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에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연출한 미국영화로,
<비포 선라이즈>의 9년 후를 다루는 속편. 인기 작가가 되어 홍보차 유럽을 돌아다니던 제시가 파리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셀린느와 재회하여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회포를 푼다는 내용이다. 제시 역의 에단 호크와 셀린느 역의 줄리 델피가 실시간으로 나이를 먹은 본인들의 캐릭터를 그대로 재현하며 이번에는 감독과 함께 공동 각본으로 크레딧되기도 했다. (1편 때에도 두 사람이 대본의 상당 부분을 고쳐 썼으나 각본에는 크레딧되지 못하여 불만스러워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서서히 두 사람의 이모저모를 알아가던 전작에 비해 이번에는 두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의 예비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그 후의 경과나 심경의 변화 등등을 따라가는 내용이라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비포 선셋(일몰 전에)'라는 제목은 사인회를 마친 제시가 저녁 비행기로 떠나기 전의 제한된 시간 동안 셀린느와 같이 보낸다는 내용을 암시하는데, 다음날 아침에 헤어질 것을 전제로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전작 '비포 선라이즈(일출 전에)'와 좋은 대구를 이룬다. 또한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앞으로 두 주인공이 찾아가게 될 장소를 미리 보여주는 장면 구성이나 비교적 여유롭게 도시를 돌아다녔던 전작에 비해 훨씬 급박한 상황 하에서 숨가쁘게 돌아다니는 여정 등등 전작과 180도 다르게 꾸며놓은 부분이 눈에 띈다. '과연 그들은 헤어진 후 6개월 뒤에 다시 만났을까?', '과연 그들은 그날 밤 공원에서 갈 데까지 갔을까 안 갔을까?', '부다페스트에 사는 셀린느의 할머니는 어떻게 지내실까?' 등등 전작에서 미처 해답을 주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답을 주는 친절함도 잊지 않는다.
-제시는 작가로서 그런대로 성공했고 결혼하여 자식도 두었지만 이유 모를 공허감을 느끼고 있으며 셀린느는 환경운동가가 되어 전세계를 무대로 맹활약 중이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인식하고 불만에 차 있다. 젊은 시절의 꿈과 정열은 이미 온데간데없으나 그 자리에 보다 노련하고 성숙한 매력이 자리잡아서 두 사람의 대화에 깊이를 더해준다. 일과 가족, 정치, 주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어느덧 서로에 대해 느꼈던 옛 감정이 서서히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망설이게 된다. 셀린느의 정열적이고 거침없는 화법과 제시의 시니컬하면서도 부드러운 화법이 한데 어우러져 이런저런 화제를 넘나들고 카메라는 쉴 새 없이 그들의 뒤를 쫓으며 이야기를 이어간다는 스타일은 전작과 마찬가지지만 주어진 시간이 훨씬 제한적이고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도 미묘하게 달라진 터라 전작과도 약간 다른 맛이 느껴진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숙성하는 와인 같은 영화라고나 할까.
좋은 영화를 권해준 아내에게 감사! =]
ps1. 결말 부분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절단신공을 보여주길래 난 이사람들이 이거와 함께 완결편에 해당하는 3편까지 같이 찍고 따로 개봉했나 하는 실없는 생각까지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ps2. 전작과 마찬가지로 쉴새없이 대화로 점철된 작품이고 외부적인 사건은 거의 안 일어나기 때문에 인물들의 대화를 잘 따라가지 않으면 내용 이해에 애로사항이 꽃피므로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피곤할 때 보는 것보다는 적당히 기운이 충전된 상태에서 맑은 정신으로 보시길.
ps3. 두 주인공의 처지에 공감이 가는 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한때 그들처럼 운명적인 만남을 꿈꾸었거나 혹은 실제로 경험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된 결실을 맺지 못하여 절망한 과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전작에 이어서 이 작품을 실시간으로 관람한 분들에게는 그들의 '기회를 놓쳐버린 안타까움과 만약 그때 그 기회를 잡았다면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 하는 의문'이 더더욱 와닿았을 듯.
ps4. 위에서도 말했듯이 전작보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서(영화 상영시간과 극중 경과시간이 거의 비슷한 것 같다) 주된 초점은 주인공들의 대화에 맞춰져 있고 주변 배경은 훨씬 소홀하게 다루어져서 '여행 필름'이라는 측면은 전작보다 약하다. 그러니 파리를 보고 싶으면 이 영화 말고 더 자세하게 파리를 다룬 다른 영화를 보든가 그냥 직접 파리를 가는게 낫다(...)
ps5. 주인공 둘 다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지 (아니면 양인들은 원래 빨리 늙는건지) 얼굴살이 쫙 빠져서 무지 불쌍해 보였음. 게다가 에단 호크는 이마에 밭고랑같은 주름이 가득하여 30대가 아니라 무슨 40대나 50대 아저씨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둘이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점점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웃는 시간이 늘어나자 예전의 모습이 서서히 돌아오는 듯 하여 반가웠다.
ps6. 제시가 초반에 사인회하는 서점 이름이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즉 셰익스피어 극단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듯한데 어째서 파리 한복판에 영국 작가 이름을 딴 서점이 떡하니 있는 거신가... 뭔가 이 서점을 고른 의미가 있을 법 하기도 한데 잘 모르겠군...
ps7. 두 주인공의 대화를 통해 그동안 몇 번 만날지도 모르는 기회가 있었으나 운명의 장난으로 계속 엇갈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이 더욱 처연하게 느껴진다. 제시가 비엔나에서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책을 쓴 것은 그 운명에 저항하여 어떻게든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의지를 전세계에 표명한, 인간으로서의 처절한 몸부림인가 (뭔소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