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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경찰 패트레이버는 이렇게 탄생했다!

- 패트레이버, 현재와 과거 -

대작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숱한 좌절과 패배의 역사를 거쳐 비로소 일구어내는 것이다.
‘커다란 도움닫기[助走]’가 현재를 떠받쳐,
미래를 향한 비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뭔소리여 대체…)



-출전: 소년선데이 그래픽 스페셜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1989, 쇼가쿠간) pp.45-50
-해석: 잠본이(2010.8.17)

※이 글은 1988년 말의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므로 현재와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사오니 그점을 감안하며 읽어 주십시오.


수년 전까지는 TV, 그리고 현재는 비디오 소프트를 주요 매체로 하여 대량생산되어 온 로봇 애니메이션. 수많은 명작을 낳아 온, 애니메이션 업계의 달러박스라고 불려 온 이 장르도 예전과 같은 활기를 잃고, 쇠퇴일로를 걸어갈 따름- 그런 척박한 상황 속에서, 1988년 5월, 마치 혜성처럼 한 편의 걸작 로봇 애니메이션이 등장했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라는 타이틀로 비디오 발매된 그 작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비디오 업계의 매출 및 대여 기록을 갈아치우고, 급기야는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비디오(OVA) 업계 최초의 ‘극장 영화화 결정’이라는 쾌거를 거둔 것이었다. 이제부터 밝히는 이야기는, 십 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히트작 『기동경찰 패트레이버』가 어떤 경위로 탄생하게 되었는가, 그 프로세스를 밝히는 다큐먼트인 것이다!!

-라는 식으로 무지 거창하게 써놓긴 했다만, 정말로 로봇 애니메이션이 성공을 거두는 일은 굉장히 드문 사건이다. 아무래도 장난감을 팔려다보니 기획이 다들 비슷비슷해지는 데다가, 가정용 게임기의 보급 때문에 장난감 자체가 예전만큼 팔리지 않게 되었다는 ‘통한의 일격’을 애니메이션 업계가 두들겨맞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 패트레이버의 기획은 그야말로 이색(異色)적이라 할 만하다. 왜냐 하면, 등장인물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을 듯한 약간 흐리멍덩한 패거리들뿐이고, 로봇은 변형도 합체도 하지 않는데다가 흑과 백이라는 장난감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을 듯한 투톤 컬러. 사람도 안 죽고, 시원스러운 파괴장면도 없고 - 말하자면, 여러 가지 상식적인 패턴을 확 뒤집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기막히게 참신하고 재미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천재만이 달성할 수 있는 위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각설하고, 그 ‘천재’라 할 수 있는 유우키 마사미는, 지금이야 물론 슈퍼 메이저 잡지 「주간 소년 선데이」의 간판작가로서, 또한 성운상을 수상한 SF계의 거장으로서도 부동의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10년 전에는, 아직 보잘것없는 헐렁헐렁 샐러리맨(이었는지 어떤지는 사실 잘 모르겠음. 어쩌면 의외로 성실했었을지도…). 도쿄도 네리마구 세이부 이케부쿠로 선의 에코타역 앞(참고로 세이부선의 연선(沿線)은 도쿄 지역에서 비교적 집값이 싼 편이라,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굉장히 많다)의 모 찻집에 휴일마다 모여서는, 친구들과 애니메이션이나 SF나 만화의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극히 평범한 일개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이 ‘기획 놀이’. 즉, 가공의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의 설정이나 스토리를 자유롭게 짜내면서 노는 것이었다. 당시 이 놀이에 참가했던 멤버들 중에는, 현재 성우 겸 가수로 활동 중인 카와무라 마리아(무려 여고생이었다)라든가 프리랜서 디렉터로 유명한 토마토 아키 씨 등이 있었는데, 아직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것도 아니어서, 어딘가의 제작사에 기획을 제출한다거나 방송국에 프레젠테이션을 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디까지나 순수한 취미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때 최초로 생각했었던 것이 『셰헤라자드』라는 성간전쟁물. 우주선 양성학교의 생도들이 활약한다는 이야기로, 주인공은 놀랍게도 여성이었다. -라고 해도, 이제와서 놀랄 리는 없겠지. 하지만 그 당시에는 여자애가 SF물에서 주역을 맡는 일이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나름 선구적인 기획이란 말씀이야.

그렇다고는 해도, 이 『셰헤라자드』와 『패트레이버』의 공통점은 여성이 주역이라는 것뿐. 하지만 그 다음에 생각해낸 『전광석화 개러클레스』에서는 상당히 『패트레이버』의 작품세계에 가까운 모습 - 즉 유우키 마사미 특유의 분위기라고 할 만한 것이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애니메이션 업계는 『기동전사 건담』, 『전설거신 이데온』같은 장대한 대하드라마의 전성시대였다. 좋게 말하면 시리어스, 나쁘게 말하면 한결같이 어두침침한 이들 작품군은, 등장인물이 픽픽 죽어나가고, 가끔은 미쳐버리기도 하고, 행성 한 개는 물론, 재수없으면 우주 전체가 소멸해버리기도 하는 등, 진짜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이런 풍조를 앞에 두고, ‘천재’ 유우키 마사미와 그 동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이렇게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런 뜻에서, ‘캐릭터가 절대로 죽지 않는 로봇 애니메이션’이라는 컨셉 하에, 『개러클레스』가 기획된 것이다.

그럼 이 『개러클레스』의 내용을 살펴보자. 시대는 미래. 장소는 우주의 어느 태양계. 인간이 거주 가능한 행성이 어째서인지 가득 있는 이 성계(星界)에서 각지를 돌아다니며 힘든 일을 의뢰받아 해결하는 ‘라임 액티브 서비스’라는 영세기업이 있다. 이 회사의 사장 - 사실은 원래 사장이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임시변통으로 경영을 떠맡은 종업원 - ‘알디 라임’이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또 다시 여자애가 주인공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얘기. 그밖의 캐릭터로는, 알디의 보좌역인 ‘반’, 매니저 역의 ‘카시오’, 정비공 ‘데릭’, 그리고 소녀 ‘엘피나’ - 그들이, 작업메카 ‘개러클레스’에 올라타고 온 성계를 누빈다는, TV시리즈로 한다면 얼마든지 에피소드를 만들어낼 법한, 경쾌발랄 코미디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어딜 뜯어봐도 한번 놀아보자고 만든 기획답게 캐릭터의 이름 짓기도 꽤 개성적이다. 이미 앞에서 소개한 이름들을 늘어놓아 보자. 알디(A), 반(B), 카시오(C), 데릭(D), 엘피나(E)…, 머릿글자가 알파벳 순으로 되어있구만. 요런 식으로, 이를테면 주역메카 개러클레스(G)는 공중메카 하이개리(H), 동력유닛 인터개리(I), 지상메카 잭개리(J)의 3대가 합체하여 완성되는 로봇이라는 설정도 만들어졌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잘나봐야 결국 토목로봇인데 그걸 일부러 합체메카로 만들다니, 너무나도 그 시대답구만.) 그렇게 해서, 매니악하면서도 제법 치밀한 기획서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매니악함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꼴이 되고 말았다. 어느 날, 유우키 마사미는 애니메이션 잡지의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건담』, 『이데온』을 통해 대하드라마 노선을 구축해 온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신작 『전투메카 자붕글』에 2호메카 ‘워커 개리어’가 등장! 한다는 내용이었다. ‘개리어’와 ‘개리’. 우연이라고는 해도, 너무나도 비슷한 작명을 보고 동료들은 모두 맥이 풀렸다. 엄청 공들여 지은 이름이다보니 이제와서 다른 이름으로 바꾸기도 싫었기에, 결국 이 기획은 어이없게 흑역사로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수개월 동안은 쇼크가 너무 길게 이어지는 바람에 기획놀이 자체가 절멸해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부활시킨 것이 유우키 마사미의 신기획 『바이돌』이었다. 그리고, 이 기획에서 처음으로 로봇에 ‘레이버’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이 『바이돌』이라는 기획은 『패트레이버』와 제법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좀더 상세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무대는 어느 우주의 식민지. 이 세계에서는 행성개발 및 토목공사용으로 ‘레이버 머신’이라는 인간형 로봇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런 편리하기 짝이 없는 기계가 보급되면 당연히 나쁜 일에 이용하려는 무리들도 나타나기 마련. 그렇게 해서, 그런 놈들을 제압하는 경찰측에서도 레이버 머신을 도입하여 대항하게 된다. ……이거, 무대만 도쿄가 아니라 식민행성일 뿐이지 완전 패트레이버의 세계관과 똑같잖아? 라고 생각하는 당신, 아직 그 정도로 놀라기는 이르다. 이 기획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도록 하자.

주인공은 이번에도 귀여운 여자아이. (정말로 뿌리깊은 집념이로세.) ‘알디 라임’이라는 경찰학교를 갓 졸업한 여자경관이다. 이 주인공이 배속된 부서가, 통칭 ‘POPS’라고 불리는 이동경찰서의 110분서. 이 POPS는 명백히 정해진 관할구역을 갖고 있지 않아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가야 하는데다가, 인원부족에 시달리는 완전 막노동 부서다. 레이버 머신만은 신예기 ‘바이돌’이 배치되어 있지만, 맡겨진 임무라고는 교통정리같은 잡무가 대부분.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현대 일본 경찰의 출장 미니 패트롤카 부대같은 일을 조금씩 하고 있다는 소리다. (참고로 이 기획의 캐치프레이즈는 “우주는 정체상태![宇宙は澁滯だ!]”였다고 한다.)

그ㆍ런ㆍ데! 어째서인지 갑자기 110분서에 대한 출동명령이 늘어나는 바람에, 밀려드는 업무에 비명을 지르는 알디 일행! 어쨌거나 레이버 머신을 이용한 범죄가 행성 전체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말도 안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에는 이유가 있다. 거대기업 겸 범죄조직인 ‘팔코네 샤프트’, 줄여서 ‘샤프트’가 암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샤프트’라고 하면 역시 코믹스판 『패트레이버』에서 정체불명의 인물 우츠미 기획과장이 같은 이름의 기업을 등에 업고 너무나도 현대적인 악역을 연기하고 있지만, 『바이돌』에서는 아직까지 옛날 TV애니에 등장하는 ‘악의 비밀결사’ 스타일을 답습하고 있다.

‘공동체’를 의미하는 독일어에서 따온 ‘샤프트’의 총수는 ‘샤를 미카엘 폰 리 팔코네’(대체 어느나라 이름이야). 이 남자는 당시 애니에서 자주 나오는, 병적으로 프라이드가 강한 중년 아저씨다. 그의 심복으로 파괴활동 등을 직접 담당하는 것이 ‘캡틴’이란 호칭으로 불리는 ‘시리얼 드 시비어’(랄라라라…). 시리어스할뿐만 아니라 시비어하기도 한 성격의 이 남자, 무모한 명령만 일삼는 상사와 골때리는 부하 사이에 끼어서 쉴 틈도 없이 고생만 하는, 불쌍한 중간관리직인 것이다. 그 골때리는 부하의 이름은 ‘닉 재거’(이 이름은 너무나도 걸작이다보니 결국 나중에 토마토 아키 씨 원작의 모 작품에서 악역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던가 뭐라던가). 말하자면 이친구가 바이돌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라이벌 캐릭터다.

일단 여기까지가 샤프트 관련의 캐릭터. 하지만 기획서에서는 여기에다가 한 번 더 양념을 쳐서,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프리랜서 악역을 등장시키고 있다. 그 이름은 ‘헤르메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도둑의 수호신 이름을 훔쳐와서, 자기 입으로 넉살좋게 자기소개를 하는 괴도인데, 기막힌 절도 솜씨와 누구보다도 빨리 도망치는 재주로 세상을 뒤흔들어 놓는, 말하자면 ‘루팡 3세’같은 녀석이다. 이녀석이 나타나는 장소마다 어째서인지 다른 임무로 POPS 110분서도 출장을 나오게 되어, 우연과 우연이 겹치는 가운데 알디 일행과 헤르메스는 점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 거참, 스토리 전개상 무지하게 편리한 캐릭터네, 이거.

어이쿠, 여기까지 써 놓고 보니 진짜 중요한 캐릭터를 빼먹을 뻔 했다. 바이돌은 2인승이라는 설정. 따라서 주인공에게는 콤비를 이루는 동승자가 있다는 얘기다. 『패트레이버』에서는 여기에 해당하는 지휘차 담당자로 시노하라 아스마라는 남자가 나오지만, 『바이돌』에서는 ‘에피루나 미크로’라는 깜찍한 여자아이다. 이미 이때 그려진 러프 스케치에서는 『패트레이버』와 같이 넥타이와 넓은 옷깃의 수트로 구성된, 말쑥한 제복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제복의 뿌리는, 바로 초기 울트라 시리즈. 『울트라맨』의 과학특수대나 『울트라세븐』의 울트라 경비대 제복을 모델로 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바이돌』 기획 당시 로봇애니에 나오는 제복은 도라에몽처럼 적, 황, 청의 극채색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군. 말하자면 이것 역시 시대를 훨씬 앞서간 아이디어였다는 말씀.

이 『바이돌』은 기획노트와 스케치 이외에는 전혀 작품화(만화나 소설, 물론 애니메이션도)되어있지 않지만, TV시리즈로 만들었을 경우의 각화 서브타이틀은 어째서인지 26화분을 확실하게 준비해놓고 있다. 아무리 봐도 역시 친구들 사이에서 낄낄거리며 만들었구나 싶은 느낌이 들어서 묘하게 웃음이 나오지만, 이 제목들 하나하나가 제법 걸작이라서 작품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해 준다. 어떤 제목들이 있는지 한번 들여다보자.

『바이돌』 전26화(2시즌) 서브타이틀
제1화 오늘도 원기백배 최강콤비
제2화 전설의 헤르메스
제3화 전광석화 팔코네
제4화 도자에몽 씨의 유산
제5화 돌격! 바이돌 단 1기
제6화 POPS110 폭파계획
제7화 순회시찰은 무시무시해
제8화 도둑맞은 것은 군용기
제9화 완전중계, 섬머 산장 사건
제10화 서장의 몸값은 얼마?
제11화 맥아리가 없어요 캡틴 시리어스
제12화 에피루나양 조심해
제13화 전율! 여자경관 연수회 (전편)
제14화 전율! 여자경관 연수회 (후편)
제15화 할머니로부터의 도전장
제16화 집념의 히노모토
제17화 닉 재거, 눈물의 패배
제18화 아뿔사! 알디가 사로잡혔다
제19화 길잃은 시한기뢰
제20화 시리어스, 위대한 사랑
제21화 부활의 할머니
제22화 데릭ㆍ카시오의 오해 대행진
제23화 캡틴 시리어스 마침내 떠나가다
제24화 헤르메스의 정체를 보았다!
제25화 팔코네 최후의 도전
제26화 오늘도 평화로다 은하가 비좁네

이렇게 해서 대강 한번 쭉 훑어보았는데, 뭐랄까, 벌써 이때부터 『패트레이버』(*구 OVA) 제2화나 제4화의 원형 비슷한 것이 눈에 띄는구만. 본래 『패트레이버』도 TV시리즈 1년분의 구성을 상정(想定)한 뒤 그 가운데에서 재미있을법한 이야기를 발췌하여 6화분으로 종합했다고 한다(예를 들면 제2화 「롱 샷」은 TV의 7~8화, 제3화 「4억5천만 년의 덫」은 제20화 가까이에 해당). 이렇게 비디오 애니메이션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구성을 띠게 된 것도, 이때의 ‘커다란 도움닫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

어쨌거나, 여기까지 와서, ‘환상의’ TV 애니메이션 기획에 드디어 강력한 협력자가 나타났다. 그 이름은 이즈부치 유타카!

유우키 마사미와 이즈부치 유타카의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5년전. 장소는, 현재는 없어진 애니메이션 전문지 「아니멕」의 편집부였다. 당시 애니메이션 패러디 전문작가로부터 메이저 만화가로의 도약을 꾀하고 있었던 신진기예의 작가 유우키와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 특촬 프로그램의 메카 디자이너에서 작품 자체의 구성에까지 발언권을 얻고자 했던 이즈부치는, 서로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던 건지, 첫 대면에서부터 의기투합. 유우키는 곧바로 이즈부치에게 문제의 기획 노트를 보여준다.

이 시점의 스토리 구성은 『바이돌』에 약간의 변경을 가한 것으로, 제2차 간토대지진 때문에 도쿄의 절반이 괴멸한 이후, 영화 『매드맥스』를 연상케 하는 세계를 무대로 이야기를 전개할 예정이었던 모양이다. 보자마자 이 기획에 반해버린 이즈부치는 ‘그냥 취미로 끝내는 건 아깝다’고 생각한 나머지 TV화 실현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즈부치가 첫 번째로 불러온 사람은 SF작가 히우라 코우였다. 사실 이즈부치는 이전부터 토요타 아리츠네 씨가 주재하는 창작인 집단 ‘패러렐 크리에이션’(줄여서 패러크리)의 멤버이기도 했다. 그리고 히우라 또한 패러크리에 자주 얼굴을 내밀곤 했기에 두 사람은 이전부터 구면이었다. 그렇게 해서, 유우키 마사미 원작, 히우라 코우 구성, 이즈부치 유타카 코디네이트라는, 지금 와서 보면 진짜 초호화 멤버에 의해 세워진 기획,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이제야 이 제목이 나오는군!)가 시동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패트레이버』도 제목은 같지만 지금의 작품과는 상당 부분이 다르다.

우선 무대는 미래의 도쿄. 이것은 변함없지만 특차2과나 레이버 부대 같은 제대로 된 조직이 없다. 놀랍게도, 난데없이 평범한 동네 경찰서에 레이버가 배치된다는 골때리는 설정을 깔고 시작하는 것이다. 경찰서 반대편에는 야쿠자 사무소가 있어서, 용이라든가 제석천이라든가 여러 가지 극채색의 무늬들, 즉 문신을 등짝에 새긴 조폭 레이버가 출입하고 있다- 라는 식의, 어찌보면 지금 것보다 훨씬 더 기상천외한 기획이었던 셈이다.

이때의 주인공은, 당연한 얘기지만 역시 여순경. 하야미 츠바사라는 이름의, 『궁극초인 아~루』의 오오토지마 상고나 『패트레이버』의 이즈미 노아로 이어지는 헤로인의 전형이라고도 할 만한 캐릭터다. 참고로 하야미 츠바사라는 이름은 유우키의 친구로 역시 만화가인 실존인물 ‘하야미 츠바사’ 씨에게서 따온 것. 덧붙여 말해두자면, 츠바사의 파트너로 나올 예정이었던 노르디카라는 여성은 OVA판 『패트레이버』에 등장하는 카누카 크란시의 원형이다. 그 밖에도 귀여운 여성 캐릭터가 대거 출연…할 예정이었던 모양이다. 굳이 말하자면 오히려 아저씨들 쪽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는 평을 듣고 있는 최종판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프로페셔널의 엄격한 평가기준도 통과할 만큼 대개조를 거친 본 기획은, 이즈부치의 손에 의해서 다수의 로봇 애니메이션을 배출한 모 유명 스튜디오에 제출되었다. 게다가 한 개만 들이밀어서는 떨어질게 뻔하니 예방책을 세우자는 뜻에서 허수아비 기획을 하나 더 덧붙이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무명의 크리에이터에게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아서, 결국 NG를 먹고 쓸쓸히 돌아서야만 했던 것이다.

“3년만 더 일찍 유우키 마사미가 메이저 작가가 되었더라면…”, 이즈부치는 그때의 낙담으로 가득한 심경을 돌아보며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참고로, 이때 가져갔던 또 하나의 허수아비 기획은 오히려 『패트레이버』보다 훨씬 일찍 빛을 보게 되었다. 히우라 코우가 소설로 써서 카도카와 문고를 통해 출판한 『미래방랑 갈딘』이 바로 그 기획을 유용한 작품이다.

그 좌절을 겪은 후, 히우라는 SF작가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어 『패트레이버』의 기획으로부터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유우키 마사미와의 교류는, 유우키가 히우라의 대표작 『스타라이트☆댄디』의 삽화를 그려주는 등,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일시적으로는 공중에 떠 버린 『패트레이버』의 기획이었으나, 또 다시 새로운 재능과의 만남을 통해 새생명을 얻게 된다. 약 2년 전인 1986년의 어느날, 어느 전시회에서 유우키 마사미는 이즈부치로부터 한 명의 각본가를 소개받는다. 그 이름은 이토 카즈노리. 『시끌별 녀석들』, 『크리미 마미』 등으로 이채로운 재능을 뽐내던 그 사나이도, 역시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노리는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전시회에서 유우키와 헤어진 뒤, 이즈부치는 이토에게 『패트레이버』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던 이토의 반응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이즈부치의 얘기를 듣고 이토가 제일 먼저 떠올렸던 것은 『테크노폴리스 21C』였다. 그다지 떳떳하게 얘기할만한 일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제작 당시 공개중지 상태에 빠져 있다가 상영을 바라는 애니 팬들의 서명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극장 개봉이 결정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극장에 걸리자마자 엄청나게 대규모로 조직되어 있었던 팬클럽(당시는 개봉전, 방영전의 작품에까지 팬클럽이 만들어질 정도로 아니메 붐이 극심했다)이 눈 깜짝할 사이에 허물어져 버렸다는, 괴악한 사연을 짊어진 맹작[迷作]이었던 것이다. 확실히 근미래 경찰기구를 무대로 한 로봇액션물이란 점에서는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지나치다면 확실히 지나치다고 할 만한 연상이었다. 나중에 이토는 “붓쨩(이즈부치의 별명)의 프레젠테이션이 서투른 탓이야.”라고 항변했지만, 어쨌거나 이대로라면 『패트레이버』는 또 다시 흑역사 속에 묻혀버릴지도 모르는 운명이었다. -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뻔했다.

허나,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이토의 머릿속에 『패트레이버』 영상화에 대한 새로운 힌트가 떠올랐다.
“바로 이거다, 『폴리스 아카데미』같은 스타일로 가자!”
이 아이디어를 즉각 이즈부치에게 털어놓고 의논, “그거 괜찮네!”라고 의견이 모아져서, 유우키까지 3명이 모여서 다시 한 번 설정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컨셉은 TV시리즈화를 의식하여 ‘생선구이[熽魚]지향의 생활 애니메이션’이라는 컨셉으로 결정. 그해 가을에는, 이토 카즈노리의 부인이자 캐릭터 디자이너인 타카다 아케미도 참가. 이것은 유우키의 말에 따르면 “내세울 실적도 없는 만화가가 전면에 나와서 애니를 만드는 것보다도 나름대로 커리어가 있고 업계의 신용도 두터운 사람을 캐릭터 디자인으로 세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영업상의 전략적 이유와, “메카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디자인을 여성이 맡는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테지요. 게다가 내 그림이 스트레이트하게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지면 보는 재미가 없잖아요. 나는 패트레이버를 보고 싶은 거지 만들고 싶은 게 아니거든요.”라는, 상당히 개인적인 이유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마침 그림체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시기였던 타카다도 이 흐름에 편승하여,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마침내 이토네 집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파티를 이용하여 반다이의 프로듀서인 우노사와 신시 씨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 4인이 강력하게 추진했던 TV시리즈화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전6권이라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형식의 비디오 애니메이션 제작이 결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디오 작품이면서도 한없이 TV에 가까운 무드를 풍기는 『패트레이버』의 세계가 구축되기에 이른 것이다.

제작 프로덕션도 스튜디오 딘으로 결정되었고, 드디어 프로젝트가 시작되려는 시점에, 또 한 명 강력한 인물이 가세했다. 감독의 오시이 마모루다. 처음에는 전체를 통괄하는 감독을 두지 않고 각화별로 다른 연출가에게 부탁하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하려는 생각도 있었으나, 역시 스튜디오 딘의 입장에서는 현장을 이끌어 나갈 실력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끌별 녀석들』이나 『천사의 알』 등으로 항상 애니메이션 계의 최첨단을 달려왔던 폭탄남 오시이 마모루에게 감독 제의가 돌아가게 된 것이다.

오시이는 처음엔 “고용된 감독이니 그만큼의 일만 하겠다.”는 식으로 얘기했지만 차차 『패트레이버』의 세계에 몰두하기 시작, 제1화의 콘티에서 갑자기 정비원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고전영화 『와카다이쇼[若大將]』 시리즈의 영향인가?) 장면까지 그렸던 모양이다(물론 최종판에서는 짤렸다). 오시이 감독은 제작이 일단락된 시점에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스탭 여러분에게는 여러모로 고생을 끼쳐드렸지만, 혹시 어쩌면, 그들이 노력한 그 이상의 작품이 될지도 모르겠다.”
자신만만한 이 코멘트, 그야말로 『패트레이버』의 성공을 예언하는 한마디라고 할 만하다.

이렇게 해서 ‘천재’ 유우키 마사미의 망상이 낳은 환영(幻影)은 여러 명의 재능을 흡수하면서 무럭무럭 거대하게 자라나, 급기야는 애니메이션 역사에 발자취를 남길 ‘걸작’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렇게나 행복한 달성과정을 거쳐가며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함량미달의 조잡한 작품이 범람하고 있다’는 소리까지 듣고 있는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이런 일은 정말로 희귀하다고 할 만하다.

유우키 마사미, 이즈부치 유타카, 이토 카즈노리, 타카다 아케미, 그리고 오시이 마모루- 헤드기어 5인의 크리에이터에게 영광 있으라!

(본문 중 경칭 생략)
by 잠본이 | 2010/08/17 14:56 | ANI-BODY | 트랙백(1)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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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dawnsea's me.. at 2010/08/18 09:18

제목 : 막돼먹은진철씨의 생각
그런데 당시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이 ‘기획 놀이’. 즉, 가공의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의 설정이나 스토리를 자유롭게 짜내면서 노는 것이었다. ...more

Commented by 음음군 at 2010/08/17 15:30
오오!!! 이런 귀중한 내용을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ㅂ;
Commented by meercat at 2010/08/17 15:47
하마터면 찻잔속의 태풍이 될뻔한 작품이 이사람저사람 모여서 나비효과같은 결과물이 나오게 되었군요.
Commented by 나나당당 at 2010/08/17 16:27
명작은 태생부터 비범한 법이란 걸 보여주는 사례로군요.
Commented by 스킬 at 2010/08/17 17:54
몇개월 검토후 나온 작품이 아니라 수년에 걸쳐서 많은 사람이 다듬은 결과물이란 이야기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Commented by 행인1 at 2010/08/17 18:36
몇년 동안에 걸친 퇴고(?)의 결과물이었군요. 그래도 악의 집단 샤프트의 이름은 일찌감치 결정되어 있었군요.
Commented by 격화 at 2010/08/17 20:06
이것은 전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잠본이님!!!
Commented by NOT_DiGITAL at 2010/08/17 20:44
패트레이버의 기원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알고 있었는데, 탄생까지 이런 기나긴 여정이 있었군요. 재미있게 잘 봤고, 감사합니다

NOT DiGITAL
Commented by Hineo at 2010/08/17 21:52
'이렇게나 행복한 달성과정'이란게 정말 맘에 와닿습니다. ...과연 최근 애니 중 그런 애니가 얼마나 있을까(...)
Commented by JOSH at 2010/08/18 01:09
의지와 신뢰의 이야기이군요...

한국같았으면 원안을 낸 작자는 뭐하는 사람이냐? 하고 퉁시키고,
프로덕션(제작사)에서 가로채서 작품(드라마나 영화)은 만들어지고
폭로와 소송의 헬게이트가 열리는 상황이 연상되네요...
Commented by 쓰레기청소부 at 2010/08/18 03:13
하긴...이정도 작품이 단숨에 튀어나왔을리는 없었겠지만 명성에 비해 적절한 타이밍에 작품제작이 중단된 것도 좋은 평가를 받았던 원인 중 하나죠
Commented by 세피아 at 2010/08/18 09:48
허허...

저러한 전설적인 역사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거..
Commented by 엿남작 at 2010/08/18 13:47
커피빈서 커피마시다가 아이폰으로 다 읽었더랬죠.
시간 휙 지나가더라고요 ;;;

정성스런 글 잘 봤습니다.
Commented by 풍신 at 2010/08/19 00:14
"한결 같이 어두침침한", "자붕글"에서 뿜었습니다. 토...토미노 영감님. 7화, 8화, 13, 14화는 확실히 패트레이버에서 본 것 같군요.(응?)

기획 단계에서 유우키 마사미가 중심 인물, 오시이 마모루가 최후에 가입한 멤버(?)라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익이군요. (세간엔 은근히 오시이 마모루가 있는 헤드기어의 패트레이버, 유우키 마사미는 만화를 그린 것뿐...이라는 식의 글도 꽤 읽었는데, 코믹판을 보면 아무래도 패트레이버란 작품의 뼛속까지 꿰고 있는 것은 유우키 마사미라고 밖에 생각이 안 되었거든요.)

<웃으며 말하는 취미에서 시작해서 사람들과 만나 만든 결과물이 대히트한 명작!!!>이란 것은 멋진 것이로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나저나 바이돌과 경찰서 앞이 야쿠자인 패트레이버를 보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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