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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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의 역사
저자: 최민석
출판사: 민음사

이것은 서력 1930년에 서해의 작은 섬 '중도'에서 태어난 이풍이라는 남자의 이야기다. 떡벌어진 체구에 순진무구한 얼굴과 명석한 기억력, 빼어난 말재주를 갖춘 그는 입만 열면 허풍을 섞어 과장하는 버릇이 있는데다 말끝마다 꼭 '허허허' 웃기도 해서 주위에서는 그를 '허풍'이라 불렀다. 이풍은 그저 사랑하는 여인과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보통의 청년이었으나 조국의 기구한 운명은 그의 인생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는 일제강점기, 6·25전쟁, 베트남전, 박통 암살, 아웅산 폭탄테러,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88올림픽, 서태지의 등장 등 파란만장한 격변기를 헤쳐나가며 알게모르게 역사를 바꿔나가게 된다. 그의 이야기는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그의 아들에게로, 그리고 아들의 아들에게로 면면히 이어진다.

낙천적인 성격과 비범한 재주를 갖춘 허풍쟁이 주인공이 현대사의 질곡을 더듬어가며 나이를 먹는다는 패턴은 얼마 전에 화제를 모았던 스웨덴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하 <백세노인>)을 연상케 하지만 두 작품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일단 <백세노인>은 유럽과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걸친 방대한 지역의 세계사를 자유자재로 갖고 놀지만 이 작품은 한반도의 현대사만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다. 또한 <백세노인>은 주로 남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구경꾼 입장에서 활약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조국의 역사적 격랑에 말려들어 나름대로 주체로서 생고생한다. <백세노인>이 어떤 사건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끝까지 일관된 캐릭터성을 유지하는 데 비해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나름대로 현실의 제약에 맞부딪혀 상처입고 깨지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주인공을 계속해서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기회주의자 악당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도 이 작품만의 특징이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점은 아마도 자손의 유무일 것이다. <백세노인>의 주인공은 엉뚱한 사건으로 인해 자손을 남길 수 없는 몸이 된데다 이성에 대한 흥미도 없어서 평생을 독신으로 보내고, 그의 이야기는 온전히 그 개인의 것으로만 남는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이풍은 혈기왕성한 남아로서 불같은 사랑을 한 끝에 아들을 낳고 또한 그 아들이 아들을 낳아 역사를 이어간다. 그에 따라 이풍이 시작한 이야기도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아들 이구(별명 '허구')와 손자 이언(별명 '허언')이 마치 릴레이 경기처럼 계승하는 가문의 전통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실제로 베트남전을 다룬 3부에서부터는 아들 이구의 비중이 점점 커지더니 4부에서는 이풍의 후배 오중사와 이구가 이풍과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5부에서는 이구가 아예 주역 자리를 물려받는다. 한편으로 손자 이언은 작품 전체의 해설자로서 가끔 할아버지의 허풍에 어이없어하면서도 애정 넘치는 시선으로 그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이풍의 탄생에서부터 그의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중년기를 거치며 노년기에까지 이르는 장대한 이야기는 읽는이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감동과 잠깐동안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익살이 골고루 섞여 있어 페이지가 수리술술 잘 넘어간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역사상의 실존인물(혹은 이름만 살짝 바꾼 그 도플갱어)들이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툭툭 튀어나와 주인공의 앞길에 영향을 주거나 혹은 주인공에게 영향을 받아 역사를 바꾸는 모습을 보노라면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게 말이 되냐' 싶으면서도 '야 진짜 이랬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한 번씩 하게 된다. 커다란 흐름에 휩쓸려 속절없이 당하고 있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분연히 일어서서(혹은 얼떨결에 말려들어서) 협객의 진가를 발휘하는 주인공의 액션은 솔직히 좀 뻥이 심하다 싶지만 어차피 이 작품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뻥이므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전반적으로는 밝고 유쾌한 분위기에서 허풍도 적당히 섞어가며 빠르게 전개되기 때문에 풍자소설의 면모가 강하지만 뒤로 갈수록 주인공의 재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늘어나고 안타까운 사건도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100% 상쾌한 웃음보다는 시대의 아픔과 피로가 겹쳐진 쓴웃음의 비중이 커진다. 또한 주인공 이풍의 허풍이 단순한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역사라는 거대담론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시련을 견디기 위해 짜내는 민중의 몸부림이라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면서 독자는 이 이야기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비록 이 작품이 보여주는 감춰진 역사는 작가가 꾸며낸(혹은 작중인물이 윤색한) 허구일지라도, 고통을 극복하고 사람들을 이어주며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는 '이야기의 힘'은 현실보다 훨씬 더 진실한 것이 아닐까. 바로 그렇기에, 주인공은 곧 죽어갈 듯한 상황에서도 힘차게 입을 움직여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이야기이므로.
by 잠본이 | 2014/09/23 23:03 | 대영도서관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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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14/09/24 13:3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블랙하트 at 2014/10/01 17:19
제목을 잘못봐서 '퐁(PONG)의 역사'인줄 알았습니다.
Commented by lukesky at 2014/10/02 10:22
전 제목만 보고 '(중)풍의 역사' 같은 건 줄 알았어요. ㅠ.ㅠ
으음, 근데 재미있어보이는데 태그가 '그럭저럭'이라서 읽을만한지 아닌지 잘 감이 안 잡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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