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서 활약했던 미군 헬기 조종사가 어딘가의 통근열차 안에서 갑자기 눈을 뜬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자기를 처음 듣는 이름으로 부르고 신분증도 자기 것이 아니며 거울에 비친 모습마저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다. 주인공이 당혹스러워하는 순간 열차가 폭발하고 그는 어딘가의 캡슐 안에서 다시 깨어난다. 밖에서 모니터하는 사람들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 열차 폭발은 실제로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며 자기는 희생자 중 한 명의 의식으로 이동하여 사고 직전 마지막 8분 동안 범인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에 지원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리고 왜 저들은 주인공을 캡슐 밖으로 내보내주려 하지 않는 것일까? 쉴 새 없이 의심과 절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주인공은 과거로의 이동을 거듭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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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의 던칸 존스 감독이 연출한
2011년작 SF스릴러. 이미 수많은 매체에서 다루어 왔던 '타임 루프'와 '다세계해석(혹은 평행우주론)'을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참신한 느낌을 주는 작품. 대규모 파괴 장면이나 약간의 액션이 따라붙기는 하지만 주된 초점은 주인공이 처한 특수한 상황과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미스터리 드라마의 요소가 강하다. 처음에는 주인공을 영문도 모른 채 뜬금없는 상황에 던져넣은 뒤 그 배경과 자신의 처치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서서히 파악하도록 스토리를 구성했기 때문에, 관객도 주인공과 함께 감춰진 비밀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절로 그의 입장에 공감하게 된다.
-처음에는 주인공이 과거에 일어난 일을 파악하여 앞으로 일어날 제2의 테러를 예방해야 한다는 목표에 집중하고 있지만, 주인공을 모니터하는 자들이 그에게 감추고 있었던 진실이 드러나고, 점점 원래 목표의 달성 가능성이 확실해지면서 '그럼 그 다음에 주인공은 어찌되는 걸까?'라는 두 번째 문제를 꺼내어 관객이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 루프물의 정석에 충실하게 '전체적으로는 공통되는 흐름이 있지만 세부적으로는 미묘하게 다른 식으로 반복되는 과거에 대한 지식을 얻음으로써 최선의 결과를 향해 나아간다'는 패턴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과는 별도로 주인공의 신상에 얽힌 딜레마를 배치함으로써 이야기가 단조로워지는 것을 막는 것이다.
***영화 내용에 관한 심각한 천기누설을 함유하고 있습니다***-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주인공과 연결된 컴퓨터 프로그램인 '소스 코드'이다. 이 프로그램은 테러 사건으로 죽은 희생자의 뇌에 미세하게 남아 있는 전자장을 추출하여 인간의 단기기억이 8분간 지속된다는 점을 이용해 그 희생자의 뇌와 피험자의 뇌를 동기화시켜 희생자가 마지막 8분간 체험한 일을 대리체험하게 해준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단순히 죽은 자의 기억을 기초로 한 시뮬레이션에 불과할 텐데, 죽은 자가 모르는 주변 상황을 어떻게 알아낸다는 것일까? 주인공도 처음에는 이와 비슷한 의문을 갖지만, 프로젝트를 지휘하는 과학자의 설명을 듣고 상황이 그보다 더 복잡함을 알게 된다.
-주인공은 죽은 자의 기억을 매개로 하여 진짜 과거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과거는 주인공과 연구진이 본래 위치하고 있는 세계가 아닌 또 하나의 평행세계에 존재하는 과거이며, 거기서 벌어진 일은 본래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즉 주인공이 프로그램에 진입하여 체험하는 세계는 본래 세계와 마찬가지로 생생하게 존재하는 '진짜'이며, 따라서 매개체(희생자의 뇌)가 갖고 있는 사전정보에 영향을 받지 않고 폭탄의 위치나 범인을 찾아낼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주인공이 진입하기 전까지는 본래 세계와 완전히 똑같이 돌아가다가 주인공의 진입으로 인해 평행세계로 분기하게 되므로, 폭탄이 원래와는 다른 곳에 있거나 범인이 엉뚱한 사람이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또한 본래 세계에서는 이미 열차 폭파는 변경불가능한 과거의 사건이므로 진입한 세계에서 흐름을 바꾸더라도 이미 일어난 폭파를 막거나 승객들을 살릴 수는 없다.
-문제는 이렇게 자꾸만 늘어가는 평행세계들이 단지 8분간의 체험 이후 자연소멸하는 인스턴트 환각인지, 아니면 본래 세계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흘러가는 어엿한 시공연속체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프로젝트의 지휘자들은 자기들의 이론에 근거하여 전자라고 판단하고 주인공이 체험하는 것은 순간순간 생겨날 수도 있는 평행세계의 잔영(shadow)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책상머리에 앉아 키보드나 두들기며 지루하게 감시하고 있는 그들과 달리 직접 뛰어들어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여러 번의 죽음을 겪어 온 주인공은 아무래도 그들에게 동의할 수가 없다. 결국 주인공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2번째 테러를 예방하고 수백만 명의 목숨을 살리지만 탐욕스런 과학자는 '임무가 끝나면 해방한다'는 약속과 달리 그를 또 다시 이용해 먹을 궁리를 하고, 주인공은 자기의 목숨과 또 다른 평행세계의 운명을 건 일생일대의 도박을 시도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를 기다리는 최후의 운명은...(나머지는 극장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소재 면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지만 사실 작품 내에 흐르는 주제의식이나 연출 스타일은 <더 문>과 여러모로 유사하다. 수많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비인간적인 시스템에 편입되어 마치 시지프스의 고난처럼 끝없는 노고를 감내해야 하는 개인의 비애와, 시스템에 대한 그 개인의 마지막 반격을 그려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바쁜 나날에 함몰되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챙겨주지 못했던 한 남자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기의 과오를 깨닫고 아직 남아있는 육친이나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을 위해 행동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비록 <더 문>보다는 등장인물이 대폭 늘어났지만 필요없는 서브플롯을 극력 배제하고 소수의 핵심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의 맥을 놓치지 않게 하는 연출도 여전하다.
-하지만 <더 문>이 전반부에 수수께끼를 다 해결하고 나머지 파트에서는 주인공의 심리변화를 세밀하게 그려내어 눈물샘을 자극하는 정적(靜的)인 드라마인 데 비해 본작은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수수께끼를 던져줌으로써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는 것은 물론, 군데군데 시의적절한 액션과 감정의 폭발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역동적인 작품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던칸 존스가 자기 자신의 주제의식과 감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훨씬 규모가 큰 대작을 만들 능력도 있음을 증명한 값진 성과라고 할 만하다.
-그야말로 이성적으로 잘 짜여져 앞뒤가 딱딱 맞는 스토리를 보여주면서도 적절한 타이밍에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도 잊지 않는 균형잡힌 작품이라 할 만하다. 후반으로 갈수록 평행세계의 중요성이 커지기 때문에 종래의 단선적인 시간여행 플롯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혼란을 줄 우려가 있긴 하지만, 소스 코드의 속성과 다세계해석의 성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본다면 뒤통수에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신선한 충격을 경험할 수 있다. 루프물의 특성에 걸맞게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사방에 흩뿌려져 있던 요소들이 뒤로 갈수록 하나 둘씩 중요한 역할로 떠오르면서 색다른 만족을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리저리 머리를 쓰게 하면서도 인간적인 감성을 잊지 않는 고전 SF에 향수를 느끼는 분이나, 생활에 찌든 현대 남자의 좀 특이한 자아발견 모험담을 기대하는 분께 적극 추천한다. (반대로 뭔가 대규모로 뻥뻥 터지고 주인공이 날라다니는 전형적 블록버스터를 원한다면 피하시길)
ps1. 목소리만 등장하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무려
<광속인간 샘Quantum Leap>의 스콧 버큘라. 아시다시피 버큘라는 이 드라마에서 과거의 타인과 자리를 바꾸는 방법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과학자로 출연한다. (어디서 많은 들은 설정같지 않은가? ;-) 클라이막스에서 주인공과 통화할 때 내뱉은 대사 "오, 맙소사(Oh, boy)"도 이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였다고.
ps2.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평행세계 설정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마지막 장면들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IMDB 게시판의 토론을 참고할 것. 물론 이 영화도 100% 완벽한 신의 작품은 아니기 때문에,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궁금증이 터져나오고 있음에 유의하기 바란다.
ps3. <더 문>이 '자기를 희생해서 또 다른 자기를 구하는' 해피하지만 역시 좀 우울한 엔딩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눈물 쪽 빼고 새드엔딩으로 끝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아주 기막히게 그 문제를 돌파하여 해피엔딩을 이끌어내고 있다. 물론 해석에 따라서는 '클라이막스의 그 정지된 부분'이 주인공의 진정한 종말이고 그 뒤에는 그냥 천국으로 간 거다~ 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일단 감독 본인은
io9와의 인터뷰에서 '다른 우주로 넘어가서 정착한 거 맞음'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으니 안심해도 될 것 같다.
ps4. 가장 불쌍한 건 역시나 제대로 등장도 못하고 주인공 몸셔틀이 되어버리는 펜트리스 선생님(엉엉)
ps5. 홍주희씨의 번역은 대체로 무난하지만 몇 군데 지나친 의역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예를 들어 후반부에 주인공이 헤로인에게 '살아갈 시간이 몇 분밖에 안 남았다면 뭘 하겠냐'고 하니까 화면에서는 '남은 일분 일초를 소중히 보내야죠'라고 하는데 자막은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겠어요'라고 하니 손발이 오글거릴 지경이다. 로맨스 분위기를 내는 건 좋지만 대사를 왜곡하는 건 좀... (마지막 크레딧 올라오기 전에 굳이 평행세계의 개념에 대해 원본에도 없는 해설을 달아주는 건 SF설정에 면역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쳐도 말이지)
ps6. 열차 폭파를 계기로 소스 코드 프로젝트가 정상 발동된 것이라고 치면, 이제까지 주인공의 난입으로 인해 분기된 세계들은 한 군데만 빼고 전부 폭파를 막지 못했으니 그때마다 그 세계들에서는 각각 다른 '주인공'들이 소스 코드에 접속하게 되었다는 얘긴데, 이러다 보면 대체 몇 개의 평행세계가 생겨나는 걸까 무섭기 그지없다. (하나의 나무에서 수많은 가지들이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식으로 우주가 분기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등골이 오싹하다.)
ps7.
펠릭스 라이터는 아무리 날고 뛰어도 첩보전에서
크레이그 007에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피도 눈물도 없는 과학자로 전업하여...(임마 사람이 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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