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메님의 충고를 받아들여 일찍 서두른 결과, 9시 30분경에 복사골 문화센터에 도착. (송내역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셔틀버스 잘못 탔을 때의 악몽이 떠오르기도 하여, 그냥 걸어서 갔음...-_-) 이미 6명이 나보다 먼저 와서 줄을 서고 있었다. (잔여좌석 124석이었으니 역시 평일이라 좀 널럴했던 듯...) 끈기있게 기다린 끝에 10시 좀 지나서 표를 사고, 역시 관람하러 와 계신 백금기사님이나 건전유성님을 만나 담소를 나누다가 11시 10분 전에 입장, 영화를 관람한 뒤에, 행사장을 방문한 주연배우 아이카와상을 먼발치서 구경하고 자리를 파했다.
영화 자체는 그런대로 무난하게 만들어졌다는 느낌이지만, 애초에 상상했던 가족영화나 히어로 영화보다는 오히려 '생활에 찌든 중년남의 자아회복기'라는 인상이 강했다. 초반에는 주무대인 요코하마시 야치요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수수께끼의 사건들과 그 배후에 외계인의 음모가 있다고 믿고 조사하는 방위청 멤버들의 행각, 그리고 주인공인 이치카와 신이치의 괴롭고도 비루한 일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신이치가 자기 영웅인 <제브라맨>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고, 그와 함께 자기에게 닥쳐올 운명에 고민하며 '날기 위한 특훈'에 몰두하면서, 바깥 세상 일은 최소한으로만 나오고 영화는 오로지 그의 피땀어린 고생만을 중점적으로 보여준다. (그 사이에 동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혹은 그 전에 벌어진 사건들의 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스토리에 나와 있지 않다. 외계인에게 기생당하여 가게를 습격한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고, 외계인 때문에 태어난 녹색 아기는 어디로 보내졌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철저하게 주인공을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하는 이런 연출은 <돌아온 울트라맨> 등의 2기 울트라 시리즈나 <가면라이더> 등의 토에이 히어로물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특징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외계인이든 지리한 일상이든 주인공을 좌절시키고 단련케 만드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고, 교감이나 오이카와처럼 일에만 충실하려 하다 보니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을 다하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남자들은 주인공의 또 다른 분신이며, 제브라맨을 믿고 응원함으로써 그에게 힘을 주는 아이들(친아들 카즈키와 제자 아사노 신페이)은 주인공이 잊고 있었던 순수한 동심을 대변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물론 지나친 아전인수격 해석이 될 위험도 있긴 하지만)
그에 비하여 여성 캐릭터의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다. 바람난 아내와 도도한 딸래미처럼 주인공을 철저히 무시하고 자기 좋을대로 사는 존재이거나, 중간에 벌어지는 각종 범죄의 피해자들처럼 비명횡사하는 존재일 뿐이다. 유일한 예외가 간호사인 신페이의 어머니로서, 치유와 소통이라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녀 또한 아들을 매개로 하여 주인공과 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작품의 중심으로부터 빗겨난 존재라는 인상을 준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몸과 몸이 부딪히는 정통파 액션을 선호하는 편이라, 클라이막스의 CG로 도배된 외계인 보스와의 열혈근성기적대결(?)보다는 중간에 주인공이 서서히 능력을 각성해 가면서 겪게 되는 잔챙이들(게 가면의 연쇄살인범, 노상 강간미수범, 슈퍼에서 난리치는 패거리 등 대부분 외계인에게 기생당한 범죄자들)과의 싸움이 훨씬 흥미진진하고 재미난다. 그에 비해 클라이막스 부분은 아무래도 실체가 없는 유령들(혹은 버릇 나쁜 부추젤리들)을 상대로 허부적허부적거리다가 거대한 최종보스를 상대로 RPG의 용자처럼 맹렬히 돌진하는 게 전부라서, 이제까지의 스토리를 쫓아가며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제대로 안 한 관객에게는 2% 부족해보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의 그 기상천외한 필살기는 꽤 흥미로운 아이디어이긴 했지만...;;;)
결국 주인공은 마지막에 사건을 해결하고 시민들의 영웅으로 부상하지만, 그 과정에서 학교건물을 두동강 낸 덕분에 기물파손죄로 잡혀가는 꼴이 된다. 그러나 관공서 건물 앞에 도착한 차를 둘러싸고 '제브라맨'을 연호하는 군중들의 뜨거운 성원은 주인공에게 큰 감동을 주고, 그가 다시 한번 그 용맹한 모습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며 '흑백을 가렸다네'라고 으스대는 걸로 영화는 끝난다. (자막에서는 '악당을 물리쳤지'라고 의역)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주인공은 여전히 비리비리한 중년남으로서의 자신을 가면 속에 감추고, 주민들은 그의 본모습이 아닌 영웅으로서의 모습만을 보고 떠받든다. 이것을 과연 그가 본래의 자아를 회복한 것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자기의 본모습을 유리시킨 채 새로운 '허상'을 만들어내고 그 안으로 도피한 것에 불과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아내와 딸도 환호하는 군중 속에 끼어 있기는 하지만, 제브라맨의 정체는 모르는 채로 끝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송강호 주연의 <반칙왕>과 유사하다고 하는 여러 관객들의 평가는 확실히 일리가 있다. 다른 측면이 있다면, 두 영화가 소재로 내세운 문화적인 '원체험'의 차이(한국은 프로레슬링, 일본은 TV특촬드라마)와, 결말을 처리하는 방식의 차이(한국은 어쩔 수 없는 일상으로의 복귀, 일본은 불확실한 판타지로의 도피)라고 할 수 있다.
설정이 황당무계한 거야 본래 그런 작품이니 그렇다 쳐도, 드라마 전개상 허술한 부분이 군데군데 눈에 띄는 건 좀 문제인데, 이를테면 제브라맨과 맞닥뜨린 일도 없는 아사노 부인이 난데없이 주인공에게 '당신 혹시 제브라맨?'이라고 추궁하는 전개나, 중요하고도 위험천만한 외계인의 파편을 목욕탕에 놔두었다가 멀쩡한 직원이 감염당하게 만드는 방위청의 바보짓은 아무리 생각해도 짜증이 난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오이카와의 잘못도 크다. '마을이 위험한데도 아무말도 못하고 숨겨야 하니 열받는다'며 울분을 터뜨리는 녀석이 자기 후배는 제대로 간수 못하고 죽게 만들다니...-_-) 하긴 '미국산 중성자탄'을 실은 VTOL기가 격납고 안으로 내려오는데도 안 비키고 서 있다가 열기에 화상을 입는 방위청 관계자를 보면 이 부분도 다분히 의도된 연출이 아닐까 싶긴 하다만...하여튼 짜증.;;;
*특촬관련 장난: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관계자들의 대사
"UFO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 마세요. 이게 무슨 울트라 Q도 아니고." (...;;;)
-오이카와와 세가와가 몰고 다니는 전용차량의 이름은 치로리안 2호. (...백투더퓨처?) 앞쪽을 보면 과학특수대 마크를 옆으로 세우고 별 속에 '특'자를 써넣은 엠블럼이 붙어 있다. (...울트라맨?)
-신이치가 시청하는 TV프로 <방사능전대 알렉산더>(...멤버가 달랑 한명뿐이구만 웬 전대?;;;)에서 적으로 나오는 머리 푼 오카마는 <링> 시리즈로 유명한 야마무라 사다코의 패러디. (...근데 어째서 도시 한가운데 우물이 있는거지...;;;) 이 장면을 찍은 무대도 진짜 슈퍼전대 시리즈에서 로케 장소로 자주 쓰이는 곳.
-"제브라맨은 기존의 히어로같은 개조인간이 아니었다."
70~80년대 토에이 히어로는 개조인간이나 돌연변이, 로봇같은 보통 사람은 될 수 없는 특별한 존재였던 게 대부분. 그러나 원조 제브라맨은 (아마도 고도의 훈련을 거쳤을 것으로 짐작되는) 자기 육체만으로 싸우는 보통 인간. 이점에서는 오히려 <월광가면>이나 <배트맨>에 가깝다. (...하지만 후반에 나오는 신이치 제브라맨 최종형태는 솔직히 슈퍼맨에 더 가까웠다는...하늘도 붕붕 날고 말이지;;;)
*기억에 남는 대사들:
"자 그럼 여기서 잠깐, 옛날 제브라맨 TV시리즈의 예고영상을 보도록 합시다."
"지구 좀 제대로 지켜줘요. 어쨌든 아저씬 히어로잖아요."
"믿으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길을 터줘! 비밀병기야!"
"예, 미스터 부시에게 안부 전해주십시오. 그럼요. 일본에 핵은 필요없습니다!"
"거기서 죄송하다는 말이 왜 나오죠?"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하늘을 날 수 있으리라 믿으세요?"
"아뇨."
"물어본 게 잘못이지."
"하지만 우리 애는 제브라맨을 믿고 있어요. 그러니 제발 하늘을 날아주세요."
"어머님, 방금 말씀은 앞뒤가 안 맞는데요."
"알아요."
"아앗! 얼룩말맨이다!"
"아냐, 장례식 가면이다!"
"틀렸어, 제브라맨이야, 제브라맨!"
→중년의 히어로 제브라맨!→내가 바로 제브라맨이다!...별 관계없는 얘기지만...
어째서 스포니치만 이 영화에 대해 줄기차게 떠들어댔나 했더니...
제작위원회 중에 끼어 있더라는...(그랬구나 그랬던 것이었구나 끄덕끄덕)
제브라맨,
미이케타카시,
쿠도칸쿠로,
아이카와쇼,
토에이히어로,
패러디,
그럭저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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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F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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