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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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더메이드 살인 클럽
원제: オーダーメイド殺人クラブ
저자: 츠지무라 미즈키[辻村深月]
역자: 김선영
출판사: 북스토리

중학교 2학년생인 고바야시 앤은 사는 게 너무나 재미가 없다. '빨간머리 앤'을 비롯한 촌스러운 소녀취향을 강요하면서 딸의 의견에는 신경도 안 쓰는 엄마, 바깥일 때문에 바빠서 대화다운 대화도 나누지 못하는 아빠, 어른이랍시고 거들먹거리지만 어딘가 한 군데씩은 모자라는 구석이 있는 선생들, 연애와 인기가수와 시시콜콜한 잡담에만 몰두하고 파벌을 지어 서로를 견제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친구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같은 반 여자애들,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남자애들.

자신을 옥죄는 주변 상황에 염증을 느낀 앤은 '죽음'이라는 현상 뒤에 숨어있는 퇴폐적인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려 강력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취미를 갖게 된다. 그녀의 독특한 취향을 이해하고 말상대가 되어주는 사람은 동급생인 도쿠가와 쇼리 한 명뿐. 허수룩한 외모와 기분나쁜 행동 때문에 별로 인기는 없지만, 의외로 앤의 고민에 공감하고 날카로운 충고를 해 주는 센스가 있다. 앤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발한 방법으로 자기를 살해해 달라고 도쿠가와에게 부탁한다.

제목만 봐서는 어두침침하고 비밀스런 분위기의 살인 미스터리를 기대하기 쉽지만 사실 이 작품은 청소년 성장 소설이다. 주인공이자 화자(話者)인 앤은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어 극히 평범한 모범생을 연기하지만 실제로는 남들에게 밝히기 어려운 특이한 취향을 갖고 있으며 자기를 평범하게 만들려는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해 반발하고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안달하는, 여러모로 복잡한 성격의 소녀다. 보통의 범죄 소설이라면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살인을 중심으로 하여 사람들이 갈등하고 번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겠지만 이 소설은 정반대로 앞으로 일어날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방법에 대해 의논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작가는 '희생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범인으로 어울리겠다 싶은 사람을 지명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살인을 청부한다'는 극히 비상식적인 상황을 큰 틀로 배치한 뒤에 앤의 작지만 아늑한 세계가 얼마나 연약하고 허무한지를 살짝살짝 암시하고, 고통을 두려워하는 주제에 단지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고 싶어서 죽음을 동경하는 앤의 모순 가득한 심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섬세하게 서술한다. 그와 동시에 결코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보다 교묘하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앤을 괴롭히는 친구들의 왕따 문제나 교사들의 무신경한 언행을 통하여 현대의 교육문제를 은근히 풍자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섬나라 독자들 중에는 이 소설을 '학원 카스트 문학'의 계보를 잇는 작품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학원 카스트 문학'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학생들이 여러 계층의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서로 어떻게 교류하는지 세밀하게 보여주는 청소년 소설의 서브장르를 뜻하는 모양이다.)

앤과 대비되는 또 한 명의 중심 인물인 도쿠가와는 이른바 '곤충계'로 불리는 인기없는 남자애 그룹 소속의 음침한 녀석으로 그려지는데, 학교 성적은 그냥저냥이지만 어려운 책도 술술 읽고 그림에도 재주가 있어 대회에서 상을 타며 매사에 어른처럼 냉소적으로 대처하는 등 의외로 재미난 구석이 많은 캐릭터다. 그렇지만 때로는 어린애다운 치기어린 행동이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가족에 관해 감추고 있는 사실도 있어서 단순히 오타쿠나 애늙은이라는 한 마디로만 정의할 수 없는 묘한 인물로 비쳐진다.

앤은 중학교 2학년이 끝나고 3학년이 되기 전에 적당한 시점을 찾아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 줄만한 죽음을 맞이하고자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도쿠가와의 조언을 얻어가며 차근차근 준비를 계속한다. 처음에는 단지 튀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계획이었으나 그동안 또래 그룹에서 고립되고 부모한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갑갑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절망감에 빠져든 나머지 그녀의 청부 자살(?) 계획은 점점 구체성을 띠게 된다. 과연 앤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특별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그녀가 지목한 도쿠가와는 정말로 그럴 배짱이 있는 인간일까? 이런저런 의문과 불안을 남겨둔 채 앤이 고른 결행일은 하루 하루 다가온다.

지방 중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녀의 일상을 그리는 작품인 만큼 외면적인 스케일은 별로 크지 않으나 마치 독자가 그 소녀의 머릿속에 직접 들어앉아 그녀가 보고 느끼고 저지르는 모든 것을 생생하게 체험하도록 만들어 주는 서술의 힘은 만만치 않다. 겉으로는 이렇다 할 사건도 없이 세월만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인공 소녀의 내면에서는 거의 빅뱅에 필적하는 엄청난 규모의 변동이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각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변화는 결국 소녀 자신뿐만 아니라 그녀와 기이한 인연으로 얽힌 괴짜 소년에게도 파급되고, 이 이야기가 끝날 때쯤에 독자는 그들의 유니크한 청춘이 지나가버린 사실을, 그리고 그들과 헤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못내 아쉬워할 것이다.
by 잠본이 | 2012/09/05 00:27 | 대영도서관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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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rumic71 at 2012/09/07 10:33
일본인일텐데 '앤'으로 번역한 건가요...
Commented by 잠본이 at 2012/09/10 19:09
어원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싶어서인듯. 이거 갖고 말장난하는 게 한번 나오는데 그게 주인공이 도쿠가와하고 가까워지는 기묘한 장면의 계기가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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