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by 잠본이 2006 이글루스 TOP 100 2007 이글루스 TOP 100 2008 이글루스 TOP 100 2009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 100 2011 이글루스 TOP 100
메모장
카테고리
태그
포토로그
라이프로그
rss

skin by 이글루스
굿바이 레닌
1989년의 동베를린, 남편이 서방으로 망명한 이래 딸 아리아네와 아들 알렉스를 억척스럽게 혼자 키워 온 열성 공산당원 크리스티아네는 우연히 알렉스가 반정부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는 8개월 후에야 겨우 눈을 뜨지만, 그 동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합되는 등 경천동지할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심신이 많이 쇠약해진 어머니가 충격을 받고 다시 쓰러질 것을 염려한 알렉스는 어머니에게 동독이 건재하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이런저런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 그의 거짓말은 어머니의 의심을 막기 위해 점점 커지기만 하고, 마침내는 주변 사람들까지 총동원한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로까지 발전한다.

볼프강 베커 감독의 2003년작 독일영화. 동서독 통일 초기의 동베를린을 무대로 하루아침에 익숙한 시스템을 잃어버리고 밀려드는 서방 문물에 허우적대며 혼란기를 헤쳐 나가는 동독 사람들의 일상을 유머러스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낸 희비극이다. 기본적으로는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어머니와 그녀에게 삶의 보람을 주려고 고군분투하는 아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 가족 드라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등장인물들이 직면하는 여러 가지 현실의 모습과 그들 사이의 갈등을 통하여 통일 직후 동독의 사회상을 절묘하게 담아낸 풍자극이기도 하다. 실제 동독의 냉전시대 기록영상을 토대로 그 당시의 풍물을 꼼꼼하게 재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서까지 자연스럽게 보여줌으로써 독일 통일의 의미와 그로 인한 후유증을 되짚어 보는 역사극으로서의 측면도 갖고 있다.

중반부까지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려는 알렉스의 거짓말이 점점 커져가는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어머니가 살던 방만 예전 그대로 꾸며놓은 뒤 어머니가 그 방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기본이고,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동독제 식료품 껍데기에 알맹이만 새로 채워넣어서 식사시간에 내놓고, 어머니가 일했던 학교의 학생들에게 병문안 와서 동독 시절 노래를 부르게 하는 알바를 시키는가 하면, 영화광인 직장 친구의 도움을 얻어 가짜 뉴스까지 찍어서 생방송인 척 하고 틀어주는 등 기막힌 트릭이 연속으로 펼쳐진다. 반대편 건물에 설치된 코카콜라 광고판을 설명하기 위해 동독 국영기업이 특허소송에 승리하여 코카콜라가 동독 상표가 되었다고 둘러대고, 아파트에 이사온 서독인들이나 주차장을 메운 서독 자동차들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동독이 경제난으로 허덕이는 서독 난민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구라를 치기도 한다. 알렉스는 이러한 거짓말을 거듭하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물론이고 원래 존재했었던 동독과도 전혀 다른, 한때 어머니가 꿈꿨고 지금은 자기가 살고 싶어하는 이상국가로서의 동독을 '발명'하기에 이른다. (설정상 크리스티아네는 동독 시절에도 너무 이상주의적이라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축출되었으니, 그녀가 바라던 진짜 사회주의 국가는 애초부터 꿈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상국가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알렉스나 다른 동독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통일 이후의 모습과 선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어머니가 저축해둔 동독 화폐는 교환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고 촉망받는 대학생이던 누나 아리아네는 학교를 중퇴하고 버거킹 점원으로 일하며 부유층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산을 정리하고 서독으로 이사를 가 버린다. 갑작스런 통일 작업의 진행으로 인해 동독과 서독 사이에는 가공할 만한 빈부격차, 직업격차가 생기고 그로 인한 후유증은 고스란히 동독의 평범한 시민들이 떠안게 된다. 알렉스가 꾸며낸 거짓말은 원래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한 장치로써 시작된 것이었지만, 어느 시점부터 알렉스 자신이 품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거꾸로 투영한 '꿈'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자꾸만 부풀어 가는 알렉스의 거짓말과 이에 동조하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는 통일을 너무 서두른 나머지 민생을 신경쓰지 못한 당시 정치인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거짓된 희망이라도 안고 살 수 있었던 동독 시절에 대한 애정어린 향수가 동시에 담겨져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계속되는 거짓말에 질린 누나 아리아네와 여자친구 라라는 알렉스의 허위를 지적하며 '사실을 말해드려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멈출 수 없는 알렉스는 어찌할 바를 몰라 괴로워한다. (라라가 러시아인 교환학생이라는 설정이 흥미로운데,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구소련 출신인 라라가 달라지는 시대의 흐름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데 비해 오히려 위성국가 출신인 알렉스는 그러한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나간 과거에 계속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서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러던 어느날 가족 별장에서 단란하게 시간을 보내던 어머니는 알렉스와 아리아네에게 아버지의 망명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게 되고, (서독 여자에게 반해서 도망갔다고 말해왔으나 사실은 당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먼저 가서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하지만 크리스티아네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남편과의 연락을 끊어버린 탓에 이산가족이 되었다.) 그로 인해 충격을 받은 알렉스는 어머니 또한 자기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오랫동안 거짓말을 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 이후 어머니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가자 알렉스는 그녀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이미 재혼하여 호화로운 집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어색함을 감추지 못한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나왔음에도 40여년 넘게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탓에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먹해져 버린 동-서독인 사이의 관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만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색하지만 극적인 재회를 주선한 뒤, 알렉스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거짓말을 준비한다. 자애로운 동독이 서독의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 장벽을 허물고 국경을 개방하기로 했다는 가짜 뉴스를 찍어서 보여준 것이다. 어린 시절의 우상이었던 우주비행사 지그문트 옌(사실은 젊은 시절의 옌을 닮은 택시운전수)이 새로운 권력자로서 TV에 출연하여 알렉스가 준비한 연설을 읽으며 '사회주의는 벽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동의 클라이막스다. 비록 거짓말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알렉스는 어머니가 한때 꿈꿨던 이상을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며, 크리스티아네는 이미 라라에게서 사실을 전해듣고 모든 것을 이해한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자기를 위해 애써준 아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그 뉴스를 믿는 척한다. 뉴스 자체는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알렉스와 크리스티아네가 그 뉴스를 보다가 서로의 눈길을 살피며 순간적으로 나누는 교감은 의심할 바 없는 진짜이기에, 이 장면이 관객에게 주는 감동은 각별하다.

결국 독일 통일이 법적으로 완료되고 사흘 뒤 크리스티아네는 평안하게 숨을 거둔다. 비록 동서독 어디에서도 화장한 재를 공공장소에 뿌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알렉스는 친구들과 이웃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릴 때 만들었던 장난감 로켓을 이용하여 어머니의 유골을 하늘 높이 띄운다. 로켓이 터지면서 영롱한 불꽃이 하늘을 수놓고 알렉스는 지상에서 그것을 지켜보며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이 결말은 거짓말이라는 역설적인 도구를 통하여 진실된 유대를 회복하는 가족의 모습을 그리는 동시에 통일로 인한 후유증을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 한 발을 내딛으려 하는 동독인의 초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어찌보면 이 영화 자체가 동독인들의 잃어버린 과거를 위로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기약하는, 한 판의 유쾌한 씻김굿일지도 모르겠다.

DVD를 물려주신 시네프린지님께 감사드린다.


ps1. 그런데 같은 분단국가라고 해도 훨씬 더 상태가 안 좋은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쟤네들은 너무 여유만만하군'이라는 소리가 나올 것 같다. 독일은 어찌어찌하다보니 행정적으로 분리되었던 거지만 우리는 대판 싸우고 남이 된 거란 말이지. 현재 시점에서의 생활 격차도 훨씬 크게 벌어져 있고(...)

ps2. 주인공 알렉스를 연기한 다니엘 브륄은 이민우씨를 닮은 장난스럽고 앳된 마스크가 눈길을 끈다. <본 얼티메이텀>에서 제이슨 본의 살해당한 여친의 오빠(...)라는 중요한건지 아닌건지 영 감을 잡을 수 없는 역할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거보다 더 깨는 할리우드 진출작이 있으니 바로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의 눈치없는 선전영화 출연전문 저격수 프레데릭 졸라! OTL

ps3. 제목의 유래는 물론 공산주의의 상징적 인물인 레닌이 독일 통일 이후 동독에서 외면당한 사태를 빗댄 것. 극중에서도 철거된 레닌 동상을 헬기에 매달고 날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실제 역사상의 동독 레닌상은 훨씬 커서 머리통만 분리하여 트럭에 싣고 갔다. 영화에 나온 운반 장면은 다른 곳에서 철거된 레닌상을 참조하여 CG로 합성한 것이다. 매달려 가는 레닌이 밑에서 벙찐 얼굴로 지켜보는 크리스티아네를 향하여 마치 삿대질을 하는 듯한 구도로 화면에 들어오는 장면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ps4. DVD에 실린 영상특전이 상당히 알차다. 삭제장면과 예고편은 물론 티저 예고편, 뮤직 비디오, 동독 관련 영상자료, 짤막한 메이킹 영상 등등이 깨알같이 실려 있다. 메이킹도 은근슬쩍 장난스럽게 연출된 부분이 눈에 띄는데 알렉스가 친아버지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파티 손님들이 '로베르트! 숨어있지 말고 나오시게!'하고 불러대는 대목의 촬영 풍경을 보여주면서 알렉스 역 배우가 아주 진지한 어조로 '이 지방에서는 로베르트를 소환하는 특별한 의식이 해마다 한 번씩 행해지는 관습이 있습니다...'라고 무슨 자연사 다큐멘터리스러운 해설을 달고 있다. (이거시 게르만의 개그센스인가! OTL)

ps5. 실제 역사에서도 병환으로 쓰러진 지도자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가짜 명령서나 가짜 신문을 건네주어 안심시킨 사례가 존재한다고 한다. 포르투갈 독재자 안토니오 살라자르나 위에서 언급한 레닌이 대표적인 케이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독재자가 아닌 평범한 민간인에 대하여 이런 공작(?)을 하기 때문에 더 골때린다.

ps6. 순전히 요상스럽게 꼬이는 상황과 그에 반응하는 인물들의 행동을 통하여 웃기고 울리는 작품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 중에 좀 괴퍅한 사람은 있을지 모르나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거의 여신급의 대범함과 지혜를 보여주는 라라를 비롯하여 약간 덜떨어진 듯하지만 꽤 많은 도움을 주는 아리아네의 서독출신 남친 라이너, 자타가 공인하는 영화덕후로 가짜뉴스 조작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는 알렉스의 직장동료 데니스, 달라진 현실에 대해 낙담하면서도 크리스티아네를 속이는 데 협력함으로써 살아갈 기운을 얻는 교장선생과 이웃 노인들, 그리고 작품 내의 귀여움을 전담하는 아리아네의 어린 딸 파울라 등등, 하나도 버릴 캐릭터가 없다. (기간을 넘긴 탓에 화폐교환 못해준다고 알렉스와 말다툼하는 은행 직원도 딱히 악역이라기보단 자기 할 일을 한 것뿐이고...)

ps7. 중간에 어머니 퇴원수속 밟으러 갔다가 담당의사가 바뀐 걸 알고 그전 의사는 어찌되었냐고 물어보는 알렉스. 서독 쪽으로 이사했다는 말을 듣자 '그래 선생님은 언제쯤 도망가실 예정인가요?'라고 냉소를 날린다. 의사는 끝까지 냉정을 유지하지만 갑자기 알렉스에게 잠깐 누워보라고 한 뒤 그의 가슴을 사정없이 쾅쾅 두드린다. 그러고는 프로답게 한 마디. '어머님이 심장발작 일으키시면 이렇게 하시오' (...이거 아무리 봐도 일부러 그런거같은데... 역시 게르만의 원한은 무섭군! OTL)
by 잠본이 | 2012/08/01 22:41 | 시네마진국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트랙백 주소 : http://zambony.egloos.com/tb/386772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Linked at 잠보니스틱스 : 다리를 둘러싼.. at 2012/08/02 01:40

... ... more

Commented at 2012/08/02 00:5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안경소녀교단 at 2012/08/02 08:49
그리고 2년후 남북한이 통일되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영화인 간큰가족이 개봉...했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게 되는데...
Commented by 블랙 at 2012/08/02 12:02
택시운전수는 그냥 닮은 사람이었나요?

우주비행사가 몰락해서 택시운전수 된건줄 알았는데...
Commented by 잠본이 at 2012/08/02 23:07
어느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게 모호하게 되어있습니다.
일단 본인 말로는 '닮긴 했지만 난 그사람 아니다'라고 하는데 나중에 알렉스가 '저 위는 어떤가요?'하니까 '아름답지만...찾아가기엔 너무 멀어'라고 대답하기 때문에 사실은 동일인일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게 되어있죠.

제 감상에선 일단 전자로 해석했는데, 캐릭터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도 우주비행으로 유명해진 이후 극중에서 11년이 지났는데 전혀 늙지를 않아서 미심쩍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건 뭐 초인로크도 아니고 OTL
Commented by rumic71 at 2012/08/02 14:57
한반도는 묵은 감정들을 해소하지 않으면 발칸반도처럼 될 가능성마저 있지요...
Commented by 뇌관 at 2012/08/02 23:03
한국에도 비슷한 (거의 동일한)소재를 이용해서 찍은 작품이 있긴 합니다. 간큰가족이라는 영화인데... 원작과는 다르게 딱히 훌륭하거나 그런 점은 없던 걸로 기억합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이전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