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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3-1960
원제: The Collected Stories of Arthur C. Clarke
저자: 아서 찰스 클라크
역자: 고호관
출판사: 황금가지

한 작가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빠짐없이 살펴보는 것은 매우 즐겁고도 흥미로운 일이다. 문학 작품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는 수련을 거친 끝에 정제되고 가공된 형태로써 독자들 앞에 선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 만큼 같은 작가라도 시기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내용과 형식을 실험해볼 수도 있고 또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자기의 장점을 찾아내고 단점을 보완하면서 서서히 레벨을 높여 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말하자면 작가와 작품은 어느 한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라는 작업을 통해 부단하게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진화해가는 생물과도 같다. 따라서, 한 작가의 작품을 집필 혹은 발표된 순서대로 차례차례 돌아본다는 것은 그러한 진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짚어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작가가 어떠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 실력을 연마해왔으며 어떤 식으로 변화를 겪었는지 살펴봄으로써 작가 본인은 물론 작가의 대표 작품들이 어떤 배경에서 그렇게 완성되었는가를 더 깊게 이해하는 귀중한 체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출판계에서 어느 한 작가에 집중하여 전집을 출간하는 일이 그리 많지 않고, 그 극소수의 기회마저도 대부분 불후의 문호로 추앙받는 주류문학 쪽의 작가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외국작가, 특히 그 중에서도 SF나 판타지와 같은 장르문학 작가의 작품을 시대 순으로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최근에 데뷔하여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출판시장의 총아로 떠오른 베르베르나 롤링 같은 양반들은 거의 모든 작품이 본고장에서와 별다른 시간차를 두지 않고 번역 출간되었지만 이건 진짜로 운이 좋은 경우다)

그런 만큼 이번에 황금가지에서 클라크 단편전집이 출간된 것은 그야말로 국내 장르문학계의 일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 비록 장편이나 논픽션은 여전히 제외된 상황이지만 작품 활동의 기본이자 아이디어의 보고(寶庫)라 할 만한 클라크의 단편들을 시대 순으로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같은 장르문학이라도 추리문학 쪽에서는 도일이나 르블랑, 크리스티 등 메이저한 작가들의 전집이 많이 나왔던 데 비해 SF나 판타지 쪽에서는 그때그때의 최신 히트작이나 필독서로 꼽히는 고전들을 집중해서 소개하느라 자연히 한 작가 당 출판되는 작품 수는 한정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감상한 책은 바로 그 단편 전집(전 4권 예정) 중의 한 권으로,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발표한 33편의 중 ․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원서는 본래 지난 2001년에 한 권으로 발매되었는데, 1937년부터 1999년까지 발표한 100편 이상의 작품을 수록했기 때문에 총 966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황금가지에서 내는 번역판은 원서를 4권으로 나누어서 최대한 부담을 줄였지만 각 권의 분량도 만만치 않은 만큼 단편집이라고 해서 가볍게 생각하고 덤비기보다는 약간의 여유를 갖고 천천히 읽어나가는 편이 좋을 것이라 여겨진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필자의 클라크에 대한 인상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필자가 읽은 작품으로는 그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나 『유년기의 끝』, 『라마와의 랑데부』, 『도시와 별』처럼 사색적이고 내용의 밀도가 높은 장편들이 대부분이었고, 기껏 읽은 단편도 「동방의 별」처럼 왠지 웅대하고 심오한 것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클라크의 이름만 들어도 ‘발달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우주로 진출한 미래를 그리면서 인류라는 존재가 우주에서 갖는 위상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끔 하는 철학자이자 구도자’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곤 했던 것이다. 대단해 보이긴 해도 어딘가 가까이하기는 어려운 대학교수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니 그러한 선입관이 얼마나 편협하고 왜곡된 것인지를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물론 위에서 말한 이미지는 분명 클라크의 대표작들을 아우르며 그의 원숙기를 묘사하는 데 부족함이 없지만, 클라크에겐 그것만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또 다른 면도 있었던 것이다. 한창때(라고 해도 이미 삼십대 후반에서 마흔 사이지만)의 클라크는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통해서 소위 대표작에서는 느낄 수 없거나 희미하게만 남아있는 요소들을 마음껏 펼쳐 보이고 있다.

우주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여 바쁜 일상을 보내다가 뜻하지 않은 상황에 부딪히는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자칫하면 설정에만 매몰될 수 있는 세계관 속에 인간적인 따뜻함과 여유로움을 자아내는가 하면, 도저히 믿겨지지 않지만 왠지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한 이야기를 태연하게 풀어내는 이야기꾼의 입담을 통해 사람들의 위선과 어리석음을 풍자하기도 하는 등, 우리가 미처 몰랐던 클라크의 세계가 여기에 있다. 특히 ‘하얀 사슴 이야기’ 연작을 통해 보여주는 위트와 유머감각은 직설적으로 꼬집기보다는 영국인답게 매우 점잖으면서도 은근히 연타 펀치를 날리는 파괴력이 있다.

비록 일부의 에피소드에서는 허무개그에 가까운 단순한 트릭으로 넘어가기도 하지만 그럴 때에도 분명한 과학적 합리성과 일반인도 수긍할 만한 근거를 내놓음으로써 영미권에서만 통하는 말장난이나 심리적 트릭을 통해 독자를 화나게 하는 아이작 아시모프 식의 개그보다는 훨씬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난데없이 끌려나와 비교대상으로 전락한 아선생에게 묵념)

또한 당대의 과학기술과 사회적 패러다임에 민감하다는 SF의 특성 덕분에, 시대 순서로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면 작가의 필력이나 사상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녹아들어간 과학이론과 기술수준도 시대에 따라 개선되고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점 역시 이 책의 메리트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지금 와서 보면 진부하고 뒤떨어져 보이는 스토리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스토리가 진짜로 신선하게 느껴졌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감안하고 읽는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니다. 항성 속에서 사는 에너지 생명체나 혜성 관측선 등 이후의 장편에서 응용되는 소재들이 어떻게 발굴되어 다듬어졌는가를 추적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독자가 어떤 상황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체험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기존에 국내 출간된 클라크의 작품들을 통해 어느 정도 그를 알고 있었던 독자에게는 그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면을 찾아내고 더욱 더 친근하게 클라크를 느낄 수 있는 ‘재발견’의 기회가 될 것이다. 반대로 과학소설에는 흥미가 있지만 클라크를 접하지 못한 독자에게는 장편들에 비해 비교적 접근하기 쉽고 읽기 편한 중 ․ 단편들을 통해 클라크의 작품세계에 입문하는 ‘첫 접촉’의 기회가 되리라 믿는다. 어느 쪽이든 간에, 한 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인 것은 틀림없다.

마음에 맞는 책을 리뷰할 기회를 주신 이글루스에 감사드린다.


ps1. 다른 분들의 리뷰를 보니 이 책과 같이 나온 1960-1999 편을 받으신 분도 있는 모양이다. 어느 하나로만 정하기가 애매해서 랜덤으로 처리한 것이려나. (뭐 어차피 다른 한 권은 읽고 싶은 사람이 직접 사는 게 옳겠지만)

ps2. 생각해보면 이 전집에는 1999년 작품까지밖에 안 실려 있는데 그 이후 작년에 죽기 전까지 클라크옹이 다른 작품을 또 발표했을 수도 있으니 100% 컴플리트라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나머지 미수록작은 어디 가서 찾아보나...

ps3. Arthur이라는 이름의 발음이 참 거시기한 관계로('아써'와 '아떠'의 중간 정도인데 이럴 때면 옛날 세종대왕이 만드신 외래어 표기용 2중자음이 오늘날까지 살아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하다) 이제까지는 '아더'로 주로 써왔지만 본 리뷰에서는 대세를 존중하는 뜻에서 '아서'로 표기한다.

ps4. 앞표지에 나와 있는 '나는 예전에 5000년 전...'으로 시작하는 인용문을 보고 '오오 이거슨 무지 웅장한 우주서사시를 그려낸 문제작의 일부를 따온 건가!'라고 지레짐작했다가 본문을 보고 벙 쪘다. (왜 그런지는 그 문장이 들어있는 작품을 읽으면 안다. 편집자의 떡밥센스가 일품! OTL)

렛츠리뷰
by 잠본이 | 2009/05/02 19:55 | 대영도서관 | 트랙백(2) | 핑백(1)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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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허가영업소] 양계장 at 2009/05/06 00:03

제목 :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63-1990
책을 리뷰한다는 것은 나에게 그다지 친숙한 일은 아니다. 딱히 정리할 수는 없지만 책은 게임이나 영화, 만화에 비하면 더 어렵다는 느낌을 준다. 아마도 책이란 것이 훨씬 복잡한 내용을 담을 수 있어서리라. 그 중에서 문학류는 특히 더 어렵다. 비문학 전문지 같은 것은 간단하다! 그건 책 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기계일 뿐이다. 어쨌든 평소 별로 하지 않는 책 리뷰를 해야하는 것은 그게 이 책을 받은 댓가이기 때문이다. 노골적이지만, ......more

Tracked from Chapter 7 : .. at 2009/05/10 11:39

제목 :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3 - 1960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개인사정으로 인해 리뷰를 마감 끝자락에서야 올리게 된 점에 대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리뷰이긴 하지만 글을 뒤죽박죽으로 쓰는지라 이점에 대해서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아서 클라크(Sir Arthur C. Clarke, CBE, 1917~2008)라는 작가의 이름은 다른 SF작품 몇몇이나 영화 관련 기사를 통해서접했기에 일단은 알고는 있는 정도의 인지를 하고 있었던 것이 고작이었습니다만, 어느정도 이상의 관심을 가지게 된계......more

Linked at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 at 2016/11/25 02:27

... 를 따온 건가!’라고 지레짐작했다가 본문을 보고 벙 쪘다. (왜 그런지는 그 문장이 들어있는 작품을 읽으면 안다. 편집자의 떡밥센스가 일품! OTL) ※원문 작성: 2009-05-02 sf단편집아서 C. 클라크황금가지 Previous article Be the first to comment Leave a Reply 응답 취소로그인을 해야 댓글을 남길 ... more

Commented by 플로렌스 at 2009/05/03 18:51
아, 이것도 읽고 싶었는데...둘 다 주는 줄 알았더니 1953-1960과 1960-1999 중 랜덤이었군요. 1937~1953이 또 따로라니 언제 큰 맘 먹고 봐야겠습니다.
Commented by malefic at 2009/05/05 01:16
아시모프 선생은 "이봐 나를 이런 천재와 같은 급으로 보지 말라구, 나는 이런 보통 천재와는 다른 초~ 천재라니깐!"(왠지 강백호 톤으로) 이라고 말씀 하실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보고 싶네요, 아서 클라크 단편집.
Commented by 계란소년 at 2009/05/05 15:13
전 60-99년편을 받았습니다 . 받고 당황했는데 결국 53-60년편 따로 샀습니다;;
Commented by Spearhead at 2009/05/10 11:41
저는 53-60년편을 받아서...60-99년판을 따로 살 예정입니다;
트랙백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레스 at 2009/05/17 23:28
안녕하세요. 트랙백 감사합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말씀하신 대로 아서 클라크와의 '첫 접촉'이었어요.
깔끔하게 쓰신 리뷰를 읽으니 제가 생각했거나 느꼈던 부분이 좀 더 정리되는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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