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욕실 타일이나 방바닥 장판의 별 의미없고 난잡한 무늬들을 무심코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 그 무늬들 중 일부분이 뭔가 의미를 가진 형체로 보이게 되는 경험을 종종 하곤 했다. 빛의 장난과 상상력의 비약이 손잡고 만들어낸 착각이겠지만, 어떤 때는 꽤 그럴듯한 이야기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무늬도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요즘에는 그런 일이 별로 없었는데 오늘 갑자기 욕실 바닥에서 뜻하지 않은 발견을 했다. 현재의 집에 이사와서 5년이 넘도록 별 생각 없이 들여다보던 무늬 중 어느 한 부분이 제법 고즈넉하면서도 판타지스러운 광경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 무늬 속에서는 마치 다람쥐같은 머리통을 지닌 거구의 수도승이 망토를 걸친 채 숲 속에 웅크리고 앉아 솥뚜껑만한 두 손바닥을 펼쳐들고 그 위에 놓인 무언가를 차분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타일의 색깔이 옅은 와인 빛깔이다 보니 그 광경은 오래된 구리판 위에 새겨진 판화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가 저물어갈 무렵에 촬영된 낡은 영화 필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이 무늬 속의 이야기를 더 이상 깊게 파고들 일은 아마 없겠지만, 아직도 내 속에 이런 상상력 혹은 착각력(?)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게 약간은 놀랍기도 하고 재미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