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여기저기서 형편없다고 욕을 먹길래 기대치를 잔뜩 낮추고 갔더니 그냥저냥 평범한 우주특촬히어로물로는 볼 만하다는 느낌. 인물들이나 내용 전개가 미묘하게 전형적이라 '대충 보아하니 이 다음 장면에 그게 나오겠군'하는 식으로 예상을 해도 들어맞을 정도로 이야기가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완만하게 흘러간다.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장대한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주요인물들의 범위가 그리 넓지 않다 보니 좀 규모가 뻥튀기된 동네 싸움 정도의 느낌이 든다. 화려하고 정교한 그래픽과 다소 뻘쭘해도 웃겨주는 개그가 눈길을 끌지만, 슈퍼맨과 배트맨을 대체할 만한 워너-DC의 차세대 기대주로써 엄청나게 제작비를 때려넣은 걸 생각하면 약간 불안한 수준이다. 그렇다고 그냥 TV나 DVD 등으로 직행하여 작은 화면으로 즐기기에는 스펙터클에 들어간 공이 만만치 않아서 좀 아깝다. 하여튼
할베리의 <캣우먼>이나 케서방의 <고스트 라이더> 정도로 망한 물건은 아니고 그럭저럭 무난하게 즐길 만한 작품이긴 하다.
-주인공 할의 내적 성장이라든가 헤로인 캐롤과의 로맨스, 선배 랜턴들과의 갈등과 화합 등등 드라마 면에서 좋은 요릿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중간까지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대충 알아서 상상하라는 식으로 넘어가거나, 충분한 시간을 들여 보여주기는 하는데 너무 피상적인 정보전달에만 그치고 실제로 인물들이 느꼈을 감정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나 할이 용기와 인간성을 무기로 두려움을 이기고 패럴렉스에 대적할 정도의 용사로 성장하는 과정은 꽤 중요한 포인트임에도 불구하고 헤로인의 격려 대사 몇마디에 갑자기 깨달음을 얻더니 전투 중 위기에서도 아주 약간 밀리는 척 하다가 랜턴의 맹세를 암송하며 와다다다 돌파하는 식으로 처리하고 있어서 머리로는 이해해도 감정적으로 잘 납득이 안 간다. 할이 품고 있는 두려움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사고사로 인한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 해결되는 걸 납득이 가게 묘사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오히려 악역인 헥터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열등감 때문에 패럴렉스에게 침식당하여 괴물화되는 과정이 더 감정이입이 잘되니 이것 참 골때릴 지경이다.)
-그린랜턴의 초능력은 순전히 반지 착용자의 의지력을 파워로 변환하여 착용자가 상상한 물건을 실체화시킴으로써 구현된다는, 어찌보면 과학이라기보다는 마법에 더 가까운 능력이다. 그러다 보니 그냥 냅다 두들겨패거나 요상한 무기를 휘두르거나 특정한 에너지를 발사하는 식의 통상적인 배틀보다 훨씬 흥미진진하고 예측 불가능한 공격 패턴을 선보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 반대로 이러한 설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관객에게는 밑도끝도없이 황당무계한 능력으로 비칠 수도 있는 만큼 극중에서 어떤 식으로 환상성과 현실감각의 균형을 잡아가며 설득력 있게 표현할 것인가가 관건이라 하겠다. 실제 완성된 장면들은 발달된 CG기술과 배우들의 피땀어린 연기에 힘입어 꽤 그럴싸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특히 주인공 할의 경우는 특유의 유머러스하고 임기응변에 강한 성격과 반지의 능력이 어우러져 선배 랜턴들보다 훨씬 자유분방하고 변화무쌍한 액션을 보여준다. 현실에 있을 법한 사물을 극도로 과장된 형태로 즉석에서 만들어내어 연속으로 전투에 투입함으로써 의외의 효과를 얻는 할의 진기명기를 보노라면 워너가 한때 <루니 튠즈> 등의 카툰에서 잘 써먹었던 '속임수로 상대방 골탕먹이기(practical joke)'가 생각나서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에 비해 선배 랜턴들의 역할은 상당히 미미한 편인데, 할에게 반지를 물려주거나(아빈 수르), 다가오는 위기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고 할의 잠재력에 대해 의문을 표하거나(시네스트로), 할에게 랜턴의 가르침을 전수하거나(토마 리와 킬로웍) 하는 정도이고 실제 전투에 참전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중반에는 시네스트로의 지휘 하에 패럴렉스를 체포하러 갔다가 보기좋게 나가떨어짐으로써 '시밤바 저놈아가 강하긴 강한가보네'라는 느낌을 주는 정도고 후반에는 지휘부인 가디언들이 지구를 포기하고 총본부인 오아나 잘 지키자는 방침으로 일관하기 때문에 할 이외의 다른 랜턴들은 전투에 나가지조차 못한다. 다양한 외계생명체들이 종족과 고향과 습성을 초월하여 전우주를 지키자는 대의 아래 단결한 그린 랜턴의 매력적인 세계관을 최소한도로밖에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엔딩 크레딧 중간에 속편을 암시하는 어떤 장면이 나오는 만큼 이후에는 좀더 다른 랜턴들의 활약도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런데 솔직히 그 장면은 원작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저 형씨가 갑자기 왜 저러는겨'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뜬금없었는데... 이것도 역시 지식으로는 대강 이해가 가지만 느낌으로는 납득이 안 가게 되어있다. 그 문제의 아이템을 둘러싼 본편 장면에서 약간이라도 더 복선을 넣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헤로인인 캐롤이 파일럿으로서도 사업가로서도 의욕이 넘치고 위기상황에서도 주인공에게 도움을 주며 정체를 감춘답시고 마스크 눌러쓴 주인공을 금방 알아보는 똘똘함을 과시하여 마음에 든다. (역시 도미노 마스크는 저럴 때 아무 도움이 안돼... 그렇다고 머리 전체를 뭘로 덮으면 별로 그린랜턴스럽지 않을테니 그건 또 그거대로 문제군 OTL) 하지만 그 외의 조연들은 초반에는 주인공의 일상과 성격 묘사를 위해 꽤 중요한 것처럼 동원되더니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점 무대 뒤로 밀려나거나 아예 중간에 잊혀져 버리는 안타까운 대접을 받고 있다. (초반에 잠깐 나오고 사라지는 할의 형제와 조카, 사업 관계로 이래저래 골머리를 앓는 캐롤의 아버지, 그리고 분명 할의 각성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의논상대까지 되어줬는데도 캐롤의 비중이 엄청 높다보니 점점 설 곳을 잃어버린 안경잡이 동료 등등 OTL) 이야기의 초점을 할과 캐롤, 그리고 시네스트로에 맞춘 각본상 어쩔 수 없는 조치였겠지만 그래도 패럴렉스 침공이나 결말 부분 정도에 얼굴이라도 내밀고 '이들이 있기에 주인공은 오늘도 싸운다!' 정도의 암시라도 주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하긴 그러면 안그래도 소년만화스러운 분위기가 더욱 더 소년만화스럽게 되겠지만 뭐 어쨌든.)
-DC코믹스의 작중 세계에서 꽤 중요한 인물인
아만다 월러가 등장. 본래 코믹스에서는 정부요원 출신으로 별다른 특수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숱한 초인들과 맞장을 뜨며 안티히어로 노릇을 하는 파워풀한 캐릭터다. 워낙 작품을 가리지 않고 이리저리 등장한 덕분에 그린랜턴뿐만 아니라 웬만한 DC 주인공들과 다 공연해본 역전의 용사로, 애니메이션 <저스티스 리그 언리미티드>나 TV드라마 <스몰빌>에도 게스트로 출연한 바 있다. 본 영화에서는 아빈 수르의 시체 해부를 헥터에게 맡김으로써 패럴렉스 감염의 단초를 제공하는 비밀기관의 과학자 역할인데, 이 배역을 담당한 배우 안젤라 바셋은 원작 캐릭터의 내력을 알고 나서
'마치 마블 스튜디오 영화에서의 닉 퓨리처럼 다른 히어로 작품에도 같은 역으로 나온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만 워너-DC가 마블과 같이 공통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연속으로 만들지는 아직 미지수이기 때문에 아직은 개인적인 희망사항일 뿐이다.
ps1. 할 조던의 승부는 주먹으로 시작해서 주먹으로 끝난다. (뭔소린지는 영화를 보면 안다.)
ps2. 패럴렉스의 목소리가 누군가 했더니 무려 클랜시 브라운! (STAS 렉스루더가 오아에 잠입?!)
ps3. 저렇게 ○○버리면 되었을 것을 아빈 수르는 왜 그 고생을 하면서 굳이 ○○을 했을꼬? OTL
ps4.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 DC의 그린랜턴 단행본 광고가 나온다. 국내에도 출간된 <시크릿 오리진>은 라이언 레이놀즈가 분장한 할을 표지사진에 박아둔 신장판이 나온 모양. (소설의 경우는 영화화에 맞춰 영화버전 커버가 따로 나오곤 했지만 만화도 이렇게 하는 줄은 몰랐네...) 그래 영화를 재밌게 봤으니 이제 책을 사라 이거지? 잠깐만 기다려, 일단 저축부터 하고...OTL
ps5. DC가 대우주 스케일의 히어로 영화를 개척했으니 이제 마블도 코스믹 히어로들을 내보낼 차례다! ...라고 설레발을 치는 놈들도 물 건너에 있는 모양. 근데 이제와서 <노바>나 <캡틴 마벨>을 해봤자 그린랜턴 짝퉁이란 소리나 들을 거 같고 해서 좀 미묘한 기분일세...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