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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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Vision
1974년에 제리 퍼넬이 편집하여 에이본(Avon) 출판사에서 발간한 SF단편집. 이태원 왓더북에서 중고로 구매. 기본적인 컨셉은 동료 SF작가들에게 의뢰하여 2020년경의 세계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상상하여 쓴 글을 모은 것으로, 작가마다 개성도 문체도 각각 다르다보니 꽤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외계인이나 시간여행, 초광속 비행 등의 환상적인 소재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당시 과학기술로 예측 가능한 사회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묘사해야 한다는 제한이 있기 때문에, 2020년을 불과 8년밖에 남겨놓지 않은 지금 와서 읽어보면 되게 평범하거나 진부한 설정도 눈에 띈다. 아마존 장터에 중고책으로 올라와 있긴 한데 리뷰가 하나밖에 없는 걸로 보아 물건너에서도 그리 메이저한 책은 아닌 모양이다. 편집인 본인은 서문에서 '2020년경의 후손들은 황금시대를 구가하게 될까, 아니면 우리가 살았던 70년대를 황금시대로 추억하게 될까?'라는 테마를 내세우고 있지만 수록된 작품들이 특별히 그 테마를 의식하고 쓰여진 것 같지는 않다. (좀 개그인 건 이 서문에서 미래예측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아시모프 이름을 언급하는데 굳이 '닥터'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진술의 신빙성을 위해 붙여놓은 건지 아니면 그당시 이미 SF를 벗어나 과학저술가로 잘먹고 잘사는게 배아파서 왕따시키려고 붙여놨는지 매우 흥미롭다?)

Build Me A Mountain / 벤 보버
월면기지가 실험 운영 중이지만 이미 우주개발에 대한 열기가 식어서 예산 지원이 끊기기 직전인 시대. 우주비행사 체트 킨즈먼은 큰 사고를 당한 후 임무 부적격 판정을 받아 지상근무로 밀려난다. 인간들의 아귀다툼으로 가득한 지상에 환멸을 느낀 체트는 유력 정치인을 설득하여 월면기지를 영구적인 시설로 바꾸고 그곳으로 이주하려고 애쓴다. 정치인은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으나 그의 처제이자 주인공의 옛 여친인 평화운동가 다이앤은 월면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꿈에 부풀어 체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우주개발에 관한 이야기이긴 한데 실제로는 파티장에서 주구장창 대화만 하다가 끝난다. 끝물에 접어든 우주개발계획이나 반전 평화시위 등의 소재가 70년대 분위기를 물씬 느끼게 하는 평범한 이야기로, SF라기보다는 저마다의 꿈을 쫓느라 헤어져야만 했던 남녀가 재결합하는 과정을 그린 홈드라마 느낌이 더 강하다. 제목을 굳이 번역하자면 '태산이 높다 하되' 정도 되려나.

Cloak Of Anarchy / 래리 니븐
내연기관의 사용이 금지되고 교통수단은 비행기 위주로 재편되어 미국 전역의 고속도로는 녹지가 우거진 공원으로 사용된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폭력만 휘두르지 않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기에, 나체족, 신흥종교, 심리학자, 아나키스트, 회고주의자 등등 별별 사람이 공원에 몰려든다. 혹시 다툼이 생길 경우 '짭새눈깔(copseyes)'이라 불리는 이동 감시장치가 관련자들을 기절시키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서 걱정할 일은 없다. 통제된 사회에 의문을 품은 얼치기 아나키스트 로널드 콜은 공원 내에 퍼져 있는 짭새눈깔들을 동시에 셧다운시키는 방법을 알아내어 실행에 옮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공원 출입문의 전원까지 꺼져버리는 바람에 사람들은 외부와의 접촉을 잃고 혼란에 빠진다.
콜의 친구인 러셀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되는 단편.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지만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에 처한 개인들을 대상으로 '과연 진정한 아나키즘이 자연발생적으로 실현 가능한지' 사고실험을 벌이는 스토리. 당연한 얘기지만 통제를 잃은 공원 내의 사람들은 숨겨져 있던 본색을 드러내어 남을 괴롭히거나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상황을 관망하게 되고, 러셀은 콜에게 계속해서 아나키즘의 타당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제목의 cloak은 러셀이 목격한 나체족 여성이 걸치고 있던 장식용 망토를 가리킨다.

Silent In Gehenna / 할란 엘리슨
군벌과 대기업이 국가를 좌지우지하고 대학에 군대가 주둔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시대. 천애고아인 조 밥 히키는 대학 교정에 숨어들어 폭탄 테러를 벌이며 학생들의 저항을 촉구하다가 경비대와의 추격전 끝에 부상을 당한다. 정체 모를 노인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조 밥은 대통령 납치라는 거사를 도모하지만 실행 일보 직전에 눈부신 빛과 함께 의식을 잃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조 밥은 자기가 이상스런 존재들이 사는 세계로 옮겨져 거대한 새장 안에 갇힌 것을 깨닫는다. 노예로 짐작되는 파란 생물들을 핍박하는 금빛 생물들의 만행에 분노한 조 밥은 그 곳에서도 여전히 저항을 부르짖는 '양심의 소리' 노릇을 하게 된다.
어떤 사건의 경과과정을 서술하면서 중간중간에 카운트다운처럼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를 박아넣거나 특정한 사물이나 원소의 성질을 뜬금없이 설명한 뒤 그것을 주인공의 심리상태나 주변상황에 대응시키는 등 꽤 정신 사나운 서술 기법이 동원되어서 여러모로 실험적인 색채가 짙다.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에서 투쟁하던 개인이 영문을 알 수 없는 곳으로 이동되어 끝없는 절규를 계속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작가의 <나는 입이 없다, 그러나 외쳐야 한다> 생각도 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그나마 사지는 멀쩡한 상태에서 끝나니 다행일려나.

The Pugilist / 폴 앤더슨
미국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미주인민공화국'으로 탈바꿈한 세계. 나라 외부에서는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경쟁국들이 압박을 가해오고 내부에서는 민주주의를 회복하여 옛 시대의 영광을 찾으려는 비밀조직이 책동하고 있다. 엘리트 군인인 다울링 대령은 보수 애국자였던 조부의 영향으로 현 체제에 대해 의문을 느끼고 비밀조직에 가담하지만, 특수경찰 간부 매닉스에게 발각당하여 체포된다. 아내와 아이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직을 배신하기로 한 다울링은 조직의 우두머리이자 존경받는 사상가인 소토마이어에게 접근한다.
엘리슨의 작품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단편. 조지 오웰의 <1984>를 연상케 하는 협박과 배신의 드라마가 인상적이지만 그런 류의 이야기가 갖고 있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경찰에 의해 잠든 사이에 고자가 된(...) 주인공이(경찰 간부의 말로는 암세포를 발견해서 주인공을 살리려고 그랬다는데 솔직히 그게 정말일까 의심스럽다) 비밀무기인 원자 파괴총을 거시기 대신 차고 조직의 집회에 참석하여 보스를 암살한다는 게 제법 암시적이다. 이후 러시아의 발달된 유전공학을 이용하여 거시기를 재생하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결국 원만한 부부생활로는 돌아가지 못했다는(...) 암울한 결말도 사뭇 깬다.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미국인들의 소련이나 중국, 일본에 대한 잠재적인 불안감도 엿볼 수 있다.

Eat, Drink, And Be Merry / 디안 지라드
컴퓨터 네트웍이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는 미래. 욕실 체중계는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대고, 자동 조리기는 규정된 음식만 만들어주며, 상점의 접대 컴퓨터는 고칼로리 식품을 구매하지 못하게 막는다. 거래는 전부 신용화폐로 하기 때문에 몰래 잔돈을 모아 군것질거리를 살 수도 없다. 평범한 가정주부인 셰릴 하보틀은 얼마 늘지도 않은 체중 때문에 사방에서 통제당하는 생활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본 단편집에서는 유일하게 여성 작가가 쓴 단편으로, 사소한 일상생활의 불편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보편성이 강한 작품이다. 건강관리에 대한 강박이 컴퓨터에 의한 사회통제와 연결될 경우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짤막하게 그려내는 블랙코미디. 외모나 체중에 대한 압박감으로 고생하는 현대 여성들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이며,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는 제일 유쾌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Prognosis: Terminal / 데이브 맥다니엘
사방에 설치된 공용 스크린에서 무료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홀로그램을 통해 어떤 예술이든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미래. 공연예술가인 버즈 호퍼는 사람들이 너무나 눈이 높아진 나머지 더 이상 참신한 라이브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은하계 저편에서 발신된 의문의 전파 신호에 대한 뉴스를 듣고 흥미를 갖는다. 그 신호는 인류보다 훨씬 발달한 종족이 초신성 폭발로 멸망하기 직전에 보낸 일종의 유언이었다. 아무리 발달된 과학이라도 태양계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버즈의 머릿속에 새로운 예술에 대한 영감이 떠오른다. 광속과 중력의 벽에 갇혀 지구라는 작은 돌덩이 위에서 맴도는 원숭이들의 가련한 일대기를 대규모 공연으로 펼친다면 어떨까?
예술 관련 전문용어나 저자가 만들어낸 신조어가 물밀듯이 쏟아져 가장 읽기 힘들었던 작품. 포켓폰이라는 휴대용 전화기로 장거리 통신은 물론 유료 프로그램 구매, 공용 스크린과 연동된 오디오 감상, 단축번호를 활용한 메모리 사용 등 현대의 스마트폰과 꽤 비슷한 기능을 이용하는 장면이 흥미롭다. 그런데 솔직히 TV나 인터넷이 발달해도 라이브 공연은 여전히 비싼 가격으로 사람을 긁어모으고 있는 걸 보면 저자의 우려는 좀 시기상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Future Perfect / A. E. 반 보그트
사람들의 재산과 생식의 자유를 주정부에서 집중관리하는 미래. 사람들은 성년이 되면 정부로부터 생활비 백만 달러를 지급받으며, 직장을 잡고 평생 일해서 그 돈을 갚아나가야 한다. 또한 특수한 약물 처리로 성충동을 조절할 수 있게 되어, 남자들은 생식기능을 정부에 의해 차단당했다가 컴퓨터의 중매로 배우자를 고르면 오직 그 한 명에만 반응하도록 제한적으로 생식기능을 돌려받는다.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길기 때문에 남자들은 자기보다 2~3세 연상의 여성들 중에서만 배우자를 택할 수 있다. 천재소년 스티븐 달킨스는 성년이 되자마자 지급받은 재산을 흥청망청 탕진하여 정부가 남은 재산을 압류하도록 유도한 뒤 누구도 생각지 못할 짓들을 차례차례 벌임으로써 사회에 대한 도전을 개시한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중에서는 가장 재미있었던 소설. 인물의 개성이 확실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짜여진 사회 시스템과 그것을 기상천외한 지혜로 농락하는 개인의 대결이라는 구도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어 나간다. 생긴 건 평범하지만 머리는 킹왕짱인 주인공이 자기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자들을 끊임없이 바보로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은 작가의 단편 <괴물>과 비슷한 느낌. 주인공의 진정한 목적은 사회혁명 따위 거창한 게 아니라 아주 작지만 소중한 사랑(자기와 같은 나이의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것!)이라는 점에서 약간 김빠지는 점도 있지만, 주인공과 계속해서 대립해 오던 중년 심리상담사 버너 박사가 큰 깨달음을 얻고 '아! 나도 이제 사랑을 찾아 떠나야겠구나!'라 생각하며 밤거리로 사라지는 결말이 의외로 귀엽다(?)

A Thing Of Beauty / 노먼 스핀래드
미국의 국력이 쇠퇴하고 일본이 세계를 호령하는 미래. 뉴욕은 반체제주의자들의 폭동으로 인해 대부분의 기능을 잃고 일부 히피족들만 거주하는 폐허더미로 바뀐 지 오래다. 뉴욕의 골동품 브로커인 해리스는 일본의 대부호 이토 씨로부터 교토의 자기 집 정원에 장식할 만한 거대 조형물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명문귀족의 딸과 결혼했으나 평범한 상인이라는 이유로 은근히 무시를 당해 왔던 이토는 자기의 심미안을 과시하여 처가 식구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생각이다. 해리스는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이토를 뉴욕 곳곳으로 안내하지만 그의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도통 찾을 수가 없어 곤란해하는데...
일본의 경제성장에 대한 미국의 불안이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곤혹스러워하는 미국인의 짜증이 유머러스하게 녹아들어간 코믹 단편. 성미가 까다로운 이토 씨는 머리가 날라간 자유의 여신상(미국의 쇠락한 현재를 떠올리게 하여 불편함), 양키즈 스타디움(이토 본인은 야구광이지만 처가 식구들이 비웃을까봐 걱정스러움), UN 본부(2차대전에서 일본을 방해한 역사가 생각나서 분노)를 모두 거절하고, 엉뚱하게도 브룩클린 다리를 팔라고 한다. 교통수단이 전부 비행기로 대체되는 바람에 본래 기능을 못하고 새똥과 이끼로 뒤덮인 퇴물 취급이나 받고 있던 브룩클린 다리를 팔라니 이양반 제정신인가 하고 반신반의하면서도 거금을 준다니 에라 모르겠다 하고 팔아넘기는 해리스의 배짱이 기막히지만, 그 다리를 철저히 수리해서 자기 영지 안의 산과 산을 잇는 아름다운 조형물로 개조해버린 이토 씨의 집념도 놀랍다. 조크 삼아 이토 씨가 보낸 마지막 선물은 '금박을 입힌 벽돌'로 위장한 진짜 금덩이인데, 해리스는 이게 대체 무슨 뜻으로 보낸 건가 하고 머리를 굴리지만 결국 의미를 알아내지 못한 채 이야기는 끝난다. 여러모로 유쾌하면서도 흘러간 시대를 엿볼 수 있어 인상깊은 단편으로, 이 책을 마무리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by 잠본이 | 2012/11/06 23:25 | 대영도서관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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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다져써스피릿 at 2012/11/07 01:33
몇몇 스토리는 꽤 재밌을거 같군요. 일단 아마존 위시리스트에 추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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