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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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벌리어와 클레이의 놀라운 모험
원제: The Amazing Adventures of Kavalier & Clay
저자: 마이클 셰이본
역자: 백석윤
출판사: 루비박스

1939년, 모든 것은 뉴욕 빈민가에서 두 소년이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홀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삼류 출판사 잡일꾼 노릇을 하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항상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와 문필가로서의 야망이 가득한 새무얼 루이스 클레이먼(필명 샘 클레이),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박해를 피해 프라하에서 목숨을 걸고 도망쳐 온 그의 이종사촌 요제프 캐벌리어(필명 조 캐벌리어). 요제프의 일자리에 대해서 고민하던 두 사람은 당시 번성하기 시작한 새로운 미디어 - '코믹북(만화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현실로 옮기기 시작한다. 아마추어 마술사이자 예술학교 출신인 요제프의 경험과 필력, 그리고 샘의 완벽한 신체에 대한 열망과 헤어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한데 뭉쳐져, 사상 최강의 탈출 전문 슈퍼히어로 '이스케이피스트'를 탄생시킨 것이다. 두 사람의 아이디어는 대성공을 거두어 충분한 수입과 사교계에서의 명예를 보장해주지만, 탐욕스런 출판사와의 권리 다툼이나 만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왜곡된 시선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두 소년에게는 그런 문제들보다도 더욱 절실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미국 작가 마이클 셰이본이 2000년에 발표한 소설로, 출간 직후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고 2001년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39년부터 1954년까지의 미국을 배경으로 사촌지간인 두 주인공이 젊은 혈기와 남다른 재능만을 무기 삼아 만화업계에 뛰어들어서 겪어나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작품의 주 무대가 만화업계이며 묘사되는 사건, 소재, 등장인물들 중에도 실제 사례를 모델로 한 것이 많긴 하지만, 주된 이야기 자체는 그러한 배경보다 두 주인공이 어떻게 해서 각자의 개인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그것을 풀어나가는지를 다룬 성장소설에 가깝다. 제목만 보면 마치 이들 콤비가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엄청난 모험을 함께 헤쳐나갈 것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실제 작품은 훨씬 현실적이고 어른스럽게 착 가라앉은 톤으로 담담하게 그들의 경험을 전할 따름이고, 전체 이야기 중에서 두 주인공이 함께 활동하는 부분보다 그들 각자의 인생길을 개별적으로 서술하는 부분이 더 많기 때문에,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저 제목은 일종의 냉소 어린 반어법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샘과 조는 이스케이피스트의 대히트로 인생의 승리자가 된 듯한 기쁨을 맛보지만, 그를 통하여 완전한 행복을 찾지는 못하고, 오히려 더욱 혼란스런 상황에 빠진다. 조는 프라하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불안감과 자기 혼자만 안전한 미국으로 도망쳐 왔다는 죄책감 때문에 고뇌하고, 샘은 진지한 문학 작품을 쓰고 싶다는 꿈과는 정반대로 점점 B급 펄프소설이나 만화 스토리 작가로만 굳어지는 자신의 커리어와 불안정한 성정체성 때문에 괴로워한다. 두 사람은 이스케이피스트와 그에 뒤따른 후속 캐릭터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약시키면서 예술적 돌파구를 찾는 한편 각자의 인간관계나 애정생활을 통해서도 위안을 얻으려 하지만, 그마저도 뜻밖의 상황에 의해 파국을 맞고 만다. 헌신적인 예술가 애인을 만나 단란한 가정생활을 꿈꾸기 시작한 조는 갖은 노력을 다하여 유럽에서 탈출시키려 했던 동생의 죽음을 접하면서 반쯤 정신이 나가 군에 입대해버리고, '이스케이피스트' 라디오 쇼의 주연배우와 사랑에 빠져 게이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일 뻔하던 샘은 경찰의 편견에 찬 단속 과정에서 모욕을 당하자 자기혐오에 빠져 스스로의 성정체성을 봉인해버린다. 물론 이야기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져, 어떻게 두 사람이 각자의 상처를 추스르고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찾게 되는지를 잔잔하게 보여준다.

이 이야기의 핵심 테마는 '탈출'과 '변신'이다. 조 캐벌리어가 '탈출'을 구현한 인물이라면 샘 클레이는 '변신' 쪽에 더 가까운 인물이며, 이들이 하나로 힘을 합쳐야만 비로소 태어나는 극중 캐릭터 '이스케이피스트'는 두 테마의 양 극점을 아우르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조는 직업 마술사로부터 탈출 묘기를 배웠으며, 전설의 탈출 명인 후디니를 숭배하고, 그 자신이 나치의 압제로부터 탈출한 피난민이다.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문제가 생겼을 경우 자신만만하게 빠져 나가는 과감함을 겸비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샘은 소아마비로 인해 남들보다 부자유스런 다리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으며, 동성애자라는 성정체성을 숨기느라 항상 소심하게 지내고, 어머니가 강조하는 유대의 전통에 대해서도 진저리를 내는 편이며, 항상 자기가 손대고 있는 '쓰레기'가 아닌 '진짜' 예술을 하고 싶어한다. 그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건강한 육체를 지닌 비유대계 이성애자 순수문학가)가 되기를 열망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랑 같은 사람일 수는 전혀 없'다는 샘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탈출'과 '변신'은 상반되거나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문제다.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를 변화시켜 그 탈출에 대한 준비를 갖춰야만 한다. 반대로 이미 탈출을 겪은 사람은 그 경험으로 인해 그 전의 자기 자신과는 거리가 있는 새로운 자기 자신으로 변신한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탈출'과 '변신'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 번 이상은 직면해야만 하는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이며, 그 의례를 어떤 식으로 헤쳐나가는지, 그리고 그 뒤의 자기 자신이 어떤 식으로 변했는지에 따라 삶의 다음 행로가 정해진다고 할 만하다.

만화책이나 기타 오락매체가 제공하는 '현실도피' 또한 이러한 탈출의 일부분이며 거기에는 독자(혹은 사용자)가 그러한 도피에 걸맞게 스스로를 변신시키는 과정도 함께 들어있다. 말하자면 현실도피는 인생으로부터 잠깐 물러났다가 돌아온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서 그 '물러남'을 통해 이전과는 약간이나마 다른 '나'를 발견한다는 의미 또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민사회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탈출'하기 위해 유대인으로서의 스스로를 버리고 앵글로색슨풍 필명으로 '변신'해야만 했던 작가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미국 만화계를 무대로 선택한 것은 그런 테마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때 꽤 탁월한 선택이라 하겠다. 조와 샘이 기나긴 마음의 방황을 겪은 후에 내리게 되는 마지막 결정이 과연 납득할 만한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을 듯 하지만, 어차피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결정보다는 거기에 이르게 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1천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대작이지만 실제로 중요한 등장인물은 한정되어 있으며 핵심 스토리 자체도 그리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저자의 종횡무진 이어지는 장문의 파도에 휩쓸리지 말고 인물들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 읽어나가는 편이 좋을 듯 하다. 20세기 초 미국의 대중문화계와 생활습관에 대한 갖가지 고유명사가 총동원되기 때문에 거의 백과사전급의 주석이 필요하긴 하지만, 대부분은 본문 내용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사소한 인용이므로 큰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다만 본문 중간중간에 난폭하게 끼어드는 주석을 읽느라 흐름이 끊어지는 게 영 마땅치 않은데 이런 건 편집 과정에서 각주나 미주 형식으로 따로 빼놓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중간 중간에 가끔씩 발견되는 오타나 고유명사 표기의 비일관성도 다소 신경쓰이는 부분인데, 특히나 이런 사소한 실수는 출간 전에 편집부에서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교정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방대한 분량과 다양한 인용을 상대로 힘겹게 씨름하셨을 번역자 분의 노고를 생각하면 더더욱 안타깝다.)


ps1. 살바도르 달리, 오손 웰스, 스탠 리(!) 등의 유명인사가 은근슬쩍 작은 역으로 얼굴을 내밀어 큰 웃음을 준다. 특히나 달리의 경우는 남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잘난듯이 잠수복 입고 참가했다가 산소펌프 고장나는 바람에 거의 죽을 뻔 한다는 역할이라 눈물이 앞을 가린다. (조 캐벌리어가 보여준 신의 손놀림 덕택에 겨우 살아나긴 하지만) 캐벌리어가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을 보고 '만화를 통해서도 이만큼의 성취가 가능할까'를 고민하는 부분도 흥미로운데, 저자가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

ps2. 작중에 그려진 만화계 관련의 각종 굵직굵직한 이벤트는 실제 미국만화사에서 있었던 발전 단계를 주인공들과 그 주변인물들의 발자취를 통해 상징적으로 극화한 것이다. 정통파 히어로의 대히트(이스케이피스트), 오컬트 요소를 갖춘 여성 히어로의 등장(루나 모스), 진지함을 잃고 희화화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히어로들(종전 직후 이스케이피스트 등의 타락), 여성들이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생활만화와 로맨스물의 등장(로자 삭스의 작품들), 성인 대상의 좀더 어둡고 암울한 작품세계의 개척(조가 도피시절 동안 그려낸 골렘 작품) 등등.

ps2-1. 캐벌리어-클레이 콤비의 히트는 슈퍼맨의 창작자인 시겔-슈스터 콤비(이들 역시 유대계 이민자 가정 출신의 뒷골목 소년들이었다)의 패러디라 할 만하며, 극중 시대 또한 슈퍼맨이 일대 붐을 일으키던 1939년부터 웨덤 박사의 주장으로 만화가 유해도서의 누명을 써서 국회 조사위원회까지 결성되는 1954년 - 즉 미국 코믹스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황금시대(The Golden Age)'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치를 까대는 내용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그런 건 [마틴] 굿맨에게나 맡겨 두라고."라고 한다거나, 슈퍼맨 짝퉁들에 대한 소송 얘기를 하며 "다음은 포셋 차례일거야."라고 하는 등 코믹북 팬이라면 뒤집어질 법한 장난이 꽤 나온다.

ps3. 작중 캐릭터인 이스케이피스트는 이후 다크 호스 코믹스에서 작가 마이클 셰이본의 협력을 얻어 실제 만화로 작품화했다. '마이클 셰이본 제공 : 이스케이피스트의 놀라운 모험Michael Chabon Presents...The Amazing Adventures of the Escapist'이라는 제목의 이 시리즈는 셰이본 본인이 각본을 써준 '탄생편 : 열쇠의 계승자(The Passing of the Key)'를 비롯한 단편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단편에는 소설의 작중 시점에서 기술한 코멘트가 붙어 있어서 마치 진짜로 캐벌리어와 클레이가 이들 작품을 만든 것처럼 착각할 정도다. (이를테면 메타픽션 형식을 띤 소설의 스핀오프라고 할 만하다.) 본 소설의 남다른 인기는 물론이고, 미국인들의 고전 히어로 코믹스에 대한 사랑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단행본 버전은 제1권이 2004년 5월 19일, 제2권이 2004년 12월 8일, 제3권이 2006년 5월 10일에 각각 출간.)

ps4. 소설 본편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공통의 설정을 배경으로 하는 두 편의 단편이 각각 '어메이징 카발리에리의 귀환The Return of the Amazing Cavalieri'과 '난파선에서 아침을Breakfast in the Wreck'이라는 제목으로 문학잡지에 발표된 바 있다. 또한 2004년에는 일종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내용이 '후기A Postscript'라는 제목으로 '퍽! 탁! 꽝! 슈퍼영웅 : 코믹 북의 황금시대, 1938~1950Zap! Pow! Bam! The Superhero: The Golden Age of Comic Books, 1938-1950'라는 책에 게재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영화화를 전제로 한 각본 작업을 거치면서 소설에는 없었던 에피소드가 추가되기도 했으나, 영화화 자체가 중단된 상태라서 한동안 그 실체를 확인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들에 대해서는 '캐벌리어와 클레이의 놀라운 웹사이트'에 실린 '못다한 이야기들' 항목을 참조.

ps5. 다크 호스 코믹스에서는 2006년에 작가 브라이언 K. 본을 고용하여 본 소설의 비공식 속편에 해당하는 '이스케이피스트들The Escapists'이라는 6부작 미니시리즈를 펴냈다. 클리브랜드에서 엘리베이터 수리공으로 일하던 주인공 매트 로스는 생전에 이스케이피스트 광팬이었던 아버지의 유지를 잇기 위해 물려받은 재산을 탈탈 털어 이스케이피스트의 저작권을 구입, 친구들과 함께 전설의 히어로를 현대에 되살리기 위해 직접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작품 홍보를 위해 이스케이피스트 의상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예측 불허의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라는 내용. 소설이나 영화의 속편이 코믹스로 나온다는 방식 자체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지만, 극중 세계의 가공인물을 본래의 창작자들이 아닌 별개의 인물들이 되살려낸다는 컨셉은 꽤 참신하게 여겨진다. (단행본 버전은 2009년 12월 9일 출간.)


렛츠리뷰
by 잠본이 | 2009/12/27 16:31 | 대영도서관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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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초록불 at 2009/12/27 20:11
잘 보았습니다. 잠본이님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리뷰인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9/12/27 20:51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덧글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니트 at 2009/12/27 21:05
책을 읽어보고 싶게 하는 글, 잘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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