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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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헐리우드에서 백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
원제: How I made a hundred movies and never lost a dime
저자: 로저 코먼
출판사: 열린책들

로저 코먼은 일반적으로 B급영화의 제왕이라 불리지만 사실 그것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며 코먼 본인도 그 호칭을 그다지 달갑게 생각지 않는 것 같다. 'B급 영화'라는 것은 오늘날 알려진 의미와는 달리 시대적인 배경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즉 1930년대에 메이저 제작사가 큰돈을 들여 제작한 대작영화를 극장에 걸면서 시간 때우기나 덤의 의미로서 동시상영으로 내보내는 프로그램이 B급영화인데, 사실상 40년대에서 50년대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배급 형식은 소멸했고 원래 의미의 B급영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코먼의 주장이다. 그는 자기의 영화를 순수하게 '흥행용 영화exploitation movie'라고 불러주길 바라는 듯 하다.

코먼의 자서전인 이 책은 1926년 출생 이후 비교적 평범한 중산층 자녀다운 학창시절을 보낸 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엔지니어가 되려는 계획을 버리고 뒤늦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영화판에 뛰어들어 1953년부터 1989년에 이르기까지 근 40여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300여편의 영화를 만들고 그중 280여편에서 흑자를 기록하는 기적같은 위업을 달성하기까지를 밝히고 있다. 또한 책 하단에는 각각의 시절에 그와 함께했던 스탭들이나 배우들, 스폰서들, 제작자들, 지인들의 코멘트를 실어 코먼의 시각에만 치우치지 않고 보다 입체적으로 그의 일생을 조감할 수 있게 편집된 점이 흥미롭다.

코먼은 어떻게보면 오늘날의 관점에서 틈새시장을 공략하여 대박을 터뜨린 벤처기업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본서를 읽기 전까지 내가 가진 그의 이미지는 고작해야 빠른 시간 안에 꼼수와 잔머리를 총동원하여 후다닥닥 싸구려 영화를 만들어내는 '영화 기술자'라는 것이었지만, 본서는 그가 그보다 훨씬 더 가공하고 어처구니없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는 한마디로 청교도적인 근면함과 엔지니어로서의 효율성/합리성, 그리고 비주류로서의 반항심과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개척정신이 한데 뭉쳐진 경이로운 인물이다. 그는 돈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며 완성된 영화를 가지고 실제로 들인 돈 이상의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엄청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물샐틈없는 계획성과 대충대충 해치우는 듯한 임기응변이라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성격이 한 인물 속에 공존한다면 믿어지겠는가? 그는 또한 사람들을 다루는 데에도 천재였다. 무모해 보이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시키면서도 결코 적을 만들지 않고, 필요한 인재를 골라내어 쓸모있는 것을 가르친 뒤에 세상으로 내보내고 또 다른 재능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는 또한 사회의 흐름과 유행의 변화에 민감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와 표현에 도전하고 무엇보다도 돈을 아끼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

코먼의 제작방식은 이른바 게릴라 제작이어서, 따분한 회의나 서류는 집어치우고 일단 현장에서 모든 것을 결정해 나가면서 엄청난 속도로 제작을 해나가는 것이다. 돈과 시간은 절약되지만 대단한 체력과 집중력과 팀웍을 요구한다. 게다가 무리한 제작 스케줄과 한정된 예산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으려면 감독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통제하면서도 스탭이나 배우들이 방향을 잃거나 낙오하지 않도록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그의 영화는 대체로 졸속 불량식품 취급을 받았지만 그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와 '관객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두 개의 축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자기 방식을 관철시켰다. 덕분에 그의 영화는 미국보다는 유럽 쪽에서 먼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는 자화자찬이 엄청 심하고 어떤 면에서는 군대나 직장 동료가 말도 안되는 곤경을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타개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황당함도 속출하지만, 꽤 유쾌하고 재미나는 책이다. 다만 이미 나온지 십수년이 더 된 책이라, 코먼의 이후 행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특히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고 회계를 확실히 관리하며 (정작 코먼 자신은 장부정리같은 '사무적인' 일에는 진저리를 냈지만) 돈을 써야 할 곳에는 확실히 쓰면서도 엉뚱한 곳으로 돈이 새는 것은 철저하게 막는 그의 효율적인 일처리는 우리의 정부 관계자들도 좀 본받았으면 싶다. (반 진담)
by 잠본이 | 2004/02/26 20:29 | 대영도서관 | 트랙백(1)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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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문셋 대로 at 2005/04/29 11:56

제목 : 로저 코먼 자서전 / 아주 특별한 요리 이야기
지난 책번개 때 빌렸던 두 권의 책. 둘다 재미나게 읽었고 잠본이님께서 독후감을 요구하셨기에 (특별히 나한테 요구하신 건 아니지만..) 내용을 다 까먹기 전에 감상을 써 봅니다 : 3 나는 어떻게 헐리우드에서 백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 제목이 초기 코먼 영화의 제작기간 보다 더 길군요 : ) 일전에 트란실바니아 트위스트의 감상문을 쓰고 나서 별 생각 없이 네이버에서 한글로 '로저 코먼'을 쳐 봤더니 이 책에 대한 정보가 뜨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로저 코먼 자서전 같은 게 번역되어 나오다니......more

Commented by 觀鷄者 at 2004/02/26 20:32
친구의 추천으로 읽은 책인데, 말씀하신 것처럼 틈새시장을 절묘하게 노린 대단한 사업가라는 표현이 적절한 인물입니다. 특히나 지옥의 묵시록을 찍은 코폴라 감독과의 에피소드는 정말 데굴데굴입니다^^
Commented by SgtA at 2004/02/26 21:10
우리나라의 남기남감독 같은 스타일인가보군요.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4/02/26 21:26
남기남보다는 일이 좀 잘 풀린 케이스죠.
Commented by 플루토 at 2004/02/26 23:30
멋진 이야기군요.. 뭔가 본받고 싶은데. 주변에 저런 인물 없나~
Commented by hansang at 2004/02/27 10:27
이 책 저도 무지 좋아하는 책입니다. 효율적인 일처리는 정말 본 받을만 하죠. 거기에 나름의(!) 작가의식까지.... (하지만 영화들이 대부분 싸구려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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