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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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구
저자: 김이환
출판사: (주)위즈덤하우스

누구도 그것들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완벽한 구(球)의 형상을 띤 그 물체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원리로 서서히 이동하면서 매끈한 표면에 접촉한 생명체를 남김없이 흡수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서 우왕좌왕하던 사람들도 곧 패닉에 빠져 도망치기 시작한다. 도시의 기능이 마비되고 언론도 제 구실을 못하게 되자 출처가 의심스런 소문만 횡행한다. 혼란한 틈을 타서 타인을 해치고 이익을 도모하는 무리들도 나타난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주인공은 순전히 남들보다 일찍 구(球)를 발견한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서울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지만 피난행렬로 인한 교통체증에 발이 묶이고 만다. 지방에 떨어져 살던 부모님의 안부가 걱정된 나머지 봉쇄된 도시 안으로 무모한 잠입을 감행하는 주인공. 하지만 그때부터 그의 앞길은 점점 꼬이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크게 나누어 3가지 파트로 진행된다. (다만 이것은 필자의 편의상 나눈 것이며 실제 작품상으로는 특별한 파트 구분 없이 계속 이어진다) 제1부에서는 갑자기 등장한 의문의 구(球) 때문에 벌어지는 소동과 그것을 피해서 도망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모자이크식으로 그려낸다. 주인공의 도피행이 중심 줄거리로 제시되는 한편, ‘구’의 습격을 피해 달아나다 추락사하는 직장인, 피난가는 가족을 용서 없이 강탈하는 악당들, ‘구’에 대응할 모종의 방법을 찾아서 학교 하나를 근거지로 삼고 공동생활을 계속하는 종교인들 등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태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인공의 행적과 직간접적으로 교차되는 것이다.

제2부에서는 이미 방치된지 오래인 지방의 무인도시에 도착한 주인공이 어느 마트에서 만난 수상쩍은 청년과 본의 아닌 공동생활을 하면서 벌어지는 갈등과 애증을 그리는데, 그 과정에서 군대나 성문화 등 우리 사회의 민감한 문제들과 그에 대한 주인공의 시선, 그리고 청년의 예기치 않은 행동으로 인한 둘의 관계 악화 등이 음울하면서도 흥미진진한 리듬을 타고 전개된다. 이어지는 제3부에서는 뜻밖의 과정을 통해 흡수된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너무 자세히 적으면 천기누설이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나머지 부분은 독자 여러분이 직접 확인해보시길 권한다.

이 작품은 간단히 요약하면 사람(또는 그 외의 일부 동물을 포함한 생명체)만을 흡수하는 수수께끼의 괴물체가 남한 전역을 뒤덮으면서 벌어지는 대혼란을 그린 일종의 재난소설이다. 하지만 정작 호기심의 대상인 ‘구’에 대해서는 극히 제한적인 범위 내의 특성만이 밝혀질 뿐이고, 그 외의 상세한 부분은 인터넷 및 구전으로 떠도는 헛소문이나 정부측의 사실인지 거짓인지도 알 수 없는 엉성한 발표문으로 커버된다. 작품 전체의 2/3에 달하는 부분의 서스펜스를 책임지는 막강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확실한 정체나 목적에 대해서는 결국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고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인공물인지 자연현상인지, 만약 인공물이면 그 근원이 지구 밖인지 지구 내의 특정 집단인지조차도 분명치 않고 그 목적이 공격인지 단순한 조사나 실험인지도 알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작 부분과 끝 부분에 뜬금없이 나타나서 주인공에게 뭔가를 조심하라고 알려주는 의문의 노인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설명 없이 미스터리로만 남겨둘 뿐이다.

오히려 저자는 ‘구’ 자체의 묘사보다는 그에 대응하여 벌어지는 사람들의 공포와 절망,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사회의 혼란과 마비 상태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현대 도시에서 조직적으로 관리되어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며 매일매일 누리고 있던 각종 혜택(전력, 수도, 교통, 통신 등)이 서서히 끊겨 버리고, 생존본능과 이기심으로 인해 도덕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점점 사라져가는가 하면, 연이은 피난으로 인해 아예 인적이 끊긴 유령 도시도 나오게 된다. 이런 상황은 굳이 초자연적인 존재의 습격이 아니더라도 통상적인 적의 공격에 의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으며, 특히 남북으로 분단되어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더욱 절박하게 와 닿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그러한 괴멸적 상황을 박진감있게 그려낸 재난 시뮬레이션 소설이라 할 만한데,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주인공이 어떤 움직임을 보여줄 것인지, 그리고 ‘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지 등의 궁금증이 작용하여 한 번 책을 잡으면 섣불리 놓지 못할 정도의 흡인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반 이후 극이 다루는 범위가 축소되고 주인공의 심리상태가 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면서 이야기의 초점 또한 전혀 다른 쪽에 맞춰지는데, 초반이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극한상황을 보여준다면 중반부터는 그 극한상황으로 인해 빚어지는 인간의 광기와 타락에 더욱 더 역점을 두고 있다. 말하자면 중반 이후로는 재난 자체의 성질보다는 재난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재난이 끝난 뒤의 후폭풍, 그 폭풍을 수습하기 위해 집단의 힘이 개입하면서 초래되는 마녀사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피하여 영원히 계속되는 개인의 도주를 보여주면서 독자의 각성을 촉구하는 일종의 사회비판적 도덕극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시작은 스릴 넘치는 30년대 B급 SF호러영화를 연상시킨다면, 후반부는 마치 조지 오웰이나 윌리엄 골딩 식의 시니컬한 반문명적 디스토피아 소설이 되어버린다고나 할까.

이러한 전개에 대해 찬반양론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스토리 자체는 처음부터 계속해서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일관되게 추적하고 있었던 만큼 내부적인 일관성은 확실하게 지켜지는 편이며 이보다 그럴 듯한 결말을 고안해내기도 어렵다고 생각된다. 만약 실제 작품과는 반대로 주인공이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짜내어 영웅적인 활약을 보여주고, ‘구’의 정체도 합리적으로 판명되어 가슴 후련한 클라이막스를 통해 모조리 퇴치한다는 할리우드식 해피엔딩으로 이어졌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었겠지만 실제 작품이 보여주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진짜배기 절망’을 보여주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식의 전개는 딘 쿤츠같은 해외 작가들이 이미 다 해먹어서 신선함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장애물도 있다.) 물론 출판사에서 시행 중인 ‘나만의 스타일로 엔딩 공모하기’ 이벤트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필자와 다른 의견일 것이다. 부디 그들의 시도가 헛되이 끝나지 않고 저자의 착상을 능가하는 새로운 결말을 찾아낼 수 있기를 빈다.

※본 리뷰는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by 잠본이 | 2009/08/29 12:04 | 대영도서관 | 트랙백(2) | 핑백(1)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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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World View P.. at 2009/08/29 21:10

제목 : 절망의 구 / 애니, 만화, 영화, 게임........
절망의 구뭐로 먼저 나올지 궁금하지만 엔딩을 조금 손봐주면 좋겠습니다<아내가 결혼했다>도 1억원 고료 어쩌구 해서 수없이 재판을 찍어내서 이젠 반값에 팔리는 스테디 셀러가 되었던데 -_-a신세대 통신작가들의 톡톡튀는 재미있는 소설들이 많이 나오는 듯 합니다예전 이우혁씨와 이영도가 하이텔에 연재하던 때가 생각나네요그때 "무명도" 등 정말 멋진 무협(?) 작품도 많았는데....왜 한국의 무협지는 싸구려로 출판되어 만화방에 들어가는 신세로......more

Tracked from [ toonism wo.. at 2009/10/23 12:57

제목 : 절망의 구 :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가
절망의 구 - 김이환 지음/예담1억 원짜리 공모전 수상작.작가 김이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물론 나도 어찌어찌 장르문학 쪽에 살짝이나마 몸을 담고 있다 보니 그의 이름과 작품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들어 왔지요. 올 여름에 무크지 《미래경》의 기획ㆍ편집을 하면서 진아 님이 보내 주신 원고를 통해 조금 더 알게 되기는 했습니다.그러면서도 어쩐지 그의 작품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더군요.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미래경》 기사를 볼 땐 ......more

Linked at 절망의 구 – 앤서블 at 2016/11/30 00:48

... ’ 이벤트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필자와 다른 의견일 것이다. 부디 그들의 시도가 헛되이 끝나지 않고 저자의 착상을 능가하는 새로운 결말을 찾아낼 수 있기를 빈다. ※원문 작성: 2009-08-29 sf김이환디스토피아장편한국소설 Previous article Be the first to comment Leave a Reply 응답 취소 Your email addr ... more

Commented by 이무기 at 2009/08/29 13:05
제목을 보자마자 머리 속에 울리는 리듬 하나 '라~ 라~라라라라 랄라 카타마~"(게임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ㅜ,.ㅜ)
Commented by windxellos at 2009/08/29 13:41
설명을 듣고 보니 저 작가분이 혹시 D&D클래식을 해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 D&D클래식의 컴패니언인가 마스터인가의 몬스터 목록 중에 위의 설정과 거의 똑같이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천천히 떠다니면서 접촉하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구' 라는 물건이 존재하고 있었거든요.(먼산)
Commented by sky at 2009/08/29 20:58
오 조은 정보네요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영원제타 at 2009/08/29 17:02
'구'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수퍼맨 - 내일을 위해가 떠오릅니다.
Commented by sky at 2009/08/29 21:06
저 책 최근에 돈내고 사본 몇 안되는 소설중 하나인데 재미있습니다

SF 환타지 미스테리 스릴러 섞여있는듯 해서요


그런데 결말이 너무 허무합니다

작가의 부족한 역량이 드러나는 것도 같고, 솔직히 원고 마감이 임박해서 급히 마무리지어 제출한 느낌입니다.

주최측도 인지하는지, "내가 제시하는 또 다른 결말 컨테스트" <- 이런 걸 실시하는 것 같더군요


애초에 원소스 멀티 유즈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니,
상의 원래 취지에 맞게,
만화나 게임/ 영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에는 딱 좋은 내용이긴 하더군요 ^^;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어떤분이 지적해주신 것 처럼......

다른 유사 모티브를 많이 참조한 흔적은 나지요.

저는 재질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웬지
간츠의 검은 구가 생각났고
검은 구의 속성은 게임으로도 나온 뭐든지 굴려가며 세상위의 온갖물건을 붙이는 그 게임(제목 기억이 -_-)의 역발상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여하간 신인 작가분의 작품으로는 참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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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리플 by windxellos at 2009/08/29 13:41

설명을 듣고 보니 &D클래식을 해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 D&D클래식의 컴패니언인가 마스터인가의 몬스터 목록 중에 위의 설정과 거의 똑같이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천천히 떠다니면서 접촉하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구' 라는 물건이 존재하고 있었거든요.(먼산)

출처 http://zambony.egloos.com/1943255
Commented by 개발부장 at 2009/08/29 23:15
으음... 저건 분명 grey goo... 과연 저 사람이 본 책은 [급진적 진화]일까 [특이점이 온다] 일까?
Commented by -Ida- at 2009/08/30 23:47
'내가 이 책을 보고 연상하는 바로 그것을 작가도 이전에 보았을 것이며 또한 바로 그것을 참고하여 책을 썼을 것이다' 풍조가 다시 도지네요...

세상에 이미 블랙홀과 반물질 이론이 존재하는데 '접촉만으로 흡수/소멸/파괴하는 구'가 개인의 창작물이겠어요. 아니, 그 이전부터 인간에게 '정체불명의 대상으로부터 쫓기는 꿈'이 존재하는데요. 이미 소설 내에서 '블랙홀'이 언급됩니다.

'절망의 구'는 리뷰에서 언급하다시피 '쫓는 주체'가 아니라 '쫓기는 사람들'에 관한 소설이고, 그러기 위해 상대를 원초적인 이미지로 선택했다고 봅니다.

영화 '괴물'의 시놉시스만 보면 에일리언이나 고지라나 용가리나 온갖 괴수영화를 다 떠올릴 수 있겠지만, '시놉시스 보니 내가 본 뭔가와 닮았네! 따라 했나봐!' 하고 휙 지나가버리는 건 무례한 일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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