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Quarantine
저자:
그렉 이건출판사:
행복한책읽기지난 토요일 모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후 4일만에 독파.
2066년의 지구. 30여년 전에 출현한 의문의 거대 구체 버블(bubble)이 태양계 전체를 뒤덮고 있어서 밤이 되어도 별이 보이지 않는 세계.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직 경관이자 사립탐정인 닉 스타브리아노스는 24시간 완벽한 감시체제 하에 있는 병원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린 젊은 정신지체 여성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익명의 의뢰를 받는다. 닉은 이 여성이 호주대륙 남부의 신생 독립국가 '뉴홍콩'의 한 연구소로 보내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추적을 개시한다. 그러나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20세기 과학 최대의 성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양자역학을 기본 베이스로,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상천외한 방향으로 풀어 나가는 독특한 작품이다. 처음에는 나노기술이 발달한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스릴러 정도의 느낌을 주며 시작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어가면서 점점 초고급 하드SF가 되어 가는 기기괴괴한 소설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전반부에서는 '이런 세계에 이런 주인공이 있고 그는 이런 것을 찾아내야만 한다' 정도만 마음에 새겨두고 여러 가지 낯설지만 기발한 설정을 받아들여가며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런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과학적 아이디어 자체가 점점 중요해지면서,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사고실험을 해 가며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어봐야 뒤로 넘어갈 수 있는, 하이레벨의 작품이 되어 버린다.
그냥 가슴 후련한 SF터치의 탐정물 정도를 기대하며 책장을 펴든 사람이라면 다 읽고 나서 '우오오오 속았다!!!'라고 외칠 것이 틀림없다. 단언하건대 이 소설은 'SF설정을 빌려온 탐정물'이 아니라 '탐정물로 위장한 하드SF'다. 그 점이 본작의 매력인 동시에 약점이 되기도 한다는 얘기다.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아이디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런 재미도 없기 때문에...) 또한 아이디어와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 자체에 역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캐릭터의 인간적인 매력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도 좀 아쉽다. (따라서 소설로서의 재미는 좀 떨어진다)
'파동함수의 확산과 수축'이라는 무지 어려운 개념이 본작의 핵심 주제(소재가 아니다!)인데, 간단히 말해서 우주의 모든 존재를 형성하는 물질은 고정된 입자인 동시에 끊임없이 요동치는 파동이기도 하며, 그 파동의 흔들림으로 인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순간적으로, 실현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포함하는 수천 수백 가지의 자기자신으로 '확산'되었다가, 외부 관찰자의 개입 혹은 그밖의 다른 요인에 의해 절대 변치 않는 단 한 가지의 현실로 '수축'한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전혀 간단하지가 않군)
이러한 확산과 수축은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작위로 이루어지며, 의식의 힘으로 제어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의식의 힘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된다면? ...이것이 바로 본작의 핵심을 관통하는 사고실험의 기본 전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처음에 중요한 것처럼 나왔던 캐릭터나 배경들은 점점 중요성을 잃게 되고, 급기야는 주인공마저도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상황에 말려들게 되며, 결국은 파동함수의 수축으로 인한 세계(혹은 우주)의 변화라는 테마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꽤 과격한 설정에 비해 결론이 너무 유보적이란 것이 아쉽다. 난 그레그 베어의 <블러드뮤직>처럼 모든 걸 다 뒤엎고 새로운 진화를 보여주는 결말이 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초반부부터 제시되어 현대의 컴퓨터 사용자들에게 매우 친근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모드'라는 본작의 고유 설정도 특기할 만하다. 특별제조된 나노머신을 스프레이 형태로 코에 분사하면 뇌로 나노머신이 들어가서 뉴런을 재배열,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같은 기능을 뇌 자체에서 수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한마디로 머릿속에 필요한 유틸리티를 모두 갖고 다닐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돈을 내야 하지만) 특수한 모드를 이용하면 감정을 조절하여 항상 평정을 유지할 수 있고, 특정 조직에 충성을 다 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설정을 통해 인간의 심리와 기계의 융합에서 생기는 갈등이라는, 어찌보면 사이버펑크에 가까운 주제를 탐구할 수도 있겠지만, 본작에서는 그다지 깊게 파고 들어가지는 않는다.
이러한 장치를 비롯하여, 본 작품에는 다른 SF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설정이나 관점이 가득하다. 벌써 12년 전에 나온 작품임에도 이렇게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나의 SF에 대한 패러다임이 아직 70년대에 머물고 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좀 억울하다.) 난생 처음 보는 호주산 SF라는 점도 흥미를 끌 만한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제목으로 사용된 쿼런틴이란 단어는 '격리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버블에 의해 전 우주로부터 격리된 태양계 및 지구의 처지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사건의 시발점인 로라 앤드류스의 탈출 사건이 정신병원의 '격리병동'에서 일어났다는 점과도 연관이 있는 듯 하다.
전체 내용과는 별 관계 없지만 좀 황당했던 대목 두 개:
[뉴홍콩 건국에 미친 해외 투자가들의 영향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55쪽)]
'...특히
한국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잉여자산을 흡수해 줄 프로젝트를 찾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젠트리 리의 <라마> 속편들도 그렇지만... 한국은 꼭 이런 대목에만 나오냐;;;
[새 직장에 취직한 닉이 동료들을 소개하는 대목(122쪽)]
'...보안 요원은 네 사람뿐이었고, 이들 모두 구면이었다. 황 칭,
리 소룽(지하실에서 내게 약을 주사한 여자),
양 웬리, 그리고 류 화(아파트에서 나를 감시했던 사내)이다.'
......이소룡이 여자 이름이었던가... 아니 그보다도 왜
자유행성동맹 사령관 이름이 저기에? >_<
→리플의 양자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