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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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로우 그레이브
의사 줄리엣, 회계사 데이비드, 기자 알렉스는 친한 친구 사이로, 에딘버러의 방 네개짜리 아파트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은 비어 있는 네 번째 방의 입주자를 찾기 위해 다양한 지원자를 면접하지만 도무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서 짓궂은 질문과 장난만 거듭한 끝에 다들 쫓아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작가를 자칭하는 휴고라는 남자가 찾아오고 그의 지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든 줄리엣은 다른 두 명을 설득하여 휴고를 네 번째 룸메이트로 맞아들인다. 하지만 며칠 뒤 휴고는 약물 과용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그가 들고 온 트렁크에서는 거액의 현금이 발견된다. 세 친구는 의논 끝에 돈만 챙기고 시체는 몰래 유기하여 증거를 없애기로 하지만 그 이후 세 사람 사이에는 불안과 의심이 끊이지 않게 된다.

대니 보일 감독의 1994년작 영국영화. 기본적인 장르는 스릴러이지만 간간이 영국인다운 블랙 유머가 끼어들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을 천연덕스럽게 그려낸다. 감독인 대니 보일과 각본가 존 호지의 데뷔작에 해당하며, 호지는 극중에서 신참 수사관 미첼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여유롭게 젊음을 구가하던 세 젊은이가 난데없이 등장한 시체와 돈가방이라는 비일상적인 아이템을 통하여 점점 헤어나오기 어려운 수렁에 빠져드는 과정을 유쾌하면서도 소름끼치게 묘사하고 있다. 알렉스 역의 이완 맥그리거는 이 영화를 통해 세상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이후 대니 보일-존 호지-이완 맥그리거는 <트레인스포팅>에서 재집결하여 그들의 재주를 유감없이 보여주게 된다. 휴고 역의 배우는 <트레인스포팅>에도 같은 복장에 같은 가방을 들고 마약상 역할로 등장하는데, 감독의 말에 따르면 동일 캐릭터라고 한다.

중반부까지는 돈과 시체를 주인공들이 어떻게 처리할지, 그리고 그 돈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원래 그 돈을 노리고 휴고를 쫓아온 두 불량배가 예기치 못한 사태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야기의 초점은 세 주인공의 심리상태로 옮겨간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들이 그 불량배들과 엎치락뒤치락 대결을 벌이며 자기들끼리 단결하여 우정을 회복하는 전개를 생각했으나 보기 좋게 빗나갔음. 그래 이래야 영국영화답지!) 나름대로 유쾌하게 살던 세 주인공이 기상천외한 상황으로 인해 점점 마음의 안정을 잃고 피폐해져가는 모습을 때로는 나른하게, 때로는 긴장감 넘치게 그려내는 감독의 연출이 돋보인다.

셋 중에서 제일 활달한 성격에 말도 많고 남들 신경 긁어대는 걸 은근히 즐기지만 정작 위기에 처해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허당스러움이 돋보이는 알렉스, 제일 얌전하고 점잖은 성격으로 그 때문에 괴롭힘도 많이 당하지만 시체를 처리하고 돈을 관리하면서 점점 숨은 잔혹성과 대담함을 표출하게 되는 데이비드, 그리고 두 남자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묵묵하게 기회만 노리고 있는 줄리엣이라는 식으로 세 사람의 상호작용과 각자의 성격 변화가 조금씩 쌓여가면서 결국 아무도 믿지 못하고 서로 대치하는 안타까운 클라이막스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결국 누구도 승리하지 못하고 서로를 허물어뜨리는 잔혹한 결말을 맞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배은망덕한 인물의 뒤통수를 침으로써 시원한 반전의 쾌감을 안겨주는 식으로 끝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허무함과 찝찝함이 감도는 참 뭐라 말하기 어려운 느낌과 함께 이야기는 끝난다. 처음부터 몇 번씩 되풀이되는 '세상에 친구 없으면 어떻게 살겠어'라는 데이비드의 독백은 전체 줄거리를 놓고 보면 그야말로 통렬한 반어법의 극치. 세 주인공이 미친 듯이 웃으며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진을 의도적으로 엔딩 크레딧 앞에 배치한 것도 그러한 반어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제 'Shallow Grave'는 시체를 묻을 자리를 너무 얕게 파서 경찰에 발견된 상황을 가리키지만, 주인공들 사이의 우정이나 유대감이 그만큼 피상적임을 의미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DVD를 물려주신 시네프린지님께 감사드린다.


ps1. 경쾌한 음악과 함께 거리를 카메라의 시선으로 질주하여 주인공들의 아파트로 이어지는 오프닝 연출은 필견. 후반부의 암울한 분위기와 좋은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ps2. 다들 아시다시피 이완 맥그리거는 나중에 스타워즈 프리퀄의 제2대 오비완 케노비로 출세하고 데이비드 역의 크리스토퍼 에클스턴은 2005년판 <닥터 후>에서 제9대 닥터를 연기했다. 그러니까 클라이막스에서 이 둘이 미친듯이 개싸움 벌이는 광경은 그냥 보면 개싸움이지만 사실은 오비완 vs 닥터가 벌이는, 우주의 운명을 건 세기의 대격돌이었던 것이다! (에클스턴이 지아이조 실사판에서 데스트로를 맡았다는 사실은 이쯤 되면 별로 쓸모 없는 사족으로 보일 지경 OTL)

ps3. 주인공들의 숙소로 올라가는 아파트 나선계단의 절묘한 구도가 또 일품인데, 계단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마치 사람의 눈동자를 연상케 하는 채광창이 있어서 그들의 온갖 치사한 행각을 '신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의도한 연출인건지 그냥 멋있어 보이길래 그렇게 찍은 건지는 불명.

ps4. 초짜시절의 풋풋한 맥그리거가 키무라 타쿠야 생각나게 하는 사자갈기 헤어스타일을 하고 마구 까불어대는 모습을 질릴 정도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는 영화다. 이 양반 요즘 하는 거 생각하면 진짜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인데 실제로 이런 시절이 있긴 있었구만 OTL

ps5. 결국 이 영화의 교훈은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 '수상한 물건은 반드시 경찰에 신고하자', 그리고 '가방은 들고 가기 전에 꼭 한번 더 확인할 것'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미 앞의 두 가지를 망쳐버린 상황이라면 세 번째라도 잘 지켜서 패가망신을 면하도록 하자(뭔 소리여)

ps6. 알렉스가 그렇게 까불어대는 것도 처음에는 '시밤바 이자식 왜이래' 싶었는데 보면 볼수록 허전함이나 외로움을 저런 식으로 감추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말에 하는 짓을 보면 그래도 겉보기와는 달리 세 명 중에서는 가장 덜 망가진 인물이었던 듯. 근데 초반부에 놀고 먹는 장면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이놈 백수인가 싶었는데 기자질을 하긴 하네? OTL

ps7. 제작비 250만 달러의 저예산 독립영화라 때깔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런 구질구질함이 오히려 더 생생한 현실감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제작 도중에 영화 찍을 필름이 모자라서 사용이 끝난 소품을 내다 팔아야 했다는 눈물겨운 사연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때만 해도 보일 아저씨가 <슬럼독 밀리어네어> 같은 걸 찍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겠지 OTL)
by 잠본이 | 2012/08/01 10:32 | 시네마진국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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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harkman at 2012/08/01 13:54
에클스턴은 히어로즈에도 투명인간으로 나왔었죠. 등장하는 장면에서 격뿜했는데. 지금도 깨알같은 캐스팅이었다고 생각함.
Commented by 야니 at 2012/08/01 22:47
에클닥이 영 영오비완과 맞대결했었다니! >ㅅ< 이런 깨알 같은 정보를 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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