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릭터 중에
'미피(Miffy, 원어명은 Nijntje)'라는 꼬마 암토끼가 있다. 커다란 귀와 x자형 입에 헐렁한 아동복이 눈길을 끄는 캐릭터다. 미피는 네덜란드의 그림동화 작가 딕 브루나(Dick Bruna, 현재 83세)에 의해 창작되어 1955년에 첫선을 보인 이래 30여권의 동화책에 출연했고, 아동복을 비롯한 각종 캐릭터 상품에 이식되어 꾸준한 인기를 누려 왔다. 미피 시리즈는 40개 국어로 번역되어 누계 8천 5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으며 TV 애니메이션으로도 방영되었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어 왔던 이 토끼가 최근 껄끄러운 법정 투쟁에 말려들어 새삼스레 주목을 받고 있다. 2010년 10월에 브루나 씨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회사인 메르시스(Mercis BV)가 일본의
산리오 사를 상대로
암스테르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문제가 된 것은 산리오가 1976년에
헬로키티의 친구로 데뷔시킨 토끼 캐릭터 '캐시[キャシー]'. 원고 측은 캐시가 미피를 표절한 것이라 주장하며 관련상품의 판매금지 가처분을 신청하고, 산리오가 가처분에 불응할 경우
1일당 5만 유로의 범칙금을 내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피고인 산리오 측도 심리에 참가하여 전면적인 투쟁 의사를 밝혔다.
2010년 11월 2일, 암스테르담 법원은 머리와 몸의 비율, 얼굴 생김새, 팔다리의 위치 등 많은 특징으로 미루어 보아 '캐시는 미피와 거의 똑같다'고 판단하고, 산리오 측에 캐시 관련상품의 생산 및 판매, 선전을 즉시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본 결정에 따르면, 산리오는 10일 이내에 법원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범칙금으로써 1일당 2만5천 유로, 최고 한도액 2백만 유로까지 지급해야만 하기 때문에, 향후
본격적인 저작권 소송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이 명령의 효력은 베네룩스 3국(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내에서만 유효하며 산리오가 판매망을 갖고 있는 다른 국가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원고 측은
캐시의 상품 판매를 아예 전세계적으로 중지해 주었으면 하는 입장이지만, 아직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2010년 11월 5일, 산리오는 "두 캐릭터는 전혀 유사성이 없다"면서, "가처분 명령에 불복하는 입장이며, 원고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다는 점을 재판을 통해 주장할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다. 산리오의
츠지 신타로[辻信太郎] 사장은 같은 날 도쿄도내에서 열린 결산설명회에 참석하여, "1976년에 만든 캐릭터를 가지고 왜 이제 와서 소송을 거는 것인가. 적당히 해 두지 않으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현재 산리오 공식 홈페이지는
캐시에 관련된 자료가 삭제된 상태이며 산리오 홍보부서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코멘트를 피하고 있다. 산리오는 현시점에서 본 사건이 자사(自社)의
영업실적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코멘트도 남겼다.
키티를 비롯한 산리오 캐릭터들은 심플한 디자인, 굵은 윤곽선, 신비스러운 무표정 등으로 인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어 왔으나, 동시에 그 디자인 스타일 자체가 딕 브루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브루나 본인도
산리오에 대해서는 불쾌감을 표시해 왔으며, 그 회사의 행동으로 인해 자기의 지적재산권이 침해되어 막대한 재산상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브루나 씨는 당연히 법원의 이번 판결을 환영하고 있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캐시와 미피를 완전히 별개의 디자인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앞으로도 한동안 논란거리가 될 듯하다.
참고로 산리오는 캐시 이전에도
'리틀 허니'라는 토끼 캐릭터의 라이선스 상품을 전개한 바 있는데, 이 캐릭터는 입이 x자로 되어 있고 머리도 훨씬 큰 유아체형이라 캐시보다도 훨씬 더 미피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다만 산리오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리틀 허니'
관련상품의 생산을 중단했으며 더 이상 라인업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어, 일종의 흑역사로 묻혀버린 상태다.
2010년 10월 15일에 홍콩의 소비재수출기업 리풍[利豊]이 자사 지배주주들이 소유한 투자회사를 매개로 하여
산리오의 주식 1.03%를 취득한 사실이 월스트리트 저널 일본판에 의해 보도되었는데, 지지통신[時事通信]은 산리오가 이 자본제휴를 통해 유럽, 미국 시장에 대한 판로를 확대할 것이라고 전한 바 있다. 또한 최근 몇 년 사이에 산리오가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지역에서 캐시의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사실도 브루나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다. 34년 동안 별 문제 없이 지내왔던 유사 캐릭터가 지금 와서야 분쟁의 씨앗으로 떠오른 것은, 산리오의 해외진출 확대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사실 미피도 원조는 따로 있으며, 브루나도 산리오와 별다를 것 없는 모방꾼이라는 주장이 있다. 1945년에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 출신의 그래픽 아티스트 Ray Goossens가 창작한 고양이 캐릭터
'무스티(Musti)'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미니멀리즘에 충실한 디자인과 x자형 입은 미피의 선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며, 빨간 옷을 입은 고양이라는 점에서는
헬로키티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이야 어떻든 간에, 창작물의 오리지널리티라는 것이 생각 외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Article (C) ZAMBONY 2010.11.8~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