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by 잠본이 2006 이글루스 TOP 100 2007 이글루스 TOP 100 2008 이글루스 TOP 100 2009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 100 2011 이글루스 TOP 100
메모장
카테고리
태그
포토로그
라이프로그
rss

skin by 이글루스
퍼즐의 달인 크리스토퍼 놀란
이 양반의 가장 머리아프게 하는 영화 두 개를 비교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 만들기는 본질적으로 퍼즐 맞추기와 같다. 본래 각본상의 순서와 상관없이 뒤죽박죽으로 촬영된 장면들을 그럴 듯하게 이어붙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들은 ⓐ 아주 이해하기 쉬운 순서로 편집하여 다른 해석의 여지를 최소한으로 줄여 나가거나, 혹은 ⓑ (감독이 아주 특이한 정신세계나 남다른 목적의식을 갖고 있을 경우) 굉장히 난해한 순서로 편집하여 아예 관객의 이해 자체를 거부하는 식으로 나간다.

영화 제작자가 '가이드라인은 정해져 있지만 절대적인 정답은 없는 퍼즐 맞추기'에 가까운 편집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 힘겹게 영화를 완성시키는 데 비해 관객은 기본적으로 그러한 퍼즐 맞추기를 의식하지 않고(혹은 어렴풋이 의식하더라도 그것을 무시한 채)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써 영화를 소비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애초에 영화가 만들어진 목적이므로, 관객이 퍼즐 맞추기를 의식하게 된다면 그건 오히려 감상에 방해가 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의 경우는 대부분 선형적인 하나의 흐름으로써 받아들이면 그만이고 거기에 어떤 비일상적인 두뇌회전이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다. A→B이면 그냥 A→B 그대로 수용하면 될 뿐, 그것을 굳이 A→C나 D→B로 다르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의 경우는 절대적인 해석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느낌으로 받아들일 뿐 역시 관객의 참여라는 측면은 그리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는 산문이나 구상화, ⓑ는 서정시나 추상화를 감상하는 차원의 문제이며 관객의 입장에서는 '퍼즐'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진짜 천재라고 할 만한 일부 감독의 경우에는 ① 겉보기에 ⓐ처럼 보이면서도 편집의 묘를 살려 그야말로 다양한 해석과 감상이 가능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와는 정반대로 ② 겉보기에 ⓑ처럼 보이면서도 전체를 다 보고 난 뒤에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보면 단 한 가지 방향으로 이해가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퍼즐에 비유하자면 ①은 한정된 조각을 갖고 무한하게 다양한 형태를 맞춰나갈 수 있는 칠교놀이(탱그램)에 가깝고, ②는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조각들을 한데 모아 단 하나의 고정된 그림을 재구성하는 직소 퍼즐과 비슷하다. 이런 영화들은 위의 ⓐ나 ⓑ를 감상하는 방식으로 감상했다가는 그 내용을 100% 이해할 수 없고 설령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 매력을 완전히 즐길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관객의 두뇌회전을 요구하며 단지 하나의 '이야기'나 '추상'이 아닌 본격적인 '퍼즐'로서 기능하게 된다.

물론 ①이나 ②을 만드는 게 ⓐ나 ⓑ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까다로운 작업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는 감독이나 제작진이 바보가 아닌 한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관습이나 매뉴얼대로 작업을 진행하면 큰 문제 없이 만들어지고, ⓑ는 감독 꼴리는대로 마구 만들다보면 어떻게든 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어느 정도의 노력과 정성과 재능은 필요하며 그런 요소의 투입량과 외부적인 사정의 영향에 따라 완성된 작품의 퀄리티는 극과 극을 달리겠지만, 그것은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구조'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놀란 감독의 경우 위에서 설명한 ①과 ②를 둘 다 만들어본 경험이 있다. <메멘토>가 ②에 해당한다면 최신작 <인셉션>은 명백히 ①이라고 생각된다. <메멘토>는 아내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시간 역순으로 교묘하게 편집하여 처음에는 관객이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게 막다가 서서히 진실에 접근하게 만듦으로써 최종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가 완성되는 직소 퍼즐이다. 그에 비해 <인셉션>은 꿈을 매개로 타인의 무의식에 침입하여 정보를 빼내거나 사고방식을 왜곡하는 '업자'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선형적으로 보여주면서도 곳곳에서 중요한 부분을 고의적으로 생략하거나 무지 헛갈리는 단서를 은근슬쩍 뿌려놓고 일부 순서를 비틀어 놓음으로써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가능하도록 만든 칠교놀이다.

<인셉션>을 놓고 놀란빠와 놀란까 사이에서 논란이 분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측면을 파악했는가 파악하지 못했는가에 따라 이 영화를 보는 시각이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핵심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고 사용되는 설정도 그렇게 독창적이거나 혁명적이라 할 만한 것은 별로 없다. 엄청나게 심오한 철학이나 인생의 교훈이 담겨있는 것도 아니고(사실 개인적으로는 <매트릭스>를 갖고 철학을 논하는 사람들도 너무 오버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지만 그건 다른 기회에 따로 얘기해야 할 문제다.) 사용된 특수효과도 현란하고 기발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작품의 초점은 인간 드라마에 맞춰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캐릭터가 매력적이냐 하면 스토리 전개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놀란의 스타일 때문에 그렇게 톡톡 튀는 캐릭터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이들 요소를 딱 필요한 만큼만 내보일 따름이고 그 이상 추구하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퍼즐로서의 영화'라는 측면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그냥 '야심은 대단한데 뭔가 어중간한 경지에 머무른 정신 사나운 영화'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칠교놀이'라는 영화의 또 다른 얼굴을 간파한 관객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도 차차 그 퍼즐의 매력에 빠져들어 스스로 이리 맞춰보고 저리 맞춰보고 이런 답도 내보고 저런 답도 내보고 하는 식으로 즐겁게 놀이에 동참하여 헤어날 줄을 모르게 된다. 인터넷 게시판이라는 매우 현대적인 도구를 통하여 이런 놀이는 국가적, 더 나아가 전 지구적인 규모로 확장된다. 그 속에 뛰어든 관객들은 영화의 내용을 되새기면서 자기 의견을 개진하고 서로의 답안을 비교해 보며 마치 체스나 장기를 두는 듯한 지적 쾌감에 젖어든다. 영화라는 매체의 역사상 이런 식으로 '소비'되는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겠지만 <인셉션>은 대자본의 지원을 받아 호화로운 규모로 제작되어 전세계적으로 배급되는 이른바 '메이저 작품'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 <인셉션>이 왜 화제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내용이나 디테일이 아니라, 작품의 '구조' 그 자체에 주목해야만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메멘토>에서 영화의 선형적 구조를 철저하게 해체하여 정반대로 재구축함으로써 같은 이야기라도 전혀 다른 감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놀란은 이제 <인셉션>을 통해서 하나의 선형적 구조를 갖고도 무수히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는 비선형적 카오스를 도출할 수 있다는 골 때리는 위업을 이루었다. 자칫하면 너무 난해해진 나머지 위에서 설명한 ⓑ 타입의 결과물이 나와버릴 수도 있는 함정을 극복하고 '퍼즐로서의 영화'를 이토록 능숙하게 다루어낸 감독이 과연 몇이나 있었던가. 더구나 실험적인 독립영화가 아니라 상업영화에서 '관객들은 물론 평론가와 제작사까지 감쪽같이 속이고' 그런 짓을 해낸 감독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야말로 '퍼즐의 달인'이라는 칭호가 딱 어울리는 감독이라 하겠다.

그 '퍼즐의 달인'이 다음에는 또 어떤 새로운 경지를 우리 앞에 열어젖힐 것인지 아직은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일단은 우리 앞에 놓인 <인셉션>이라는 이름의 퍼즐을 여유롭게 다시 풀어보며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여기는 림보가 아니지만 놀란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을 테니까.


ps1. 하지만 제발 3번째 뱃맨 영화는 좀 머리 안 굴려도 되는 평범한 영화로 만들어 주길 바란다.(...)

ps2. 물론 이런 시각을 거치지 않고도 <인셉션>을 영화 자체로써 즐긴 분들에겐 그것으로 충분할 듯.
by 잠본이 | 2010/07/25 12:04 | 시네마진국 | 트랙백(1) | 핑백(1) | 덧글(9)
트랙백 주소 : http://zambony.egloos.com/tb/3378708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임시 개장 at 2010/07/26 04:29

제목 : 인셉션 - 림보 리셋을 통한 해법이 불가능한 이유 -
인셉션 - 타임라인순 완전 공략 ver.shougeki - 에서 트랙백.처음부터 지켜보신 분들은 아시겠고, 트랙백한 포스트의 최상단에도 간단하게 공지는 되어있습니다만,일단 위 글의 변천과정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위 글은 워낙 길어지다보니 제가 지친 것도 있고 해서,제대로 퇴고를 하지 않고 다소 불완전한 상태에서 글을 올려버렸는데,올리고나서 보니 빠진 부분도 있고 스스로 맥락을 잘못 짚은 부분이 발견되기도 해서올린......more

Linked at Hineo, 중력에 혼을 이끌.. at 2010/08/14 23:14

... 잠본이님의 포스팅 본문을 빌리자면 전 이걸 감상 당시에는 ⓐ처럼 선형적인 스타일로 봤는데(그래서 지금도 마지막을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보니까 ②였다는 것.(...) 개인적으로 ... more

Commented by 전설 at 2010/07/25 23:49
ㅋㅋㅋ 제 생각과 정확하게 일치하네요.

귀찮아서 저는 대충 썼는데 님이 자세하게 풀어써서 저는 괜한 짓을 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영화보는 시각이 평론가 못지 않으십니다요.

근데 평하는 것과 만드는 것의 입장은 조금 달라서... 저는 아무래도 이게 어떻게 관객에게 소비되는가.. 또는 이영화의 구조적인 특징이나 화면 구성 등 디테일에 집착하게 되네요.

어쨌든.. 흔히 말하는 씨네21키드처럼 영화에 대한 과잉해석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지라 님과 같은 견해를 가진 분을 만나면 반갑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모든 사물을 보는 법이지요.

그런면에서 볼때 님이 뭐하시는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물게 영화 제작자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신듯 합니다.

저는 제작자를 꿈꾸는 시나리오 작가라서 님이랑 비슷한 거 같고요. 참고로 감독들은 이 영화의 시각적 연출에 놀라움을 표하는 것 같고요.

작가들은 이처럼 복잡한 세계관을 정교하게 이어붙인 거에 놀란 거 같아요. 사실,, 제일 시나리오 쓰면 제일 어려운게 합 맞추기라고 생각하거든요.


PS.본업이 글쓰기인데... 글 쓰는 걸 안 좋아해서... 인터넷 상의 글은 대충 낙서하듯 쓰는 편인데.. 님 같은 글을 보고 나면 작가라는 직함을 내밀기도 쪽팔리네요. ㅠ.ㅠ
Commented by 전설 at 2010/07/25 23:51
오타 쩌네요. 대충 알아서 보세요 ㅋ
Commented by 사부로 at 2010/07/26 00:03
요새는 만드는 입장도 가르치는 입장도 방심해선 안되는 시대올시다
Commented by 충격 at 2010/07/26 04:28
제 글에 트랙백 거셨을 땐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갔는데 이걸 보니까 좀 의문이군요.

제가 하는 얘기랑 잠본이님이 하는 얘기가
기본적으로 같은 얘기인데,
제 얘기에 대한 반응은 '과잉해석에 대한 경계' 이고
잠본이님 얘기에 대한 반응은 '정확하게 일치' 라는
차이점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설마 상세 내용을 적었느냐,
개괄적인 얘기만 했느냐의 차이?
Commented by Julie at 2010/07/26 00:24
ps1 제발즘......
하지만 평범한 영화 만들어놨더니 관객이 알아서 머리를 굴리는...
영화란 원래 그런 것 아니겠어요?
Commented by 유나네꼬 at 2010/07/26 03:07
티켓을 사서 영화를 보는 순간은 단지 게임의 룰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더군요. 진정한 게임은 극장문을 나서면서 영화 자체의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입니다.
그때부터 빌어먹을 퍼즐게임의 시작이더군요;;;;;
머리속에 남아있는 기억의 단서삼아 웹에서 조각들을 모으고 추리하여 하나의 결론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즙겁습니다. 문제는 게임의 골도, 답도 보이지 않다는 점이지만요;;

게임의 끝은... 음...DVD가 발매하고 거기에 감독의 코멘터리라도 붙으면 그때쯤 끝날꺼 같네요^^;
Commented at 2010/10/31 22:5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팝이 at 2011/02/05 02:37
저는 오히려 이렇게 머리아프게 하는 영화가 좋더군요.
퍼즐 하나 던져놓고 '풀어봐라*^^*' 하는 듯해서 ㄲㄲ
그냥 이렇게 한 없이 괴롭힘 당하는게 좋아요 (....)
변태같은가-_-;

글 정말 잘쓰셨어요ㅠㅠ 최곱니다! 너무 멋지세요ㅠ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시는지 ㅎㄷㄷㄷ
Commented by 규베 at 2012/07/24 18:21
글 잘쓰셨네요 와... 재미나게 봤습니다.

인셉션은 개인적으로 해석 놀이랄까, 그런 부분에서 관객들에게 던져진 멀티엔딩이란 느낌이었어서, '1번 보는 영화'로는 부적절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볼때마다 엔딩이 달라지는 멀티엔딩 성향의 매체로 더 적합하지 않았나... 싶어서요.
(사실 이런 매체로는 '게임'이 적합합니다. 플레이어가 개입함으로써 해석이 완성되고, 하나의 가능성이 다양한 결말로 완결되죠.)

그래서, 인셉션을 보면서 느낀건 '영화'로서의 완성도보다는 '게임'으로서의 가능성이었습니다. 설정과 소재로서 장난치면서 여러번의 플레이를 반복하는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영화로 이런 느낌을 냈다는게 더 대단함ㅋ'이었습니다만ㅋㅋ

아무튼 글 잘 읽었습니다. :)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이전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