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A Judgement in Stone
저자: 루스 렌들
출판사: 고려원
영국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단란하게 살고 있는 교양있는 중류층 가족 커버데일 집안. 그곳에 새로 들어온 가정부 유니스 파치먼은 완벽한 가사 솜씨와 꼼꼼한 정리벽으로 인해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지나치게 무뚝뚝하고 남의 일에 도통 관심이 없어서 인간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완벽한 살림꾼처럼 보이는 그녀. 그러나 유니스에겐 그 누구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주민들끼리 서로를 잘 알고 비밀이 결코 유지될 수 없을 정도로 소문이 빠른 영국의 시골 마을이라는 배경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한두권 읽어본 사람이라면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진다. 본작 역시 배경만 놓고 보면 그러한 '시골마을 미스터리'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컨셉은 사실 정통파 미스터리와는 정반대에 위치한다. 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이 누구인지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미리부터 범인이 누군지 알려주고 대체 어떻게 해서 그가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혹은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끈기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형사 콜롬보>를 연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본작에는 콜롬보처럼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 노련한 탐정역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범인의 부주의와 경찰의 행운과 신의 섭리(혹은 작가의 농간)가 한데 어우러져 자칫하면 미궁에 빠질 뻔 했던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난다는 식으로 결말이 나는 것이다.
본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 하나 선/악 혹은 주연/조연으로 쉽게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리얼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저마다 사건의 진행에 알게모르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특징이다. 유니스의 문맹에 대한 컴플렉스와 문자에 대한 공포감이 빚어낸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성격, 그녀를 범죄로 이끄는 동인[動因]이라 할 만한 친구 조안의 걷잡을 수 없는 광기와 유아독존격인 히스테리, 지나치게 점잖고 교양있고 선의에 가득한 나머지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커버데일가 사람들의 어이없는 말로,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이러쿵저러쿵의 나날을 보내는 마을 주민들의 부화뇌동하는 모습 등등이 모자이크처럼 뒤얽혀 '성 발렌타인의 학살'로 귀결되는 본작의 스토리는 그야말로 하나의 잘 짜여진 리얼 심리 스릴러다. 특히나 반드시 선의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거나, 남다른 사악함이나 욕망이 아닌 진짜 사소한 '짜증'과 '괴벽'이 쌓이고 쌓여서 충동적인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전개는 발표 후 수십년이 지난 지금 와서 봐도 놀랄만큼 '현대적'이다.
빌려주신 Devilot님께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