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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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곡의 노래
남자는 불치병에 걸려 절망에 빠져 있었다. 치료법이 개발되려면 약간 더 시간이 필요했으나 그에게는 그때까지 버틸 수 있다는 가망이 없었다. 남자는 고민 끝에 마침 시행 예정이었던 냉동수면 실험에 지원하기로 결심하고 신청서를 냈다. 수백여 년 동안 사회와 격리되어 모든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만 하나 그 대가로 제법 괜찮은 사례금이 보장되어 있었다.

실험 전날 밤, 남자는 믿을 만한 변호사에게 뒷일을 맡기고 친구들과 함께 다음날 새벽까지 신나게 놀았다. 마지막으로 단골 노래방에 들러 좋아하는 노래로 끝을 장식했다. 유명한 곡은 아니었지만 왠지 남자는 그 노래가 마음에 들었고 어느 자리를 가도 빼놓지 않고 불렀다.

실험은 성공했고 남자는 수백여 년 후의 세계에서 깨어났다. 그 사이에 사례금을 포함한 그의 재산을 위탁받은 재단도 충실하게 재산을 관리하여 거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먹고 살 정도가 되어 있었다. 남자를 괴롭히던 불치병의 치료법도 개발되어서 몇 주 뒤에는 시술을 받을 수 있게 예약이 잡혔다.

남자는 기쁨에 겨워 항상 자기가 불렀던 그 노래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냉동수면 중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는지 일부 사소한 기억들이 사라져서 그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멜로디는 '어떤 느낌이었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떠오르고 곡을 그대로 재현할 수가 없었다. 별 것 아닌 일이었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남자는 초조해졌다.

남자는 전 세계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음악을 집대성한 테라넷의 음악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여 그 노래를 찾아보았다. 천신만고 끝에 어찌어찌 찾아낸 결과는 참담했다. 그 곡은 남자가 수면에 들어간 이후에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어 서서히 잊혀졌고 네트상에서도 관심을 갖는 이가 없어 데이터베이스에도 문서기록만 남아있을 뿐 악보나 미디어 파일은 멸종한 상태였다.

딱 한 군데, 유로슈의 어느 외딴 지방 도서관에 그 곡의 오래된 음반이 진공보존되어 있었으나, 그 도서관에서는 소장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아무에게나 열람을 허용하지 않고 반드시 도서관으로 직접 찾아와서 거액의 수수료를 내야만 곡을 듣게 해 주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필요한 비용은 남자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전재산과 일치했다.

남자는 고민에 잠겨들었다. 그 곡을 듣기 위해 돈을 냈다가는 치료를 받을 수 없어서 기껏 연장한 수명이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고 곡을 포기하고 치료를 받은 뒤 오래 산다면 풍족하긴 하되 허무할 것 같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노래는 머릿속에 되돌아오지 않았고 왠지 그럴수록 지나간 자신의 시대가 점점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아 남자는 서글퍼졌다.

여러 밤 여러 낮을 고민한 끝에 남자는 결단을 내렸다. 치료 예약을 취소하고 비행기편을 예약하여 문제의 도서관을 찾아갔다. 그리고 전 재산을 털어 수수료를 낸 뒤에 조그마한 이어플러그를 건네 받았다. 남자는 도서관 뒤편의 아름다운 산기슭에 올라가서 사방에 펼쳐진 녹색을 바라보며 플러그를 귀에 꽂고 자기 DNA에만 반응하는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남자는 거기서 일 주일 밤낮을 꼬박 한 곡의 노래만 듣고, 부르고, 음미하고, 추억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자리에 쓰러졌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그의 입가에는 어딘가 씁쓸하면서도 행복으로 가득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C) ZAMBONY 2013.11.15.
by 잠본이 | 2013/11/15 13:15 | 환상소극장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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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나이브스 at 2013/11/15 14:05
좋은 이야기네요
Commented at 2013/11/15 15:3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리뉴얼 중입니다 at 2013/11/16 00:13
...!
멋지군요
Commented by 풍신 at 2013/11/16 09:09
씁쓸 훈훈한 이야기군요. (사악해, 거액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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