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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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그들에게 다른 길을 마련해주었다
채플 때문에 월요일마다 학교에 가서 졸업생도 학부생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다가 혹시 알아야 할 정보라도 있나 하고 과 건물에 잠시 들렀다.

올해도 어김없이, 로비에는 그의 영정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같은 과에 같은 학번으로 입학했고 성별이 같다는 것을 빼면 어떤 접점도 공통점도 없다. 한 번도 만난 일이 없고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한창 나이에 정부시책에 반대하는 어떤 시가지 행진에 참가했다가 공권력의 개입으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에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가혹행위가 있었는지 평소에 앓고 있었던 지병이 도졌는지 그 둘 다가 결합되었는지 혹은 또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끝내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분명히 그의 죽음으로 인해 가슴앓이를 했을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 뒤의 흐름은 그에게 '열사'라는 꼬리표를 붙여주었고, 학교 내외에서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으레 잊어서는 안 되는 그 어떤 정신의 상징으로서 '소환'되고는 했다. 유인물, 플래카드, 연설문, 기타 등등을 통해.

나는 그가 무슨 이유 때문에 어떤 심정으로 운동에 참가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죽음을 놓고 이런 저런 흐름을 만들어 온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자격도 내게는 없다. 정치란 매우 미묘하고 민감한 것이어서 함부로 입에 올리기가 늘 두려운 물건이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과연 그 본인은 그 행진에 참가했을 당시에
죽을 의사를 가지고 있었을까,
혹은 최소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죽고 싶어서 나서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냐! 라고 한다면 뭐 그걸로 땡이지만)

같은 '열사'라는 말이 붙더라도 자기의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죽어간 사람과, 어쩌다 선택한 일이 예상 외의 방향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여기서 그를 '열사'로 추대하여 조금이나마 그의 정의감을 기리고 남은 사람들의 다짐을 새로이 하는 것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자기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로 인해
그 모든 걸 잃어버린 것 또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앞으로 펼쳐질 많은 나날들을,
그가 만날 수도 있었던 많은 가능성을,
'미래'를.

'열사'라는 두 글자는 그의 박탈당한 미래를 보상하기에는 너무나도 협소하고 한정된 의미밖에 갖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위로 쑥쑥 뻗어나갈 수도 있었던 수목을 새카만 금속 상자 안에 단단히 가두어 두고 비쩍 말려서 약재로 쓰는 것과도 같은, 칙칙하고 답답한 형벌.

하지만 진짜로 답답한 것은 그의 잃어버린 몫까지 더 성실하게 살아야 함에도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고 뭍에 끌려나온 물고기처럼 버둥거리며 하루하루를 낭비하는 나 자신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문득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향에 불을 붙여 영정 앞에 바치고 잠시 묵념한 뒤 그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by 잠본이 | 2004/03/30 01:25 | 일상비일상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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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功名誰復論 at 2004/03/30 03:00
... 96년 3월의 일이군요. 어느새 8주기입니까. 신촌에서 맡은 최루탄 냄새가 기억나는군요. 경찰서 정보과보다 빠르다던 마스크 장사 행상도.

만약 잘못 짚은 거면 낭패.
Commented by miharu at 2004/03/30 03:02
그 분의 일이 아니더라도 힘내서 열심히, 살아봅시다!
Commented by binah at 2004/03/30 09:15
희생양 이라는 의미도 있겠지요. 정치라는것도 인간이라는 종의 생태 특성일뿐 생존자체에 노력하는 개체에게는 정치든 정글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뭐 그렇다고 인간의존엄성을 무시하거나 정치 무관심은 아니지만) -에 그냥 어쨌든 열심히 살자는 이야기이죠^^;;
Commented by 시대유감 at 2004/03/30 09:53
어쨌든 죽음은 그 자체로 그 사람에게는 '끝' 이 아닐까요.
뭐, 그렇다고 해서 죽음으로 잘못을 정당화한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고인에게 묵념.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4/03/30 12:22
공명님> 제대로 짚으신 겁니다.
miharu님, binah님> 맞습니다. 열심히 살아야죠.
시대유감님> 옳으신 말씀입니다. 같이 묵념.
Commented by NOT_DiGITAL at 2004/03/30 21:26
고인의 얼굴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리고 살아갈 젊은이로서 묵념을.

NOT DiGITAL
Commented at 2004/03/31 08:4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Hellkite at 2004/03/31 11:41
묵념.

잠본이 님의 이글루는 내용이 너무 많아요! ;ㅂ;
관심가는 부분마다 일일이 덧글 달아드리다가는
인터넷만 하다가 하루가 다 저물지도.

(헛. 그럼 대체 잠본이님은 이 많은 내용을
하루중 얼마를 할애해서 만들어낸단 말인가아
미스테리로세 =_=)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4/03/31 13:17
비공개 님>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미 상처를 입으신 분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다시는 그런 불행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Hellkite님> 사실은 그게 좀 고민거리입니다. 여러가지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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