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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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저자: 듀나
출판사: 자음과모음

PC통신 시절부터 활발한 활동을 보여왔으나 현재는 소설가보다는 영화평론가나 게시판 운영자로 더 잘 알려진 저자의 최신 단편집. 1998년부터 2010년에 걸쳐 각종 잡지와 통신매체를 통해 발표된 13편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다. 작품에 따라 분량과 소재는 약간씩 다르지만 왠지 무심한 듯 시크한 저자 특유의 문체와 어느 한 장르로 정의하기 어려운 독특한 스타일은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듀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저자의 시선이 참으로 가차없고 냉정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아무래도 대부분의 작품이 특정 개인이나 인류 차원을 넘어선 더 넓은 관점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독자의 공감이나 감정이입을 전혀 허락하지 않는 차가운 방정식의 기호에 가깝다. 성질이 좋거나 나쁘거나, 개성이 있거나 없거나, 역할이 크거나 작거나 그러한 특성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이나 그들의 성격보다는 그들이 맞닥뜨리는 부조리한 상황과 그로 인한 경악(혹은 좌절)이라고 여겨지는데, 그 부조리한 상황은 때로는 평범한 일상 속의 눈치채기도 힘든 조그마한 파문의 형상(<동전 마술>, <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으로, 때로는 한 도시나 행성을 뒤덮을 정도로 엄청난 스케일의 기현상(<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안개 바다>)으로, 그리고 때로는 인물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들의 인생을 지배하는 '강고하지만 세련된' 시스템의 형상(<호텔>, <죽음과 세금>, <소유권>)을 빌어서 나타난다.

처음에 극중 인물들은 그러한 부조리에 대하여 저항하기도 하고 분석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결국 속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그 현상에 안주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거나(<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 더욱 더 큰 저항을 모색하다 벽에 부딪혀 파멸하거나(<죽음과 세금>, <소유권>, <여우골>) 완전히 인간의 형상을 포기한 채 또 다른 존재로 전이해버리기도 한다(<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디북>). 작품에 따라서는 여러 명의 주역이 각각 앞에서 열거한 역할들을 분담하여 저마다의 길을 모색하기도 한다. (대체로 이런 작품에서는 부조리에 안주하거나 아예 그 대리인 노릇을 하는 인물의 시선을 통해 저항하다 좌절하는 자의 말로를 담담하게 그려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시스템'이나 '특수한 섭리'를 상대로 할 경우 십중팔구 그런 식이다.)

듀나의 소설이 이채를 띠는 이유는 이러한 변화와 적응(또는 좌절)의 구도를 순문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표현에 의존하지 않고, 즉물적이고 구체적인 장르소설의 관습을 이용하여 펼쳐보이기 때문이다. 전자적 네트워크와 인간형 로봇이 실현된 SF의 세계이건,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괴물과 자기가 죽었는지도 모르는 유령이 배회하는 호러의 세계이건, 허공으로 던져올린 동전이 사라지고 성녀의 동상이 슬금슬금 움직이는 판타지의 세계이건 간에 그러한 주제의식은 한결같이 보존되며, 때로는 각 장르의 '정해진 약속'을 은근슬쩍 뒤틀면서 기묘한 상승효과를 낳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장르소설의 장치와 관습을 빌려오되 장르의 전형성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고 순전히 '수단'으로써만 이용한다.

결정적인 해결을 보여주지 않고 한 인간의 좌절이나 인류가 알아온 세계의 파멸(비록 그것이 또 다른 존재들에게는 새로운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 해도)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듀나의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이 추구해 온 권선징악이나 인간성의 탐구와는 별로 관계가 없으며 수수께끼가 더 큰 수수께끼를 낳고 해답은 여전히 저 밖에 있다는 점에서 SF가 흔히 보여줄 법한 퍼즐 스토리의 경향을 따르지도 않는다. 저자는 냉정한 시선으로 인류의 어리석음을 목도하고 부조리한 현상 그 자체가 절대적인 힘으로 세계를 바꿔나가는 광경을 담담하지만 얄궂은 말투로 들려줄 따름이다. 세계의 변화 앞에서 인생은 하나의 허망한 블랙 조크에 다름 아니며, 독자는 그러한 광경을 다소 불편한 심정으로 지켜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성을 초월한 그 전개에 일종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매료당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무슨 마약 같군)

물론 듀나의 세계에는 그러한 파국적인 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환상이라는 소재를 빌어 여성들이 일상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또는 서로에 대해 느끼는 미묘한 감정을 풀어나가는 이야기(<메리 고 라운드>)도 있고, 사소한 장난에서 시작하여 점점 당사자들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의 현상으로 번져나가 종국에는 하나의 생태계를 만들어버리는 사고실험(< A, B, C, D, E & F >)도 있으며, 하나의 '순수한 벡터'를 소재로 삼아 가슴 훈훈한 전설을 엮어내는 위트(<성녀, 걷다>)도 있다. 한 작가가 계속해서 자기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이렇게 다채로운 방향성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단편이라는 형식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겠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듀나의 작품은 중편 이상으로 길어질 경우 아무래도 초반의 임팩트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여 단편보다 읽는 맛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 시기에 걸친 다양한 작품들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약간 마구잡이로) 수록했다는 점에서 처음 듀나의 세계를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첫 경험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며, 예전부터 읽어온 독자들에게는 저자의 변함없는 스타일과 깊어지는 내공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게 해줄 것이다. 다만 그 특유의 스타일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품도 있는 만큼, 선택은 각자의 몫에 맡긴다.


ps1.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작품은 역시 < A, B, C, D, E & F >. 인터넷의 익명성이 워낙 흔해빠진 것이 되어버린 요즘 와서 보면 그냥 일반소설이라 봐도 될 정도로 무리가 없는데, 저자 후기에서 이 작품이 집필된 시기를 알고 벙 쪘다. SF였던 거냐!

ps2. 예전 단편집에서는 작품 사이에 슬그머니 끼워넣은 키워드(의천시, 필로인 등)를 통해 같은 세계관이 아닐까 추측하며 즐기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케이스가 별로 없어 아쉬웠다. <소유권>에서 텔렉 로봇들의 '그 후'에 대해 약간이나마 알게 되어 기쁘긴 했지만. (그 대신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를 필두로 하는 일련의 '링커 우주' 시리즈가 조만간 이어질 듯 하니 이쪽은 꽤 기대된다.)

ps3. 책 말미에 실린 평론도 그런대로 읽을 만 하다. 현란한 사회학적 분석에 이르러서는 '꿈보다 해몽'이란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기존 발표작의 대사까지 인용하며 듀나의 세계를 나름대로 알기 쉽게 개관하려 한 성의가 엿보여서 마음에 든다.

ps4. 작품별 내용에 대해서는 게렉터님날개님의 글을 참조.
by 잠본이 | 2011/01/30 16:25 | 대영도서관 | 트랙백 | 핑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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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보다 해몽&#8217;이란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기존 발표작의 대사까지 인용하며 듀나의 세계를 나름대로 알기 쉽게 개관하려 한 성의가 엿보여서 마음에 든다. ※원문 작성: 2011-01-30 sf단편집듀나자음과모음판타지한국소설 Previous article Be the first to comment Leave a Reply 응답 취소 Your email a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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