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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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믹월드 OVA
람감님 덕분에 보게 된 상당히 오래된 물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타카하시 루미코 선생의 초기 단편들을 쇼가쿠간과 스튜디오 피에로에서 손잡고 비디오용 애니로 만든 작품들.

일단 본 것은 시리즈 중에서 <파이어트리퍼[불꽃의 여행자]>와 < THE 초녀[수퍼걸] >인데... 여자아이를 쥔공으로 한 SF라는 틀은 엇비슷해도 시리어스 멜로와 난장판 개그, 해피엔딩과 배드엔딩, 전국시대와 미래 우주, 극히 평범한 여고생과 괴력의 해결사, 정적인 연출과 동적인 연출 등등 여러모로 대조되는 두 작품이다. 뭐 스토리는 하이북스에서 해적판으로 나온 '타카하시루미코 걸작단편집' 덕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을 감안해도 상품가치는 꽤 된다. (작화레벨도 당시 기준으로 보아 안정적인 편이고 삽입곡도 편당 2개씩 들어가 있고 기타등등...)

다만 아무래도 두개를 한꺼번에 보다 보니 역시 비교되는 점도 있어서, 다 보고 난 뒤에는 역시 <파이어트리퍼> 쪽에 높은 점수를 주게 되어버린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일단 <파이어트리퍼>는 아시는 바대로 한 소녀와 한 소년의 복잡미묘한 타임 패러독스를 얼기설기 엮어가며 둘의 인생이 서로 교차하고 마침내 하나로 맺어지는 과정을 알기 쉽게 그려나가는 스토리 중심의 물건이다. 원작의 분량도 그런대로 40분짜리 영상으로 담아내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아담하고, 애니 자체도 원작에는 없지만 내용을 나름대로 보완해주는 요소를 많이 집어넣어서 이야기를 더욱 그럴듯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주인공 스즈코의 양부모에 대한 묘사가 그러한데, 주워다기른 딸이 어디론가 사라질까봐 불안해하는 양모에게 '아이들은 원래 언젠가는 부모를 떠나서 스스로의 길을 가게 되어있는게 아닐까'라고 말하는 양부라던가, 혹은 마지막에 스즈코가 시쿠마루와 함께 최후의 시간 이동을 벌일 때 각각의 일터에서 일하고 있던 두 사람이 뭔가를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식의 연출 등이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은 절대로 안 보여주지만 생각 외로 주인공의 주변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원작에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면을 파고든 오리지널 설정이다.)

중반의 상업적인 의도가 빤히 보이는(그러나 시절이 시절인만큼 오히려 풋풋한 느낌을 주는) 폭포에서의 입욕신이 약간 늘어진다는 점을 빼면 전체적으로 무리 없게 연결되어 있고 각색도 원작보다 훨씬 전후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도 타임 패러독스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시청자에게는 혼란스럽긴 마찬가지겠다만...) 삽입곡 중 하나의 제목이 '패러독스'라는 것도 의미심장하고 엔딩 부분도 원작에는 없는 스즈코와 시쿠마루의 그 후 생활을 보여주는 오리지널 신이 추가되어 이야기를 훈훈하게 끝맺어주고 있다.

그에 비해, < THE 초녀 >는...말하기가 상당히 애매한 것이, 원작 자체가 <파이어트리퍼>에 비해 그렇게 분량이 길지 않고, 뭔가 번쩍 했다 싶었더니 갑자기 끝나버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짧은 편인데, 그걸 좀 무리하게 늘리다보니 여러가지 쓸데없는 요소가 삽입되어서 오히려 전체의 전개를 지루하게 만든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중간에 주인공 마리스가 사막별에 조난당하여 이리저리 헤매는 장면이 너무 길고 그 뒤에 어떻게 그 고난을 빠져나가는가에 대해서도 너무 썰렁하게 처리되어 있다)

마리스의 고향별인 타나토스 행성이 풍지박산나는 바람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타나토스인들이 그 특유의 괴력 때문에 언제나 주변으로부터 소외당하고 기물파괴의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애환을 나름대로 절절하게 그려준 부분은 좋았지만 (이 부분은 마리스의 회상이나 영 신통치못한 부모와의 통화 등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 제시되며, 클라이막스에서는 가난에 대한 마리스의 증오를 정당화하는 '트라우마'로 승화되기에 이른다) 그로 인해 본래는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유쾌한 개그였던 원작에 뜻하지 않은 페이소스가 더해지는 바람에,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다소 애매한 인상을 남기고 끝나버리는 것이 애석하다. (달리 말하자면 탁탁 튀는 매운맛을 세일즈 포인트로 하는 음식에 무리하게 떫은맛을 섞어서 뭔맛인지 모르게 되었다고나 할지...)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스토리 전개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의 얘기고, 캐릭터나 순간적인 개그의 흐름으로 보자면 원작을 상당히 잘 살려낸 편이라고 생각된다. 돈에 대한 집착과 이랬다저랬다 하는 표리부동함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마리스나, 그녀로 인해 온갖 마음고생을 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둔갑술로 사람 뒤집어지게 하는 파트너 머피, 그리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유괴범의 두목 등등 각각의 캐릭터가 빚어내는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은 그런대로 볼 만하다. 아마도 마리스는 작품 한 편 중에서 가장 자주 탑승 우주선을 갈아치우는 주인공이 아닐까 싶기도...(툭하면 실수로 망가뜨리니)

특히나 중간에 마리스의 라이벌 스우가 등장하여 펼쳐지는 과격한 프로레슬링 대결이나, 본작의 주제를 한마디로 압축한 듯한 명대사 "모두 가난이 나쁜거야~!!!"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사실 후자에 대해서는 즐거움이라기보다는 '그래 맞아 나도 당신 마음 이해해'라는 처절한 공감이 더하지만....으흑흑 돈이 웬수지~;;;)

어떻게 보면 본작은 개그보다는 마리스의 지독한 액운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페이소스에 중점을 두고 보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지도? (NG모음 스타일로 [사실은 새로 작화한거지만...] 전개되는 엔딩도 필견! ;)

하여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완성도는 <파이어트리퍼>의 압승이지만 < THE 초녀 >도 건질만한 것이 있고, 취향에 따라서는 오히려 이쪽이 더 맞는 경우도 있으리라는 얘기...


*몰라도 되는 얘기들:

-<파이어트리퍼>에서 스즈코/스즈는 무려 시마모토 스미. (나우시카, 클라리스, 자로의 긴레이) '방울'이라는 소품이 중요한 캐릭터라는 면에서는 긴레이와도 통한다고 할 수 있으려나... 상대역이 시쿠마루는 미즈시마 유우 (<바라타크>의 막크대장이나 <갓마즈>의 묘진 타케루 등 한때 앳된 목소리의 미소년 전문으로 인기를 모았던 그 사람! 안타깝게도[?] 여기서는 변성기가 지난 청년 목소리라 그때의 느낌은 간데 없다...) 시쿠마루의 호적수인 아사마 역으로 겐다 텟쇼가 등장. (...'거구나 떡대'하면 어김없이 나오는 아저씨 로군...;;;뭐 고오리 다이스케도 있지만...)

-< THE 초녀 >에서 괴력녀 마리스는 코야마 마미, 거기에다 부잣집 도련님 코가네마루는 무려 후루카와 토시오! (<렌즈맨>의 크리스와 킴볼 키니슨!;;; 그러나 캐릭터의 성격이나 상호관계는 정반대...) 스우는 전작에 이어 시마모토 스미가 열연. (하지만 역시 마리스가 너무 파워풀하다보니 오히려 얌전한듯한 인상이...;;;)

-기분 탓인지 당시 작화경향이 그래서인지 몰라도 스즈코가 자꾸만 <더티페어>의 유리로 보여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음. (그럼 마리스는 머리 파마한 케이냐?)

-비SF작가의 SF만화가 애니화될때의 일반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 THE 초녀 >에는 원작에서는 볼 수 없는 스탭들의 장난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마리스가 사막을 헤매다가 도착한 웨스턴 스타일의 마을에서 다스 베이더가 술을 마시고 있다던가, 타나토스별 사람들이 탈출할 때 사용한 우주선의 디자인이 프랑스 SF만화 '발레리안'에 나오는 것과 비스무리하다던가(이건 우연일지도), 기타등등...

-마리스와 스우는 돈벌기위해 여자 프로레슬링에서 뛰던 시절에 몇번 붙었고 그리하여 라이벌 관계가 되었다는 설정인데... 분명 오만 잡동사니 스타일의 외계인들이 난무하는 세계인데도 어째서 프로레슬링은 인간형 종족만 하고 있는 건지 의문...(하기야 문어발이나 솜털뭉치와 레슬링을 하려면 게임 룰을 다시 짜야 할테니...-_-)

-코야마씨의 마리스 연기는 진짜 최고. "여어 손님~ 인간택시 타고싶지? 응? 타.고.싶.지~???"(거의 조폭마누라 레벨)과 "오오 왕자님, 기다리세요. 저의 모든것을 곧 바칠테니까요. .....대신에 돈만 많이 주세요"(거의 인기가수 빠순이 레벨)를 넘나드는 그 실력을 보노라면 키시리아 자비와 밍키모모가 동일성우란게 절로 납득이 간다.

-근데 마리스양, 힘이 너무 세다고는 해도 바닥까지 무너지는 건... 혹시 체중 문제가 아닐지? (위험발언)

-초기단편 중 '웃기는 놈들'이 우르세이로 가고 '파이어트리퍼'가 이누야샤에 영향을 준 걸 생각하면... 다음에는 'THE 초녀'를 리믹스한 무언가가 나오려나... (이미 우르세이에서 비스무리한 설정을 다 해먹어서 무리일지도;;;)
by 잠본이 | 2004/05/05 16:46 | ANI-BODY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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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흰토끼 at 2004/05/05 17:03
굉장히 흥미가 당기는데요. 아마 지금은 구하기 어렵겠죠..
아니 미국에서 루미코씨의 인기는 대단하니까-몇 년전에 야차의 눈동자까지 나왔을 정도-운이 좋으면 발매되서 아직도 판매중일지도 모르겠네요 :)
Commented by Devilot at 2004/05/05 17:22
전 '웃는 표적'밖에 못 봤군요; (이 작품은 좀 애매..)
Commented by 플루토 at 2004/05/05 18:17
파이어 트리퍼... 저도 무척 좋아하는 단편인데 애니가 있었군요.
Commented by 功名誰復論 at 2004/05/05 18:32
시마모토 스미는 오토나시 쿄코입니다 역시.
Commented by 마아사 at 2004/05/05 20:03
웃는 표적은 다시 구하고 싶습니다. 악역이라 할 수 있는 아즈사의 역할을 츠루 히로미씨가 하니까요. (1파운드의 복음에서는 안젤라 수녀역을 하고 있으니 너무나 180도 상반된 연기라고 할까) 개인적으로는 잊고서 잠들라가 애니화 되었으면 했었지만요...
Commented by rumic71 at 2004/05/05 20:53
웃는 표적 이외의 호러단편들은 분량이나 내용이 좀 어정쩡한 게 많아서... 한데 묶어서 만들면 괜찮을지도.
Commented at 2004/05/05 23:3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ASHLET at 2004/12/12 14:58
와. 멋진글이네요. 루미코씨의 팬으로써 참 잘 읽었습니다.
링크신고합니다. 루미코씨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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