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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원제: The Doors of His Face, The Lamps of His Mouth and Other Stories
저자: 로저 조지프 젤라즈니
출판사: 열린책들

<신들의 사회><앰버 연대기>국내에서도 상당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로저 젤라즈니가 60년대에 주로 발표한 초기 걸작 중단편을 한데 모은 작품집. <내 이름은 콘라드> 등에서도 엿볼 수 있는 그의 몽환적이고 웅대한 스타일이나 신화와 과학을 뒤범벅하여 신선한 별세계를 만들어버리는 요리솜씨, 그리고 거듭하여 등장하는 그의 도전적이고 야성적이면서도 지적 위트에 가득한 남성 캐릭터상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60년대에 집필된 16개의 작품과 70년대 말에 쓴 중편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역시 <프로스트와 베타>가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테마와 캐릭터, 줄거리가 균형있게 짜여진 그 완성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젤라즈니 작품과는 달리 상당히 읽기 쉽게 쓰여져 있다는 이유도 있다. (솔직히 이 아저씨의 직유와 은유와 환유가 어지러이 물결치는 화려무쌍한 문장은 빨리빨리 읽고 넘어갈 만큼 쉽지가 않다. -_-) 인간성에 대한 건조한 고찰로만 끝나지 않고 하나의 잘 짜여진 로맨스로 귀결되는 애교섞인(?) 결말 또한 밉지 않다.

→원제인 'For a breath I tarry'의 원출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예전 서울창작 계열 단편집에서 읽은 후 두번째. 그때는 아시모프와 클라크에 미쳐 정신없이 지내던 속좁은 중고생이었던 터라 '뭐 이따위 썰렁한 얘기가 다 있냐'라는 정도로밖에 느끼지 못했지만 이제와서 다시 읽어보니 또 다른 느낌을 맛볼 수 있었다. 낯선 세계에 가서 아는척은 혼자 다 하며 현지 여자를 꼬시려다 보기좋게 나가떨어진 영문학 오타쿠의 말로를 우수어린 문체로 들려주는 우주 실연담이라고나 할까 (퍽) 확실히 너무 '고전적인' 화성의 풍경이라던가 화성인과 지구인 간에 육체관계가 가능하긴 할까 등등의 기술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재미난다. ;>

위트와 유머 면에서는 역시 <완만한 대왕들>과 <특별 전시품>이 마음에 든다. 전자는 무지 오래 사는 외계종족을 필터로 삼아 인류의 어리석음을 간단하게 꼬집는 소품. 후자는 먹고살길이 없어진 예술가가 결국 자기 자신을 전시품으로 삼으려 박물관에 침투했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통해서 비평가와 작가의 끝없는 싸움을 유쾌하게 은유한 한바탕 난장이다. <수집열>과 <괴물과 처녀>는 얼마 안 되는 분량으로도 독자의 허를 찌르는 명작을 쓸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는 짧은 이야기들이다.

사실 젤라즈니의 진골정(?)을 맛보기 위해서는 미국판의 표제작인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이 죽음의 산에서>, <폭풍의 이 순간>의 세 작품을 보는 편이 좋겠지만, (셋 다 기막힌 이유로 인생이 꼬여버린 남자가 강철같은 의지와 달관한 시선으로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패턴) 개인적으로는 네놈들 모두 콘라드 사촌이지! 라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아 좀 지겨운 면이 있었다. ;>

<성스러운 광기>는 상당히 실험적인 작품인데, 과거의 실수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남자의 환각과 몽상으로 점철된 기기괴괴한 체험을 그린 일종의 '심리적 시간여행'류 소설이다. 결말이 과연 정말로 시간을 역행한 결과인지 아니면 슬픔에 젖어 진짜 광기에 몸을 맡긴 그 남자의 환상인지, 혹은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그 남자가 미리 보고 현재를 교정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리저리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절묘하다 ;)

'내가 쓰고 싶은 작품 스타일'이라는 기준에서 보자면 <12월의 열쇠>와 <악마차>가 괜찮아 보인다. 전자는 외행성 개발용으로 유전자 조작를 받아 고양이의 외모로 태어난 인간들이 원래 자기들이 살 행성이 사고로 소멸되어버리는 바람에 대신 불하받은 행성을 개조하면서 벌어지는, 진화와 신성에 대한 기묘한 알레고리가 깔려 있는 중편이다. 신이 아닌 존재가 우연히 타종족의 진화에 간섭함으로써 신과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되어 고민한다는 전개는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긴 하나 본작처럼 그럴듯하게 구현한 작품은 별로 못 봤다. (데이비드 브린<떠오르는 행성>은 너무 변수가 많고 지나치게 장대하여 내가 손댈만한 스타일은 아니고...) 후자는 인공지능을 갖춘 자동차들이 반란을 일으켜 황야를 누비며 인간들을 약탈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그 차들의 우두머리인 '데블 카'에게 육친을 잃은 남자가 전재산을 들여 특별주문한 전투용 자동차를 타고 복수행각에 나선다는 이야기인데, 주인공 남자보다도 그의 자동차가 보여주는 미묘한 심리변화가 더 눈길을 끈다. (여성 캐릭터는 거의 남자의 보조역이나 반영reflection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 이 아저씨가 보기 드물게 여성[기계지만]의 심리를 스토리의 핵으로 삼았다는 것도 재미난다)

마지막 작품인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는 그 자체는 사실 평범한 불로장생 판타지로밖에 안 보이지만, 멀린이 악의 축이고 정의의 사도(!) 모르가나가 다시 부활하여 세상을 혼돈으로 빠트리려 하는 그를 막으려 한다는 전개가 좀 깬다. (주인공 랜슬롯은 이미 내 시선에서 멀리멀리 사라져 버렸...쿨럭;;;)

작품들의 내용과는 별도로 여러가지 주옥같은 표현들이나 인생에 대해 한번 더 생각케 해주는 명료한 문구들이 많아서, 언젠가는 소장해야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러나 자금이...T.T)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꼽자면:

'등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
"너라면, 저런 일을 당한 뒤에도 저렇게 웃을 수 있겠어?"
통찰력 있는 대답.
"뭘 보고 웃고 있는지에 달려 있지."'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중에서


빌려주신 람감님께 깊은 감사를.
by 잠본이 | 2004/04/30 12:09 | 대영도서관 | 트랙백(5) | 핑백(1)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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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 at 2004/04/30 17:28

제목 : 프로스트와 베타.
오늘 로저 젤라즈니의 중단편집 모음인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를 다 읽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가방 안에 넣고는 다녔지만 그리 진전은 없다가 오늘 마음먹고선 단숨에 읽어버렸어요. 좋군요. 너무 좋아요. 가장 좋은 것은 프로스트와 베타란 단편이었습니다. 인류가 멸망해버린 지구에서 명령에 따라 북반구를 관리하는 컴퓨터 프로스트와 남반구를 관리하는 베타의 이야기에요. 프로스트가 인간을 취미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요.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하게 하는가? 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익숙한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랍니......more

Tracked from SabBatH at 2004/04/30 18:40

제목 : 로저 젤라즈니,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이름 모를 감기약들과 이유 모를 스트레스 속에 신음할 때, 오로지 쿠엔틴 타란티노와 로저 젤라즈니만이 나의 영혼을 안위하였다. 살아있는 한 사람에겐 재능이 강물처럼 흐르기를, 죽은 한 사람에겐 평안이 바람처럼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조금 전 아쉽게 끝을 본 로저 젤라즈니의 중단편집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에 대한 단평을 늘어놓는다. 이것이 단평의 형식을 띠는 것은, 이 책이 여러 작품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게 여전히 그의 작품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용기도, 재능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좀 더 총괄적인 ......more

Tracked from 줄여서 MK대작전 (假) at 2004/06/10 23:35

제목 :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Trackback from :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이책을 읽게 된 것은 사실 100% 우연의 산물이라고 해도 괜찮겠지요. 정말 우연히도 잠본이님의 블로그에서 이 책에 대한 글을 보고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한, 단지 그 이유만으로 사본 것이니까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만화책과 라이트노벨만 읽던 자신에 대한 반성의 마음이 조금 있긴 합니다만....^^;;) 다 읽은 소감을 짧게 적어보면...... 재밌었습니다!!! 네.. 꽤 재미있었습니다. 특히나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이 죽음의 산에서......more

Tracked from Sion, In The.. at 2005/02/21 23:02

제목 :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ㅁ; 저는 이상하게 젤라즈니의 책은 펼치면 재밌는데 펼치기 까지가 참 힘들더군요;; 다 본지도 꽤 됐는데 이제서야 끄적거립니다;; 단편집이라 그런지 저에게는 앰버연대기 같은 맛이 나기도 하고 그와는 전혀 다른 맛이 나기도 하는 종합과자선물세트 같은 책이었네요. 뭐 언제나 그렇듯 제가 별 대단한 고찰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각 단편 별로 느낀 작은 감상 정도 적어보겠습니다^^;...more

Tracked from Extey Style at 2006/12/28 20:49

제목 :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SF계의 거장 로저 젤라즈니의 단편 모음집...한편의 또 다른 신화를 읽는 느낌, 아름답고 상상력을 자극 하는 문장들. 유독 한국에서는 SF나 판타지 쪽은 마이너 취급 받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우 편중되어 있죠. 대부분이 일본 만화, 게임쪽 에서 익숙해져서 그런걸지도 모르겠지만. 군 시절에 책을 읽을때 많이 도움이 된 책마을 이라는 커뮤니티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때 다른 분들의 감상글을 보면서 눈에 띄는 책이 있으면 그......more

Linked at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82.. at 2016/11/15 01:15

... ?&#8221; 통찰력 있는 대답. &#8220;뭘 보고 웃고 있는지에 달려 있지.&#8221;&#8216; -&lt;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gt; 중에서 ※원문 작성: 2004-04-30 sf단편집로저 젤라즈니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Previous article Be the first to comment Leave a Reply 응답 취소로그인을 해야 댓글 ... more

Commented by piyopiyo at 2004/04/30 12:54
저도 프로스트와 베타가 좋더군요. 캐멀럿도 개인적으론 좋았습니다
Commented by forthreich at 2004/04/30 13:10
저는 <폭풍의 이 순간> 을 제일 좋아합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커억!!! 하면서 읽었어요.
이 단편집으로 작가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도 되었고. 참 좋아하는 책입니다.
Commented by 용당주 at 2004/04/30 14:15
서울창작에서 나왔던 단편집이라면 아마 코스믹 러브라는 책이었던 것 같군요. 거기에서는 맨 마지막에 있는 스타 댄스(.. 였나)라는 작품이 아주 취향이었습니다, 음.

그 단편집에서는 12월의 열쇠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프로스트와 베타를 최고로 꼽았었는데, 12월의 열쇠는 묘하게 가슴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어요. ㅠ_ㅠ

콘라드 패밀리(..)가 나오는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역시 로저 젤라즈니는 무협의 정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SF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퍽)
Commented by skan at 2004/04/30 15:09
아직 신들의 사회밖에 못봤는데
단편집도 구해봐야겠군요. 재미있을것 같네요.
Commented by 산왕 at 2004/04/30 16:13
프로스트와베타는 쉽게 읽힌다는 점에서 분명 장점이 있습니다..
Commented by NOT_DiGITAL at 2004/04/30 16:46
개인적으로 로저 젤라즈니의 작품들 중에는 장편보다 단편들이 마음에 들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전도서의 장미는 아주 즐겁게 본 책이었습니다.

NOT DiGITAL
Commented by 류시 at 2004/04/30 18:39
흠.. 뭔가 재미있을 것 같네요.
기회가 되면 한번 구해봐야 겠습니다......^o^
Commented by Gerda at 2004/04/30 23:55
잴라즈니는 프로스트와 베타가 가장 좋았어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빌려놓고서 다른 책에 밀려서 아직도 못 읽고 있군요.
Commented by 키프냥 at 2004/05/01 01:10
쉬워서 좋았어요, 정말로. 그리하여, 그 다음날 시험을 못봤지만-_-(늘 시험기간에 책 읽는, 시험기간에만 책이 읽히는 기묘한 심리;)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4/05/01 01:14
piyopiyo님> 캐멀롯도 좋은 작품이죠. 다만 같이 실린 녀석들이 워낙 빛이 나는 놈들이라 좀 가려진 느낌이...;>

용당주님> 고독한 후까시의 황제라고나 할까요 (퍽)

키프냥님> 저도 중간고사 앞두고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만행을 저지른 적이 있죠. (지금은 둘 곳이 없어서 팔아버렸지만;;;)
Commented by 00 at 2004/05/03 18:25
에스에프 리더스에 링크했습니다
http://wiki.sfreaders.org/RogerZelazny
Commented by 夢影 at 2010/06/29 13:49
저같은 비인기 마이너 블로거에게는 들어올리가 없는 익명닉의 덧글이 전도서 포스팅한 것에 달려 있기에 봤더니 후덜, 잠본이님... 잠본이님 같으신 유명 블로거께서 제멋대로인 제 감상글..이라고 하기도 뭐한 단상을 트랙백 거시니까 들어오죠..(응?)

아무튼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국제도서전에서 3000원에 페이퍼백 반품본 팔았는데 거기서만 판 걸까나요. 고독한 후까시의 황제라는 잠본이님 말씀에 가슴속 깊이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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