하면서도 학자로서의 호기심과 관찰력을 통해 그들의 차가운 외피 속에 감춰진 고독을 어렴풋이 느끼고, 연민을 품게 된다. 그와 동시에, 임무 수행 도중 어린 소년을 사살해야만 했던 자기의 과거를 회상하며, 과연 흡혈귀만이 나쁘다고 할 수 있는가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흡혈귀에 대한 현대적인 시각만이 이 작품의 미덕은 아니다.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바로 그 추리적 구성과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주인공들 간의 기묘한 연대관계에 있다. 치밀한 고증을 통해 그럴 듯하게 재현된 1900년대 초의 런던과 파리를 무대로 인간과 흡혈귀로 구성된 한 쌍의 탐정이 흡혈귀 연속 살해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소설을 어디 가서 또 보겠는가? 처음에는 이시드로의 속성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그나 동료 흡혈귀들을 계속 의심하며 가능한한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려 하던 애셔가 이시드로의 귀족적인 결백함과 책임감을 이해하고 마침내 그를 신뢰하게 되어가는 전개도 흥미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쿨한 관계를 유지하며 인간과 흡혈귀라는 최후의 선을 넘지 않는 산뜻한 결말이 그들의 우정 아닌 우정을 더욱 빛내준다. (창백하고 귀족적인 미청년 이시드로와 콧수염을 기른 고지식한 애셔의 관계는 변덕스런 셜록 홈즈와 순박한 왓슨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애셔의 인문학적 한계를 보완해 주는 그의 아내 리디아는 공부벌레같은 외모나 용기있는 행동으로 보아 저자의 분신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중간부터는 거의 잡혀가는 헤로인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좀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엄청난 자료와 공격용 무기를 비축해 놓고 사라진 덕에 애셔의 다음 행동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는 공적은 무시할 수 없다) 예의바르지만 어딘가 기운 없는 앤체스터 백작 부부, 시건방진 발레리나 클로에, 덩치 크고 성질 급하지만 때로 옳은 소리도 할 줄 아는 그리픈 등등 개성적인 뱀파이어 캐릭터도 다수 등장한다.
사건의 진상이나 진범에 대해서는 천기누설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쓰지 않지만, 처음에 제기되었던 '고대 흡혈귀 범인설'과는 정반대로 나간다는 것만 밝혀둔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정체 모를 흡혈귀나 괴물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마음 속에 도사린 악이라는 것이, 해결의 포인트다. 흡혈귀에 대한 기존의 속설을 그대로 설정에 반영하면서도 각각의 설정에 대해 참신한 해석이나 과학적인 설명을 양념으로 부가함으로써 SF와 판타지 사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본 작품은, 인간의 어두운 면에 대하여 경고하는 교훈담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시드로가 흡혈귀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공격할 때마다 스토커의 소설을 여지없이 까대는 부분이 또 한 개그 하는데,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1907년이고 스토커가 <드라큘라>를 쓴 것이 1897년임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야기다. (역자 후기에는 <드라큘라>가 1922년에 집필되었다고 되어 있지만, 이건 드라큘라를 원작으로 한 최초의 영화 <노스페라투>가 개봉된 해와 착각한 듯 하다.)
그나저나 런던의 최연장 뱀파이어인 이시드로와 그리픈을 '창조한' 더 오래 묵은 전설의 고참 뱀파이어로 '음유시인 라이스'라는 친구가 언급되는데, 앤 라이스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인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지은 이름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빌려주신
Gerda님께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