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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생만경 : 2010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
저자: 배명훈 외 21인
출판사: 거울

올해도 어김없이 콜렉션의 시간이 돌아왔다. 그야말로 ‘작년에 왔던 작품집 죽지도 않고 또 왔네’라는 농담이 가능할 정도로, ‘거울’의 중단편선은 해마다 꾸준히 나오고 있어서 국내 환상문학에 목마른 독자들에게는 매우 좋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수록 작품들을 이미 사이트를 통해서 감상했던 독자들은 평소에 눈여겨봐뒀던 작품이나 작가를 재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고, 아직 감상할 기회가 없었던 독자들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겨가며 미지의 이야기를 탐험하는 두근거림에 젖어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불안정한 데이터의 집합체가 아니라 일정한 형체를 가진 종이책으로 소장할 수 있다는 메리트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보관하기가 좀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보고 싶은 내용이 있을 경우 일부러 컴퓨터나 전자기기를 켜고 기다릴 필요 없이 순식간에 책장만 들춰보면 된다는 점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종이책의 장점이니 말이다.

그런 뜻에서, 이번에도 수록 작품별로 주목할 만한 포인트를 짚어보고자 한다. 내용 누설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리스크가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를 두려워해서야 어찌 감히 리뷰를 할 수 있으리오.


■ 천상열차 / 배명훈
처음에는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면서도 결국 서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작가와 비평가의 불편한 공생관계를 묘사하려나 싶었지만 중간부터는 그런 구도를 완벽하게 초월하여 더욱 더 기막힌 전개를 보여준다. 순전히 우연에 따라 글 속에 파고들어간 사소한 실수는 점점 영역을 넓혀가며 확대 재생산되고, 결국은 저자의 손을 벗어나서 현실 그 자체를 바꿔버리기에 이른다.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글’(또는 글 속에 탑재된 ‘표현’)이 가지는 끈질긴 생명력이라는 소재를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글’ 그 자체, 정확히 말하자면 글 속에 우연히 들어간 ‘오타’일지도 모르겠다. 이해심 많은 아내와 베스트셀러 작가 등극 등 겉보기엔 행복할 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화자(話者)의 마음은 ‘언제 그 실수가 탄로나서 망신을 당할까’라는 번뇌로 바람 잘 날이 없다는 아이러니가 재미있다. ‘우리의 영원한 주인공 은경이’나 ‘석기창비록’ 등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오마주는 그동안 읽어준 독자들에 대한 애교스러운 보너스.

■ 영원히 66사이즈 / 정세랑
특이한 상황에 처한 주인공이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에 적응하는 과정과, 적응 이후 그동안 품어왔던 사랑에 과감히 방점을 찍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현대 한국의 지루한 일상 속에서 언데드라는 비현실의 생물들이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제법 실감난다. 클라이막스에서 보여주는 처절하고도 안스러운 짝사랑의 비극은 분명 슬프고 무시무시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절로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부조리한 매력이 넘친다. 자세한 것은 천기누설이니 말할 수 없지만 알기 쉽게 예를 들자면 다음 대화와 같다.
‘악귀가…좋지 않은 곳을 물었어요.’
‘으아니 이게 무슨소리요 의사양반! 내가 ○○라니! ○○라니!!!’

■ 묘생만경 / 계림
「자연은 살아있다」라는 원제에 걸맞게, 고양이의 눈으로 본 귀농 가족과 가축들의 세계를 그린 작품. 처음에는 인간들이 모르는 곳에서 펼쳐지는 동물 사이의 치정극으로 시작해서 단순한 ‘지능’의 문제를 넘어서는 자연의 절묘한 장난 때문에 빚어지는 파국을 보여준다. 겉보기에는 한가로운 시골을 배경으로 아기자기하게 펼쳐지는 우화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유일한 목격자의 눈으로 사건의 추이를 쫓아가다가 뜻밖의 결말에 이르는 서스펜스 드라마에 가깝다. 비유하자면 문화와 정보에 빠삭한 게으름뱅이 천재 노인이 머리는 모자라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시골뜨기의 범죄를 추적하다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진리를 실감하고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 상사곡 / 암리타
갑작스럽게 세상의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는 예언이 발표되고, 주인공은 종말을 맞이하기 수 시간 전의 고요함을 만끽하며 어떤 남자와 보냈던 과거의 시간들을 돌아본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 때문에 맛본 좌절, 갑자기 찾아온 사랑, 그 사랑이 점차 일상으로 변질되면서 느끼는 권태, 그리고 왠지 허전한 작별…. 말하자면 이 이야기에서 ‘종말’은 주인공이 마음을 정리하게 되는 계기이자 배경에 불과하고 그 원인이나 과정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과 의식의 흐름 쪽이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다. 종말이라는 암담한 상황을 너무나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라든가, 종말이 왔을지도 모르고 안왔을지도 모르는 열린 결말 등은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 「이 세상의 마지막 밤The Last Night of the World」을 연상케 한다. 줄거리를 갖춘 소설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로 읽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 여우비 / 진아
태어난 이래 계속 갇혀 있었던 폐쇄공간에서 뛰쳐나와 넓은 바깥 세상에 적응하려 하지만 계속 실패하는 주인공의 고난을 환상적으로 묘사하는 단편. 전체적으로 심플하고 아름다운 동화풍의 분위기지만,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지, 진정한 우정은 어떤 것인지 등등 제법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어서 달콤씁쓸한 삶의 아픔이 묻어난다. 다른 이의 시나리오를 차용한 작품이기 때문에 저자의 평소 스타일과는 약간 다르게 느껴지지만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소외된 이들의 ‘고독’과 ‘엇갈리는 마음’을 어루만지는 데 주력하고 있다.

■ 이월, 장미원 / crazyjam
일제시대 시골 여학원을 배경으로 친구간의 미묘한 삼각관계와 그로 인한 비극, 그리고 그것을 수습하는 자매간의 정을 잔잔하게 그려낸 청춘소설. 쓸데없이 복잡해질 뻔한 이야기를 최대한 억제하고 깔끔하게 정리한 구조가 돋보인다. ‘유령’이라는 비일상적인 존재를 매개로 하면서도 환상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현실에 충실한 전개를 보여주다가 클라이막스에서 ‘거울’이라는 소도구를 이용, 숨어있던 환상성을 한꺼번에 폭발시켜서 갈등을 해결로 이끈다는 점이 절묘하다.

■ 승진과학 혁명 / 김몽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주제를 고금의 유명한 과학이론에 빗대어 승화시킨 허무개그. 뉴턴-아인슈타인-하이젠베르크-슈워츠에 이르는 계보를 망라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직관적인 유사성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이론을 잘 몰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뼈저리게 느낄 법한 ‘진부하지만 귀중한 교훈’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결말이 쓴웃음을 짓게 한다.

■ 만화요경 / 김창규
발표 당시 원제는 「kaleidoscope(만화경)」. 고전적인 외계생물 침략 SF의 계보를 잇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단언하기 힘든 요소가 많이 섞여 있다. 이 계열의 모범 중 하나인 잭 피니의 『도둑맞은 거리The Body Snatchers』를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으나 등장하는 크리처의 설정이 훨씬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 (지구인과 처음 접촉했을 때의 모습은 우주공간을 이동하기 위한 임시방편이고 모성(母星)에서의 본래 모습은 따로 있다든가, 흡수한 지구인의 모습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신체기능과 기억만 활용하고 겉모습은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든가, 일단 인간사회에 섞여든 뒤에는 본인의 희망에 의해 변신 시스템이 완전히 소멸하고 100% 인간이 될 수 있다든가 등등.) 또한 이야기의 중심은 침략자와 인간의 생존을 건 대결보다는 종(種)을 넘어선 ‘고독’한 존재들끼리의 교감과 서로를 측은하게 여기는 복잡 미묘한 심리에 놓여 있다. 주인공 ‘민’을 비롯한 작가의 단골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무심한 듯 시크한 연기도 주목 포인트. 캐릭터의 이름뿐만 아니라 테마 면에서도 작가의 이전 단편들을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는데, 미지의 생물체와 마주친 인간의 존재론적 위기라는 점에서는 「마지막으로」, 종이 다른 두 남녀의 불가사의한 이끌림이라는 점에서는 「그늘 속에서」와 같이 읽어도 재미있을 것이다. (둘 다 단편집 『사이버펑크』(도서출판 명경, 1994)에 수록. 현재는 절판이니 도서관을 열심히 뒤져보도록 하자!)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sandmeer
외딴 섬마을이라는 배경은 자연적으로 조성된 폐쇄공간을 무대로 인간의 감춰진 일면을 탐색하는 데 알맞다. 거기에다가 ‘누군가의 희생을 대가로 유지되는 생활’이라는 비인간적인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면 더욱 더 흥미진진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런 배경을 깔아놓고 외부인의 유입으로 인한 균열의 조짐을 보여준 뒤 주민들이 기를 쓰고 지키려 하는 비밀이 노출되는 과정을 끈질기게 파고든다. 결국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핵심이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인어)로 밝혀짐으로써 독자에게 충격을 주며, 환상과 현실을 막론하고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의 무책임함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남녀 주인공의 신비스런 조우(遭遇)는 전형적인 이생물 컨택트의 관습을 따르고 있지만,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한여름의 꿈 같은 풋사랑을 묘사함으로써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여운을 느끼게 한다. 섬에 전해 내려오는 두 가지 다른 버전의 전설 뒤에 감춰진 진실의 두 가지 측면을 제시함으로써 세상 일은 항상 칼로 무 베듯 딱딱 나누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교훈을 주기도 한다. 전반적인 분위기로는 ‘무영화’라는 제목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지만, ‘공동체의 쇠락’이라는 테마를 결정짓는 마지막 문장과의 연결을 생각하면 현재 제목도 나쁘지 않다.

■ 무대륙의 전설 / 세이지
‘제목이 너무 뻔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당신을 위해 한마디 해 두자면, 저 ‘무대륙’은 오컬트나 고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 ‘무대륙’이 절대 아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인에게 친근한 모 작물과 요리를 장대한 전쟁 서사시로 풍자한 본격 해학소설이다. 전개도 매우 빠른 편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유쾌하게 읽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국가간 경쟁, 군비 증강, 종족분화 등 복잡한 문제도 내포하고 있다. 결말의 ‘또 다른 저주’라는 부분이 신경쓰이긴 하지만 본편에서는 따로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에 작가가 속편이라도 내놓기 전에는 독자 나름대로 상상해볼 수밖에 없을 듯.

■ 성채 / raile
주인공은 어릴 때부터 죄인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소년. 부모의 죄를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동조하지도 반발하지도 못한 채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몸부림치지만 겉으로는 절대 그 점을 내색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의 마음은 ‘도무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 수 없는’ 혼탁한 세계에 대한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하다. 마음을 파고드는 게으름과 권태를 달래기 위해 광기에 탐닉하고, 뛰어난 실적을 세우면서도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지는 존재인 것이다. 유일한 취미인 지식과 서적에 대한 집착은 그를 구원하기는커녕 고독만 더해주고, 소년은 결국 책으로 쌓은 성채 속에 틀어박혀 자기위안을 거듭할 뿐이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내면으로는 서서히 허물어져가는 인간성을 세밀한 필치로 추적한 걸작.

■ 세 가지 소원을 이루는 법 / pilza2
각종 전설이나 민담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소원을 들어주는 악마’ 클리셰를 철저분석한 작품으로, 관련 고전문학과 만화까지 적재적소에 인용하면서 클리셰의 부조리함을 지적하는 부분이 일품이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철저한 약관으로 무장하고 어떻게든 계약자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악마와, 그에 맞서서 완벽한 논리로 제약조건을 돌파하여 소원을 이루되 영혼은 지키려는 계약자의 심리게임을 보여주는 서스펜스 스토리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해 보여도 사실은 각종 함정과 제약으로 가득하여 실제로는 큰 도움이 안 되는 현대의 보험계약 등을 풍자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주인공을 도와준 세력의 정체를 암시하는 결말이 미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 암시가 사실이라면, 주인공은 성격상 직접 전면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가만히 있다가 악마에게 지기는 싫은 ‘누군가’의 계략에 빠져 대리전을 치러준 셈이 되어버리니….)

■ 피부가 보라색 / 아이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피부색을 갖고 있으며 햇빛에 닿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어중간한 특성을 지닌 주인공이 집 안에 갇힌 채 스스로를 구경거리로 내세워 식량을 얻으며 목숨을 이어간다. 그는 무감각한 상태에서 타인의 고민거리를 대신 들어주며 서서히 자기 자신의 감정에도 눈떠가지만, 결국 넘어설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 나머지 고독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한 결말을 맞이한다. 생각해 보면 보라색은 ‘죽음’과 ‘우울’을 상징하는 색채 이미지이기도 하니 어느 정도는 예정된 결말인 셈이다. 주인공의 순진무구한 듯한 1인칭 서술 뒤에 언뜻언뜻 비치는 광기가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뚜렷한 모습을 갖춰가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 취업경위서 / 미로냥
‘기억’을 매개로 한 마법 거래를 소재로 자신과 육친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이기적이 될 수 있는 인간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이야기. 처음에는 단순한 방관자인줄로만 알았던 주인공이 점점 사건의 핵심에 접근하면서 스스로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육친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일그러진 계약, 그 계약을 마지못해 수행한 자의 희생자에 대한 애정과 죄책감, 그리고 용서와 새출발을 깔끔하게 보여주는 작품. 일상 속에 교묘하게 스며든 마법이라는 소재는 같은 작가의 ‘현대마법사’ 연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스토리나 세계관이 연결되어 있는지는 불명.

■ 소년과 소녀가 언덕에서 요정을 만난 이야기 / 아힌사
주인공은 시골생활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반항아 도시소년. 언제나 모범생인 누나와 주변 어른들, 그리고 귀중한 방학을 따분한 시골에서 보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반발심과 오기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고, 요정과 마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랜 싸움에 말려들어 호된 꼴을 당한다. 그런 동생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 주인공은 서서히 마음을 바꾸게 되는데… 아일랜드 민화를 소재로 한 요정의사 연작에 속하는 작품으로, 「스위티 숍」, 「윌리엄 준 씨의 보고서」에 이은 3번째 이야기지만 시간상으로는 2번째 이야기의 프리퀄에 해당한다. 제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우면서도 묘한 부분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하는 주인공의 동심이나, 투덜이 동생을 걱정하는 순진한 누나의 마음 씀씀이가 웃음을 자아낸다. 초자연적인 존재인 검은 마녀, 빨간 모자, 그리고 요정의사는 스토리상 나름대로 큰 역할을 하면서도 그 내력이나 배경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수께끼에 싸여 있어서 언젠가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도 따로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 이주 사업 횡단 사령부 최후미 민간 선박 DU1888-0 / 정대영
먼 미래, 태양의 급변으로 인해 지구의 환경파괴가 가속화되고, 참다 못한 인류는 전대미문의 대탈출을 감행한다. 그들의 행선지는 오래 전에 지구를 떠나 독자적인 생활권을 구축한 화성. 워낙 오래 떨어져 살다 보니 문화도 사고방식도 완전히 달라져 버린 화성 정부는 지구지상주의자들과 대립하기도 하지만 결국 어렵게 화해를 이끌어내고 탈출자들의 수용에 동의한다. 평범한 화물선 승무원인 주인공은 군의 긴급동원 요청을 받고 지구에 접근하여 종말 직전에 추가로 탈출할 사람이 없는지 살피는 일을 맡는다. 한 행성의 괴멸이라는 장엄한 비극과 사라져가는 종의 최후를 도리 없이 지켜봐야만 하는 주인공의 상실감이 좋은 대조를 이루는 하드SF 계통의 작품. 요즘 소설답게 데이터와 네트웍을 비중 있는 소도구로 활용하여 인물간의 소통을 돕는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작품 제목이 너무 길어서 기억하기 힘들다는 점 정도?

■ 소나기 / askalai
황순원의 고전 동명소설을 각색한 일종의 패러디 단편. 초반에는 원작과 별 차이가 없으나 뒤로 갈수록 다른 전개를 보여주어, 풋풋한 사춘기 전원 로맨스에서 섬뜩한 크리처 호러물로 변모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스토리에는 변화를 가하면서도 애틋함과 안타까움이라는 원작의 정서는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절묘하다.

■ 가족의 집 / 권정은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행복한 가족’이라는 허상을 쫓다가 현실의 가족을 상실하고 절망에 빠지는 남자의 이야기.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속도감 있는 전개와 무시무시한 장면묘사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가장의 과오로 인한 가족 붕괴라는 소재를 호러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 특징인데, 단순하지만 뒤통수를 치는 느낌의 반전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마지막에 존재를 드러낸 ‘그것’의 정체나 주인공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주인공이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는 구조라는 점이 독특하다.

■ 몽타주 / 아밀
정체 모를 작가의 제목 없는 소설들이 차례로 발표되어 인기를 끄는 기묘한 시대. 말더듬이인 화자는 기억을 되짚어가며 자기 자신을 찾는 순례에 나선다. 계속 변해가는 차창 밖 풍경과 함께 혼란스럽게 뒤섞인 과거의 단편들이 몽타주처럼 흘러간다. 화자가 찾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정체불명의 작가. 화자는 어째서인지 굴곡진 과거를 겪다가 어느 새 진정한 자기와도 유리되어 일종의 분열 상태에 접어든 기미를 보인다. ‘작가’의 정체는 온전한 화자 자신인가? 혹은 잃어버린 또 다른 자아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회상 속에 등장한 다른 누구인가? 외부적으로는 어떤 비일상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지만 화자의 마음 속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쉴 새 없이 교차하며 복잡한 만화경을 만들어간다. 환상성과는 무관한 심리소설에 가깝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채택한 소설로 해석할 수도 있을 듯.

■ 지진기 / 곽재식
삼국시대 고구려를 배경으로 지진이라는 거대한 자연재해 이후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군상극을 묘사하는 중편.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존재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그 외 여러 인물들의 행동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사건을 서서히 빚어나가는 구도로 되어 있다. 주인공은 나름대로 출세욕도 있고 제딴에는 권모술수도 부리는 표리부동한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 구석에 측은지심을 감추고 있으며 제 꾀에 제가 넘어가기도 하는 인간적인 캐릭터다. 충실한 자료 조사를 통해 삼국시대의 생활상과 민중의 심리를 철저하게 고증한 역작으로, 진짜 고서에서 번역한 것처럼 짐짓 능청스런 문어체를 채택하고 있어 진지한 장면에서도 폭소가 터지는 묘한 매력이 있다. (길에서 만난 도적떼나 주인공을 습격한 깡패들까지도 무지 공손한 존대말로 부드럽게 의사표시를 하고 있어서 상황은 심각한데 감각적으로는 개그가 되어버린다.)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당시의 역사 기록이나 기담을 재해석하는 연작 중 한 편이기도 하지만, 서로 내용상의 연관은 없기 때문에 독립된 스토리로써 즐길 수 있다.

■ 마지막 선물 / 전건우
사랑하는 사람을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고 현실에서 유리되어가는 인물들을 통해 상실의 괴로움과 극복의 어려움을 그리는 이야기. 슬픔은 절망으로, 절망은 암흑으로 바뀌어 살아있는 자 스스로를 소진하기도 하지만, 떠나간 자의 영혼은 마지막 손길을 뻗어 살아있는 자를 그 암흑으로부터 구원한다. 호러스러운 분위기가 섬뜩하게 느껴지는 중반부를 거친 뒤 분위기는 일전(一轉), 눈물과 감동의 라스트로 이어진다. 제목의 의미도 그 결말부에 가서야 서서히 드러난다는 점이 절묘하다. ‘가족’과 ‘죽음’을 주된 소재로 다루면서도 앞에서 언급한 「가족의 집」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 내 친구 좀비 / 보라
부모의 병적인 소유욕과 교육열에 휘둘리는 자녀의 무기력함과 분열적 퇴행을 다룬 이야기.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에 좀비 호러의 테이스트를 가미하여 색다른 시각으로 조망한 일종의 풍자극이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보통’이라 인정되는 상태를 유지하는 자, 자기 나름의 길을 찾고는 있으나 앞길이 막막하여 잠시 관망하는 자, 그리고 육친의 의지에 매여 소리없는 자멸의 길을 걷는 자를 차례로 등장시켜 소리없는 질문을 던진다. 변화와 소통을 철저히 거부하는 의문의 목소리에 직면하여 ‘왠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털어놓는 화자의 답답한 심정은 비슷한 현실에 직면한 우리 모두의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워낙 다양한 장르와 경향의 작품들이 한데 모여 있어서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외된 개인의 ‘떨쳐버릴 수 없는 고독’과 ‘혼란스러운 마음’을 중심으로 하는 작품이 눈에 띄게 많다는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분석이지만, 총 22작품 중 아이디어나 플롯 중심의 작품을 제외한 15작품에서 그런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테마는 비슷해도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론은 SF에서 호러, 잔혹동화, 심리소설에 이르기까지 꽤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는 만큼, 각각의 작품은 완전히 별개의 계열로 다루어 마땅할 것이다. 어쨌든 간에 이렇게나 개인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많다는 것은 역시나 환상소설이 외면적으로는 신기한 현상이나 초자연적인 사건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여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소재들을 통해 인간 마음 속의 깊숙한 곳(비유하자면 ‘낮에는 볼 수 없는 밤의 풍경’)을 드러내는 데 알맞은 그릇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물론 일반 문학에서도 그러한 기능은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환상소설은 그 특성상 보다 직접적이고 극단적으로 심리의 추이를 보여줄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다. 각 해마다 이러한 트렌드를 짚어가면서 중단편선을 살펴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이다. 인간의 심리라는 것은 서로 비슷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천차만별이고, 그것을 묘사하는 수법 또한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2011년에는 또 어떤 작품들이 선정되어 영광의 기록으로 남을 것인가, 약간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벌써부터 기대되는 바이다.

※본 리뷰는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by 잠본이 | 2010/11/27 01:03 | 대영도서관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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