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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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라이즈
-1995년에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연출한 미국영화. 에단 호크가 연기한 미국남자 제시와 줄리 델피가 연기한 프랑스여자 셀린느가 유럽을 횡단하는 기차여행 도중에 우연히 만나 비엔나에서 내린 뒤 짧지만 의미있는 하룻밤을 함께 보내며 서로를 알아가고 묘한 감정에 빠져든다는 로맨틱 드라마다. 한정된 시간 동안 두 주인공이 비엔나 곳곳을 돌아다니며 대화를 나누고 이런저런 사소한 경험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인공들 외에 다른 인물은 극히 제한적으로 스토리에 끼어들 뿐이다. 특히 극의 99% 이상을 두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가 차지하고 있어서 다른 극영화에 비해 대사량이 압도적으로 많고 대화의 주제도 꽤 넓은 범위에 걸쳐 있어서 평범한 로맨스 영화와는 궤를 달리하는 특이한 영화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로맨틱 코미디를 기대하는 관객이나 혹은 아예 다른 타입의 영화에만 익숙해져 있어서 조용하고 사색적인 영화를 참지 못하는 관객에게는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지만,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내면이나 인생의 여러 가지 측면에 관심이 있는 관객에게는 더없이 좋은 선물이라 하겠다.

-68혁명 세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낸 셀린느는 세상 일에 관심이 많고 열정적이며 자기 감정에 솔직한 인물. 그에 비해 부모의 이혼과 원치 않은 자식이라는 열등감 때문에 그늘진 어린시절을 보낸 제시는 매사를 삐딱하게 보고 자존심이 강하며 경박한 구석이 있지만 의외로 객관적으로 사물을 파악하고 자상한 배려도 잊지 않는 인물이다. 또한 셀린느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죽음을 앞둔 노파가 회상하고 있는 과거의 기억'으로 느끼는 데 비해 제시는 삶이 안겨주는 역동성에 더 관심이 많으며 스스로를 '겉으론 어른이지만 내면으로는 아직까지 성장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소년'으로 느끼고 있어서 여러 모로 대조적이다. 스토리 자체는 매우 평이하고 굴곡이 없으며 외부적으로 눈에 띄는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으나 이런 두 사람의 대조되는 세계관이 서로 충돌하고 섞이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 내면의 변화는 결코 작지 않다. 그들이 비엔나를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서 만나는 거리의 예술가들도 결코 큰 역할은 아니지만 저마다의 개성과 특기를 살려서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 일조한다.

-두 주인공은 진솔한 대화와 체험의 공유를 통해 서로에게 점점 끌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결국 하룻밤의 아름다운 추억을 추억으로만 남겨두는 데 동의하고 각자의 길로 헤어진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과 그들 간에 오고 간 대화들은 관객들의 마음 속에 진한 여운을 남기고, 앞으로 이어질 두 사람의 인생에도 알게모르게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다. 의미없이 나열되는 듯한 대화 속에는 인생의 핵심을 꿰뚫는 명대사가 많고('자식이 선택한 진로를 대놓고 반대하는 부모보다 지지해주는 척하면서 소극적으로 반대하는 부모가 더 상대하기 힘들다' 등등) 두 사람의 거리를 묘사하는 여러 장면들 중에도 인상에 남는 명장면이 적지 않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이 각자의 친구에게 전화하는 척하는 역할극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자기 마음을 고백하는 카페 씬이나 둘이 헤어진 뒤에 하루 전 그들이 다녀갔던 장소들이 텅 빈 채로 쓸쓸하게 이어지는 몽타주 씬이 백미였다.) 이들의 이야기는 <비포 선셋>(2004)과 <비포 미드나잇>(2013)의 두 속편으로 이어지는데, 동일 배우들이 실시간으로 각각 9년과 18년의 세월을 넘어 재회함으로써 영화사에 유례가 없는 진귀한 시리즈를 완성하게 되었다.

좋은 영화를 권해 준 아내에게 감사. =]


ps1. 사람이 암소를 연기하는 그 무명배우들의 연극이 어떻게 묘사될지 내심 기대했는데 쿨시크하게 까먹고 안가버리는 배은망덕한 주인공들(...)

ps2. '정말로 사람들이 죽었다가 환생한다면 세계 인구가 갈수록 늘어가고 있는데 그 영혼의 수적 균형이 맞지 않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혹시 우리는 먼 옛날에 존재했던 단 한 명의 영혼에서 분산된 것에 불과한가?'라는 제시의 의문은 꽤 생뚱맞지만 의외로 생각할 거리를 준다. 나중에 점치는 집시 아줌마가 '별의 폭발로 생겨난 우주 만물은 결국 같은 근원에서 갈라져 나온 우주진(stardust)이다'라고 말해주는 부분과도 연결되는 재미나는 고찰.

ps3. 제시와 셀린느는 같은 감독의 2001년작 애니메이션 영화 <웨이킹 라이프>에도 잠깐 등장한다고. 아직 못 봐서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주인공이 이리저리 꾸는 꿈 속의 한 장면으로 은근슬쩍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ps4. 평범한 거리의 평범한 일상을 배경으로 두 여행자가 별별 시시껄렁한 일로 시간을 때우는 걸 옆에서 도촬하는 듯한 느낌으로 찍었기 때문에 극영화를 보고 있다기보다는 여행지 식당에서 옆 테이블의 일행이 대화하는 걸 무심코 엿듣는 것만 같은 생생함이 잘 살아난다. 모든 영화는 본질적으로 '엿보기'의 산물이라는 이론에 대단히 충실한(?) 영화라 하겠다.

ps5. 기차에서 시작하여 기차로 끝나는 (제시의 경우는 버스지만) 극의 구조는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여행이며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여행 도중에 우연히 만난 소중한 인연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일깨워준다. 그렇다고는 해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끌림을 느껴 저렇게 스스럼없이 대화를 할 수 있다니 부러운 사교성일세(...)
by 잠본이 | 2014/08/31 02:09 | 시네마진국 | 트랙백 | 핑백(2)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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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잠보니스틱스 : 비포 선셋 at 2014/09/03 02:23

... -2004년에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연출한 미국영화로, &lt;비포 선라이즈>의 9년 후를 다루는 속편. 인기 작가가 되어 홍보차 유럽을 돌아다니던 제시가 파리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셀린느와 재회하여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회포 ... more

Linked at 잠보니스틱스 : 비포 미드나잇 at 2014/09/13 01:19

... -2013년에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연출한 미국영화로, &lt;비포 선라이즈&gt;로부터는 18년 후, &lt;비포 선셋&gt;으로부터는 9년 후를 다루는 이른바 '비포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1편의 오스트리아 비엔나, 2편의 프 ... more

Commented by 봉병장군 at 2014/08/31 13:04
저도 나중에 볼 생각입니다. 전역하고 나서(...)
Commented by 야구아 at 2014/09/02 15:03
세 편 모두 개봉한 해에 봤습니다. 그래서 세월의 흐름이나 두 사람의 진전 등이 피부에 와닿더군요. 그냥 봐도 좋은 시리즈이지만, 개봉 년도에 직접 본 입장에서는 한 편의 일대기나 실화를 보는 기분도 듭니다.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미드나잇>, <선라이즈>, <선셋> 순서로 좋아합니다. 특히 <미드나잇>은 그 동안에 쌓인 노련미와 성숙함을 줄줄 풀어놓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고요. 사실 로맨스보다 두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맞춰가는 비중이 더 크죠.

나중에 다른 속편이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참 먹먹할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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