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박스 4관에서 디지털 상영으로 금요일 저녁에 봤는데 좋은 자리는 다 매진되는 바람에 좀 아슬아슬한 측면 좌석에서 감상. 화질 음질 다 괜찮았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스테레오 음향은 특히 통제실의 긴박감을 전해주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자막 번역도 약간의 생략이나 호칭의 재조정이 있었던 걸 빼면 적절해서 내용 이해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이야기의 밀도가 상당히 높다. 한정된 러닝타임 안에 원작 TV판뿐만 아니라 그 이후 이어진 구극장판의 설정까지 다 고려하여 생략할 건 생략하고 알아야 할 건 간단히 설명으로 때우고 하는 식의 교통정리가 들어가서 TV판이나 OVA였다면 상당히 길게 이어졌을 듯한 장면들이 굉장히 빨리 지나가고, 암시나 복선보다 직접적인 설명으로 모든 걸 전달하려 하기 때문에 에바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현기증 날지도 모르겠다. (특히 클라이막스에서 [
'이카리군이 각성했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 지구는 끝장이야!'라는 취지의 해설을 아주 진지하게 읊어대는 리츠코]를 보고 있노라면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장황해져버리는지라...)
-신극장판 시리즈를 즐기기 위해서는 꼭 열렬한 에바 팬일 필요도, 구작을 전부 감상하고 내용을 숙지할 필요도 없지만, 기본적으로 등장인물들이 뭐하는 녀석들이며 그들의 관계는 어떻고 각자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정도의 지식은 알고 가는 편이 나을 듯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전편 '서'는 꼭 봐둘 필요가 있다. (내 경우는 그랬다는 얘기니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어떨지 좀 걱정되기도 하지만)
-비극적인 파괴장면에 발랄한 동요를 BGM으로 깔아주는 연출은 뭘 말하고 싶은지 머리로는 대충 이해가 간다만 감정적으로는 텐션이 팍 떨어져서 좀 당황스럽기도 하다.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그 장면이 내포하고 있는 부조리함이나 잔혹함은 다들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기왕 하는 김에 멋있고 장엄한 음악으로 분위기를 띄워주는 편이 관객들 입장에서는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면 에바 치고는 너무 평범해지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TV판에 비하면 신극장판 자체는 꽤 무난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라 새삼스럽게 그런 수법으로 차별화를 한다고 해도 사후약방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리의 정체와 목적은 뭔지, 월면에 있던 카오루가 말한 '아버지'는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 예고에서는 에바 6호기와 8호기가 언급되는데 그럼 7호기는 어떻게 된 건지, 인류보완계획과 겐도의 꿍꿍이는 이번에야말로 뭔가 합당한 진상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TV판과 마찬가지로 낚시에 그치게 될 것인지, [
성격도 바뀌고 비중도 축소되고 누구씨 대신 모종의 굴욕까지 당해버리는 모 양은 과연 다음편에서 설욕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제레나 겐도가 지향하는 '진정한 에반게리온'은 대체 무슨 상태를 가리키는 것인지 등등 여러모로 궁금한 떡밥을 잔뜩 던져놓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크레딧 직후의 예고편을 거쳐 스르륵 도망치는 수법으로 막을 내리는데, 과연 다음편에서는 어떤 전개를 보여줄지 기대 반 불안 반이다.
-츠루마키 카즈야가 감독 중 한명이라 그런지 클라이막스에서 신지가 보여준 열혈돌파전개는 에바라기보단 다이버스터에 더 어울리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아니 뭐 [
정신오염된 채 적 기체에 갇힌 헤로인을 탈환해오는 눈물의 패턴]은 이미 선라이즈가 G건담과 가오가이가에서 질리도록 써먹은 것이긴 한데... 가이낙스 출신들이 이렇게 뻔뻔한 짓을 그대로 할 줄은 진짜 예상도 못했단 말이지. (덕분에 그야말로 '[신지 입장에선] 성질 고약하지만 사실은 착한 친구 1' 정도로 비중 축소된 모 양과 반비례하여 아야나미는 명실상부한 진 헤로인의 자리에 등극했다...지만 다음편에서 또 어찌될지 모르기 때문에 속단은 금물. 일단 예고편을 보니 레이 클론들이 더 나오긴 할 것 같은데 말이지.)
-이번 극장판 최고의 수확은 그동안 무지무지무지무지 궁금했던 토우지네 여동생의 얼굴이 딱 한컷 실제로 나왔다는 거. (근데 같은 사다모토 그림이라 그런지 시간을 구르는 소녀[...] 모씨의 초딩 때 얼굴이 저렇지 않았을까 하는 잡생각이 들더라. 헤어스타일 때문인지 게임한정 캐릭터 키리시마 마나 생각이 들기도 하고 OTL)
-영화의 좋고 나쁨과는 상관없이,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출연진과 같은 캐릭터, 같은 컨셉을 가지고 같은 브레인들이 모여 약간 다른 이야기로 초호화판 앵콜공연을 하는데도 다들 보러 와주는 걸 보면 가이낙스 이놈들은 진짜 팬보이들이 꿈꿀만한 최고의 경지를 이룩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제작은 가이낙스 명의가 아니지만 핵심스탭만 놓고 보면 그게 그거니까 편의상 이렇게 지칭했다.) 제타건담이나 스타워즈 클래식은 원래 창작자의 손으로 다시 빛을 보긴 했지만 옛 작품 재편집+신작컷 약간과 디지털 처리로 '나 아직 안 죽었으'라고 어필하는 수준에 그쳤고, 스타트렉은 진짜 완전히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새작품 만드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원래 창작자가 아닌 전혀 관계없는 이들에 의한 '리모델링'에 가까웠기 때문에, 원래 창작자의 손으로 만들면서도 구작의 반복이나 재현을 벗어나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그 무언가'를 지향하는 이 케이스는 대단히 희귀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게 다 지난 십수년간 사골게리온이라는 오명까지 써 가며 열심히 우려먹기로 돈을 모아오면서 인기와 지명도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겠지만...)
-엔딩 크레딧 나오자마자 불을 켜 버리는 극장의 관행은 여전하지만, 이번에는 '서' 때와 달리 비교적 많은 관객이 끝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문제의 '다음회에 꼐속' 장면(...) + 미사토의 불타는 예고편(...)을 감상하고 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상영 시작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팬들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예고편 끝나자 박수를 치는 사람도 적게나마 존재했다. 10여년 전 음지에서만 떠돌던 한국의 에바 붐을 간접경험으로나마 알고 있었던 세대의 눈으로 보면 참 격세지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만약 진짜 TV판하고는 다른 전개로 계속 가서 최초의 레이가 계속 살아남고 그뒤에 다른 레이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쿨한레이 바보레이 꼬마레이가 공존하는 '프티에바'의 세계를 노말사이즈로 보게 될 것인가? (그거 무리 OTL)
-그나저나 말들이 많았던
홍보용 실사클립 제작계획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