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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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님 단편선 '환상결핍증'
원제: 환상결핍증
저자: 날개
출판사: 환상문학웹진 거울(전자책)


0. 게으른 리뷰어의 변명

고백하건대, 단편집의 리뷰를 쓴다는 것은 사실 장편 한 권이나 시리즈의 리뷰를 쓰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다. 장편의 경우는 일관된 주제와 단일한 등장인물을 가지고 한 가지 이야기만 하면 되는데다가, 곁가지로 다룰 만한 소재도 풍부하기 때문에 줄거리 특성상 독자가 미리 알아서는 안 되는 포인트를 굳이 드러내지 않고서도 대충 넘어갈 여지가 많다. 하지만 단편집의 경우는 소재도 등장인물도 줄거리도 제각각인 여러 편의 작품들을 한 곳에 묶은 만큼, 작품 하나하나를 일일이 짚어나가다 보면 너무 분량이 길어지고 본의 아니게 천기누설을 할 위험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그렇다고 해서 책 전체의 분위기나 작가의 스타일에 대해 장광설을 풀어놓는 쪽으로 빠진다면 그건 너무 현학적이고 무성의하게 비칠 가능성도 있다. 그런 식의 수준 있는 비평을 시도할 정도로 필자 자신이 작가를 잘 안다고 할 수도 없으므로 자칫하다가는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으며 지면을 낭비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이런 식으로 책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고민을 두 문단씩이나 늘어놓는 것만 해도 충분히 낭비이긴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래서 고민 끝에 생각해 낸 방법이, 작품들을 읽은 뒤 떠오르는 키워드를 늘어놓은 뒤 그 키워드와 관련 있는 작품들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해설을 진행하는 것이다. 비록 익숙지 않은 방식이고 그만큼 곡해의 가능성도 많은 편이지만, 작품을 조금이라도 다양한 각도에서 감상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뜻임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1. ‘감각’으로서의 ‘환상’

꿈이란, 환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현실에 없는 어떤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떠올리고 상상하며 심지어는 느낄 수도 있는 ‘힘’이자 ‘본능’이다. 조직화된 이성과 논리가 인간만의 고유영역인 것처럼, 단순한 개꿈을 초월하여 자기와 타인의 인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꿈과 환상 역시 다른 동물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꿈꾸는 능력뿐만 아니라 남의 꿈에 공감하고 그 이면에 숨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포함한다. 이러한 능력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사실은 대단히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논리적 계산과 현실적인 사고방식에 얽매여 꿈꾸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린 남자와 전생의 인연을 주장하며 그를 새로운 상태로 인도하고자 하는 여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로맨스인 「환상결핍증」이나,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자폐증에 빠진 소녀가 그 뒤에 스스로의 세계마저 강제로 빼앗기면서 두 번째의 파멸을 경험하는 「환상통」은 이성 숭배에 빠진 나머지 꿈과 환상을 경시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소리 없는 경고라고 할 만하다.

2. 세상을 등진 사람들

인간미를 잃고 점점 각박해지는 세태와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생존경쟁의 현실은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아예 세상에 맞설 용기조차 잃고 방 안에 틀어박히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다. 학원폭력이나 아동 대상 범죄의 후유증이 원인일 수도 있고, 경제 위기로 인해 일하려는 의욕은 있는데도 기회를 잡지 못하여 본의 아니게 골방 폐인이 되는 일도 있다. 주변 사람들의 안타까움이야 오죽하겠느냐마는 결국 이러한 상태를 깨고 바깥세상과 대결하는 것은 본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물론 그러한 선택을 위해 어느 정도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자기를 속이려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속마음을 내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여성의 이야기인 「가면」이나, 인터넷 활동과 사이버 펫 양육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백수 남성의 이야기인 「우주인」은 그러한 테마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3. 단절된 현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혼자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기 때문에 항상 누군가 혹은 무언가와 연결되기를 원한다. 무리를 이루고, 친구를 사귀며, 결혼을 하고, 가족과 소통하며,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도 바로 그런 ‘연결’을 꿈꾸는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바쁜 현실을 보내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연결이 희미해지고 급기야는 완전히 단절되는 상황도 찾아온다. 한 두 사람의 문제로 끝난다면 상관없겠지만, 현대에 와서는 사회 전체가 그러한 단절을 향해 줄달음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 고독한 개인의 비애는 더욱 더 심해지고 있다. 그러한 단절의 원인이나 그에 대처하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를 것이다.

「문」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회 시스템이 악역을 맡고, 「숨」에서는 눈에는 보이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미지의 물질이 원인으로 작용한다. 일상에 문제없이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내심 답답함을 느끼며 질식해 가는 주인공들은 그러한 단절을 뛰어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까? 그 해답은 바로 각 작품의 제목에 숨겨져 있다.

4. 우로보로스의 뱀

세상은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삶의 연쇄(連鎖)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도 있을 수 있고, 도저히 상상도 못 했던 마술적인 조화로 인해 처지가 뒤바뀌거나 서로의 소중한 무언가를 이어받는 일도 생길 수 있다.

소설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좀 더 극적으로 표현되는데, 작가인 등장인물이 보내는 삶과 그 인물이 쓰는 작품 속의 인생이 오버랩되거나 원래는 별개의 인물로 여겨졌던 주인과 손님이나 어른과 어린이 등의 대립자가 사실은 비슷한 체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밝힘으로써 그 둘이 어쩌면 동일인의 각기 다른 위상(位相)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주는 경우도 있다.

「해안가」에서는 민박집에서 일하는 남자와 그 집을 찾아온 학생의 사연이, 「환상통」에서는 카페에서 만난 남녀와 남자가 쓰게 되는 소설 속의 인물들이 어느 순간 서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물고 물리게 된다. 이러한 묘사는 마치 그림 속의 그림에 똑같은 그림이 들어 있고 그 그림 속에는 또 같은 그림이…라는 식으로 되풀이되는 미술의 트릭처럼 기묘한 여운을 남기며, ‘나’와 ‘너’의 삶이 어느 한 순간 그다지 다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깨달음마저 동반한다.

5. ‘탑’과 ‘아버지’

세상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아이들의 성장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한 아버지의 상실이나 부재는 어린이들에게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공허감과 안타까움을 안겨주며 이후의 인생에서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 한편으로 탑은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며 하늘로 우뚝 솟은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에 맞서는 완고함과 안정감을 나타내며, 때로는 남성성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아버지를 잃은 주인공이 그 대신 탑에 집착한다는 패턴은, 꽤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히로익 판타지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사실은 ‘아빠 찾아 삼만리’인 「탑」이나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뒤 카드로 탑 쌓는 것에만 몰두하는 소녀의 이야기인 「환상통」은 전혀 다른 분위기로 흘러가다가 상반되는 결말을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점에서 묘하게 비슷한 느낌을 준다.

6. 고전 뒤집기

워낙 여기저기서 많이 접한 나머지 단물이 다 빠진 고전작품을 도리어 신선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 ‘뒤틀기’와 ‘뒤집기’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형과 재해석을 어떤 식으로 가미해야 독자가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꾸며나가면서도 충분히 참신한 느낌이 들도록 요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안개 도시」에서는 제임스 배리의 유명한 캐릭터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독특한 방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선과 악이 역전된 기묘한 세계를 그려낸다. (여주인공의 아버지와 문제의 ‘악당’을 동일시하는 시선은 그전에도 있었지만 대부분 상징적인 의미에 그쳤던 데 반해 여기서는 아예 그 설정을 ‘작품 내의 사실’로 취급함으로써 비극성을 강화하고 있다.) 「G의 죽음」은 어린이들에게 익숙한 우화인 「시골쥐와 서울쥐」로 출발하여 ‘쥐가 사람의 손톱을 입수함으로써 그 사람으로 둔갑한다’는 고전 괴담으로 발전하는 유연함을 보여주면서, 주인공의 신상과 내력에 대한 호기심과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식용 드래곤」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판타지의 세계에서 주로 신성하고 거대한 힘의 표상으로 여겨졌던 드래곤을 인간보다도 열등한 가축의 처지로 격하시켜 충격을 준다.

이들 ‘뒤집기’가 그저 일회성 장난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작품으로 당당하게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아이디어가 주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스토리와 함께 계속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식용 드래곤」의 결말은 생명력 넘치는 자유의지와 치밀하게 계획된 경제논리 사이의 대결을 장기적 관점과 단기적 관점에서 총망라하는 입체적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상쾌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고 있다.

7. 맺으며

본 단편집에 실린 12편의 단편들은 각기 다른 소재를 갖고 다양한 시각에서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대담함과 장르를 가리지 않는 유연성을 보여준다. (특히 판타지와 SF를 표리일체의 존재로 다루고 있는 「탑」 같은 경우는 개인적으로 꽤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인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외부적인 사건이나 움직임이 별로 없어 지루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지만, 내면 묘사의 치열함과 독자의 허를 찌르는 노련한 전개로 그러한 약점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있는 것도 장점이다.

집필된 시기와 작가의 의도에 따라 퀄리티나 분위기도 가지각색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여러 가지 보석으로 꾸며진 왕관을 보는 듯한 아기자기함도 느껴진다. 다만 그 보석들 대부분은 아직 가공이 덜 된 원석의 형태를 띠고 있는 만큼, 이후의 작품을 어떤 식으로 갈고 닦을 것인가에 따라 작가의 세계도 그만큼 완성에 가까워질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 어느 보석을 선택하여 어떤 모양으로 얼마만큼 가공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작가의 몫일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그 보석이 찬란한 광채를 발하며 우리 눈앞에 나타나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 주길 바라는 바이다.


※본 리뷰는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70호 '신예작가 출간특집'의 일부로 게재)
by 잠본이 | 2009/03/28 01:23 | 대영도서관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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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쓰레기청소부 at 2009/03/28 02:39
고전 뒤집기라는 말에 눈길이 갑니다.. 근데 작품 속에서 이런 장치들이 그만한 매력을 골고루 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군요.
Commented at 2009/03/29 13:3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9/03/29 13:40
과분하신 말씀.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하시는 일 다 잘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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