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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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미드나잇
-2013년에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연출한 미국영화로, <비포 선라이즈>로부터는 18년 후, <비포 선셋>으로부터는 9년 후를 다루는 이른바 '비포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1편의 오스트리아 비엔나, 2편의 프랑스 파리에 이어 이번에는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배경으로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같은 주인공들의 인생 이야기를 보여준다. 1편과 2편이 20대의 사랑과 30대의 사랑을 소재로 여러 모로 대칭을 이루는 내용을 보여준 데 비해 본 작품은 40대 중년의 사랑과 갈등을 소재로 전편들과는 또 다른 맛을 내고 있다. 전편들에서 쌓아올린 설정과 캐릭터의 성격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9년이라는 세월 동안 달라진 상황과 주연배우들의 관록을 디딤돌로 삼아 새로운 경지로 한 발짝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감독과 함께 두 주연배우가 각본에 참가하여 캐릭터에 현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1편에서 말로만 언급되었던 셀린느의 할머니가 2편에서 사진으로 얼굴을 내밀듯이 2편에서 존재가 시사되었던 제시의 아들이 이번에는 잠깐이나마 직접 등장한다는 것도 특징.

***영화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의 천기누설이 있습니다.***

-<비포 선셋>이 <비포 선라이즈>의 마지막에 제시된 '두 사람은 6개월 후에 다시 만났을까?'라는 의문에 대해 답을 알려주었던 것처럼 이 영화도 <비포 선셋>의 마지막에 제시된 '제시는 부인과 셀린느 중에서 누굴 선택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해 확실하게 답을 알려준다. 제시는 결국 셀린느의 노래를 듣다가 비행기를 (거의 의도적으로) 놓치고 유럽에 눌러앉는다. 제시는 부인과는 이혼하지만 아들과는 여전히 교류를 유지하며 아버지 노릇을 하려고 애쓰는데, 다른 한편으로 셀린느가 예상치 못한 임신을 하여 쌍둥이 딸을 낳는 바람에 두 사람은 육아라는 과제를 놓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제시는 작가로서 두 번째 책을 내고 그런대로 인기를 이어가지만 셀린느는 환경운동이 생각만큼 진전되지 않아서 실망만 맛본다.

-<비포 선셋>이 전편의 주요 장면을 회상으로 보여주어 두 주인공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대략적으로 제시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여 전편을 보지 않더라도 내용 이해에 문제가 덜한 데 비해, 본 작품은 현재 이야기를 보여주는 데만도 바빠서 회상이 끼어들 틈이 없으며 전편들에서 나온 사건이나 설정을 주인공들이 생각없이 툭툭 던지는 대사나 그에 대한 반응을 통하여 살짝살짝 내보이는 정도라서 가능하면 전편들을 보고 감상하는 편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또한 전편들은 아예 모르는 사이였거나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던 두 사람이 처음 혹은 다시 만나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추억을 쌓아가는 데 중점을 두고 있지만 본 작품은 이미 여러 해 동안 가족으로서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기 때문에 풋풋한 첫사랑의 분위기나 애틋한 재회의 감동보다는 친근함과 권태로움이 뒤범벅된 부부 사이의 미묘한 감정과 해묵은 갈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전편들이 주인공들 본인은 서로 좋아서 죽고 못사는데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는 제한시간이 걸려있다거나 일과 가족에 대한 의무 때문에 행동에 제약을 받는 처지라든가 하는 외부적인 장애물을 설정한 데 비해 여기서는 그런 외부적 제약이 최소화된 대신 주인공들의 내면적인 갈등이 최대의 장애물이 되어 클라이막스를 좌우한다는 차이점도 있다.

-제시는 그리스에서 같이 휴가를 보낸 아들을 먼저 미국의 전부인에게 돌려보내고 쌍둥이 딸들을 친구들에게 맡긴 뒤 셀린느와 함께 모처럼 둘만의 시간을 즐기려고 하지만, 일은 그의 생각대로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해주는 게 늘 마음에 걸리던 제시는 미국으로 이사가서 아들 근처에 살 수 없을까 생각하지만 지금 하던 일을 정리하고 프랑스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가하여 활로를 모색하려던 셀린느가 이를 곱게 볼 리 없다. 달콤하고 행복한 시간이 될 예정이었던 그날 밤은 셀린느의 히스테릭한 집중포화와 제시의 시니컬한 반박이 정면충돌하여 악몽 같은 말다툼으로 얼룩지고 만다. 공교롭게도 1편의 첫 장면에서 셀린느가 제시를 만나는 계기가 된 것이 기차 옆 좌석에 앉아있던 중년 커플의 말다툼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인생이란 진짜 돌고 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제시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시간여행자 흉내를 내며 '미래의 당신이 오늘 밤은 진짜 멋진 밤이 될 거라고 했어'라고 화해를 시도하는 부분도 1편에서 셀린느가 '지금의 나는 미래의 노파가 꾸는 과거의 꿈이 아닐까'라고 몽상하는 부분을 연상시켜서 흥미롭다.

-외부적인 사건을 최대한 배제하고 주인공들 인생의 어느 한 시점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대화와 무언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해나간다는 시리즈 전체의 특징은 계속 유지되고 있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을 파고 들어가면 전편들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을 받게 된다. 1편에서는 대화를 통해 각자의 인생관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묘사하고 2편에서는 대화를 통해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과 새로 시작하는 인연에 대한 은근한 기대를 암시하였던 것에 비해 여기서는 대화가 반복되는 일상에 찌든 중년의 권태와 체념을 토로하고 질릴 정도로 오랫동안 같이 살아온 커플들의 서로에 대한 불만과 자기혐오를 쏟아내는 채널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편들에서는 약간의 사소한 갈등이나 망설임이 있긴 해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서로를 배려하며 대화가 이루어졌던 데 비해 여기서는 서로 못볼 꼴까지 다 보고 지내온 사이답게 훨씬 거침없고 솔직한 분위기에서 불꽃 튀는 토크배틀이 벌어진다. 방금까지 서로 좋다고 실실거리더니 타이밍을 잘못 잡은 말 한 마디 때문에 그동안 쌓였던 감정까지 폭발하여 찌질하게 싸우고, 그러다 다시 쭈뼛거리며 은근슬쩍 화해를 모색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보노라면 그야말로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 옛말이 틀릴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편들에 비해 애틋한 로맨스나 삶에 대한 성찰은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으나 주연배우들의 성장과 링크된 캐릭터들의 변화나 능수능란한 연기가 별 것 아닌 일상에도 독특한 색채를 부여하고, '불완전하고 졸렬하고 때로는 짜증도 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서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중년의 현실적인 모습을 절묘하게 담아내어 공감을 자아내는 감독의 솜씨도 주목할만하다. (다만 <비포 선라이즈> 그 자체가 너무나도 완벽한 영화라 그 뒤는 모두 사족이라 생각하거나 <비포 선셋>까지만은 참을만 했으나 이렇게까지 현실에 찌들 필요는 없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권하고 싶지 않다. 어찌보면 갈수록 캐릭터들이 세월과 함께 자연스럽게 망가지는 모습을 진짜 솔직하게 보여주는지라) 인생에 대해 말로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대신 인생 그 자체를 뚝 떼어서 날것 그대로 직접 보여주는 듯한 달관함이 매력인 동시에 독이 되기도 하는 신기한 영화라 하겠다.

좋은 작품을 권해준 아내에게 감사를! =]


ps1. 시리즈 전체에 제임스 조이스 관련 레퍼런스가 은근히 많다는 얘길 들었는데 이걸 더 깊게 즐기기 위하여 그 어렵다는 <율리시즈>를 읽어야 하는가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ps2. 에단호크는 2편에서보다 덜 초췌해진 대신 배가 나왔다(...) 가는 세월 그 누가 막을수가 있나요 으흐흐흑

ps3. 그리스는 신혼여행 때 직접 가본 적이 있는 터라 전편들보다 무대가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짐. 내가 가본 곳과는 다른 지방이긴 하지만.

ps4. 사실 전 2편의 경우처럼 젊을 때 만나서 이러저러했던 인물들이 나이들어 다시 뭉친다는 패턴은 영화사상 그리 드문 것도 아니었지만 이번에 3번째로 같은 배우들이 같은 캐릭터들의 인생을 이어감으로써 실시간으로 관객과 함께 나이들어가는 모습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렇게 9년마다 50대, 60대, 70대의 이야기도 이어진다면 꽤 재미있을 듯.

ps5. 부모님의 불화로 인생을 삐딱하게 보는 남자가 되었던 제시가 자기의 이혼으로 자식이 비뚤어질까봐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쓰는데 아들은 쿨시크하게 그걸 다 튕겨내고 알아서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아이러니(...)
by 잠본이 | 2014/09/13 00:35 | 시네마진국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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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야구아 at 2014/09/15 12:11
3편 중에서 제일 재미있게 봤습니다. 배우따라 나이를 먹는 관객 입장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요. 그만큼 현실적이라는 뜻이고, 역시 호텔에서 벌이는 설전이야말로 이 작품의 백미겠지요. 그렇게 설레던 청춘남녀가 이토록 독설을 퍼붓는 부부가 될 줄이야…. 특히 청초하던 셀린느가 히스테리 충만한 아줌마가 된 걸 보면, 참…. 대사가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호텔 장면에서는 하나하나가 전부 주옥 같더라고요.

하지만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초기의 낭만적인 감성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는 게 장점 같습니다. 권태기에 빠지는 부부가 있다면, 감상을 권하고 싶을 정도네요.

과연 이거 4편이 나올 수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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