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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와 둔갑설계도
저자: 김주영
출판사: 서울문화사

주인공은 이제까지 아흔아홉 명의 인간으로 둔갑하여 오랜 세월을 살아 온 구미호 일족의 ‘어르신’이다. 인간의 박해와 요괴사냥꾼과의 투쟁으로 인해 괴로운 시절도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는 먼 옛날의 일. 지금은 대부분의 구미호들이 되도록 눈에 띄는 일을 삼가며 사람들 틈에 섞여 조용히 살아가는 쪽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날, 불순한 목적으로 동료들을 습격하는 정체불명의 신흥 구미호가 등장하면서 이러한 균형은 깨진다. 하필 이럴 때 주인공은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자기의 본의와는 상관없이 성질 급하고 미숙한 남자 중학생의 몸에 갇힌 꼴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를 돕기 위해 파견된 요괴 사냥꾼은 경험 부족의 풋내기들 뿐. 과연 구미호를 노리는 범인의 실체와 목적은 무엇일까? 그리고 주인공은 백 번째의 삶을 택하기 전에 자기가 되고 싶은 인간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의 이름은 나호라 한다』, 『이카, 루즈』 등으로 친숙한 김주영 작가의 신작. 필자가 이제까지 접한 본 저자의 작품은 주로 연작 단편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권 장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제법 색다른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기존의 캐릭터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하게 수수께끼 풀이와 스토리 전개만으로 승부를 건 작품이라서, 인물들의 개성이 충분히 발휘되기도 전에 이야기가 끝나 버린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이야기 자체에 몰두하여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고전 민담과 전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일상 속에 잠복하고 있는 이계의 존재를 그려낸다는 점에서는 『이카, 루즈』와 통하는 점이 있지만, 위에서 말한 작품의 형식 때문인지 그 시리즈와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완전히 독립된 오리지널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 (주 무대가 부산이라는 점만 공통적인데 이것은 특별히 어떤 연결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고 작가가 가장 친숙하게 그려낼 수 있는 무대가 부산이기 때문인 듯 하다.)

또한 『이카, 루즈』와 비교해 보면 여러 모로 변화를 시도한 것이 눈에 띄는데, 첫 번째로는 시점상의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완전한 이계의 존재라는 점이다. 『이카, 루즈』의 주인공 이카는 특별한 힘과 자격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기억이 봉인되어 있고 평범한 일상에 찌들어 있는 입장이라서, 보통 인간과 다르지 않은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어르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활동하기는 해도 근본적으로 구미호이기 때문에 인간의 여러 가지 특성에 대해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감정으로는 이해가 잘 안 가는’ 입장에 서 있다. 따라서 같은 1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인간과 주변 세계에 대한 시선이 전혀 다르고, 그로 인해 사건의 서술도 보다 흥미진진하고 풍자적인 맛이 잘 살아난다.

두 번째로는 주인공의 신분과 그에 따르는 주변 환경의 제약이다. 이카의 신분은 이계의 각종 존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중재하고 인간 세계에 그들의 비밀이 노출되지 않도록 신경쓰는 ‘해결사’이다. 따라서 당연히 수많은 종족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는 프로페셔널(즉 성인)로서 사건에 임하는 게 보통이고, 작품 자체가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각 에피소드마다 육해공과 이차원을 망라하는 다양한 무대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인 ‘어르신’은 구미호들 사이에서는 존경받는 원로이지만 그 밖의 세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접점이 없는 은둔자에 가깝고, 게다가 평범하고 무력한 중학생(즉 미성년자)으로 둔갑하는 바람에 활동 무대 역시 학교나 집, 패스트푸드점 같은 일상적인 장소로 국한되어 있다. (인간사회에 숨어든 구미호들의 복지와 안전을 책임지는 특수법인 ‘미호관’ 정도가 약간 비일상의 색채를 띄고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공간으로만 취급된다.)

세 번째로, 이카가 주로 관찰자로서 남의 일에 끼어들어 사건을 지켜보는 데 비해 여기의 주인공은 사태 한 복판에 내던져진 당사자로서 적극적으로 목표를 찾아 헤매다녀야 한다는 점도 중요한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카는 사건이 안 풀리면 집으로 도망가도 할 말 없지만 여기의 주인공은 이미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 소설의 주요한 내용은 환상적인 세계에서 펼쳐지는 모험보다 극도로 친근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주인공의 일상생활과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고민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무대가 한정된 탓에 다소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천천히 여유를 갖고 하나의 이야기를 뚝심 있게 풀어나갈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특히 주인공의 시선으로 바라본 학교생활의 묘사는 어디선가 본 듯한 상황의 연속이면서도 정체를 숨기기 위해 힘을 억제하고 조심해야 하는 주인공의 처지와 얽히면서 기묘한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작가의 교직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짐작되는 학생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배려의 마음도 행간을 통해 읽어낼 수 있어서 흥미롭다.

작품 내의 설정상 구미호가 인간으로 둔갑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살아있는 인간의 간을 먹고 그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직접 작성한 ‘둔갑설계도’를 사용하여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이 더 어렵고 힘들지만 대신 보다 안정적이고 훨씬 더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실존하는 인간의 간을 먹어치운 경우는 그 인간의 본래 기억이 구미호의 의식을 먹어들어가 자아를 잃고 발광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구미호가 백 개의 간을 먹으면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전설과 마찬가지지만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주인공 본인은 그러한 운명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이런저런 사람으로 둔갑하여 다양한 삶을 살면서도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능력을 휘두를 수 있는데 그걸 다 버리고 한정된 수명을 가진 한 명의 인간으로 굳어져 버리다니 그만큼 비효율적인 선택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평소부터 그런 의문을 갖고 있었던 주인공은 다른 구미호들과도 이에 대해 토론하지만 뚜렷한 해답을 얻지는 못한다. 기왕에 인간이 될 거면 완벽하게 훌륭한 인간이 되겠다며 둔갑설계도의 작성에 열을 올리기도 하지만 그동안 살아 온 경험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인간이 어떤 것인지(또는 자기가 진정으로 되고 싶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결국 이 작품의 핵심은 ‘너는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압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불로불사의 구미호라는 존재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결국 대부분의 인간이 청소년기에 한 번쯤은 마주치게 되는 중요한 질문과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백 번째의 간을 먹으면 두 번 다시 구미호로 돌아올 수 없는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인간도 어른으로 성장해버리면 두 번 다시 어린이로 돌아가 미래를 선택할 수 없게 된다. 그런 만큼 ‘어떤 인간이 되어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는 평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일단 인간이 되고 나면 순리에 따라 다른 인간들과 같은 수명만큼만 살고 죽을 운명인 주인공에게도 마찬가지다. 초반에 주인공이 상황에 쫓겨 둔갑하게 된 모습이 공교롭게도 중학생이라는 설정 또한 이러한 테마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주인공은 해답을 찾았을까? 거기에 대해서 논하려면 이야기의 결말까지 발설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직접 책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마무리에 대해서는 독자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인간은 다른 상상의 존재들처럼 오래 살 수도 없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만큼 현재의 한 순간 한 순간이 보다 소중하고 존귀하다는 점이다. 영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구미호에게는 모든 시간이 찰나에 불과하지만, 오히려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모든 시간이 한없이 ‘영원’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비록 구미호같은 초능력은 없더라도 인생을 좀 더 유익하고 재미있게 살아갈 의욕이 생기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생각이 든다. 인생의 소중함을 가르쳐 준 ‘어르신’과 친구들의 앞길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빈다.


※본 리뷰는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by 잠본이 | 2009/12/27 20:19 | 대영도서관 | 트랙백 | 핑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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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있게 살아갈 의욕이 생기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생각이 든다. 인생의 소중함을 가르쳐 준 ‘어르신’과 친구들의 앞길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빈다. ※원문 작성: 2009-12-27 김주영라이트노벨서울문화사장편전래동화판타지패러디한국소설 Previous article Be the first to comment Leave a Reply 응답 취소로그인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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