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by 잠본이 2006 이글루스 TOP 100 2007 이글루스 TOP 100 2008 이글루스 TOP 100 2009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 100 2011 이글루스 TOP 100
메모장
카테고리
태그
포토로그
라이프로그
rss

skin by 이글루스
에비터젠의 유령
원제: 에비터젠의 유령 (PC통신 '하이텔' 시리얼 게시판 연재)
저자: 김이환
출판사: 북하우스

현대의 대한민국. 한 소년이 길을 걷다가 게임 CD를 하나 줍는다. 제작사도 어딘지 모르고 무슨 내용인지도 알 수 없으며 누구 하나 들어봤다는 사람조차 없는 기묘한 게임. ‘에비터젠의 유령’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 CD를 컴퓨터에 넣고 게임을 시작한 소년은 그 속의 주인공인 신비한 소녀 에이프릴에게 매료되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매일 게임에만 몰두한다. 그러던 중 에이프릴이 게임 속에서 저지른 파괴행위가 현실에서도 재현되면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보다 조금 앞선 시기의 영국 런던.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유구한 세월을 살아온 불사신 스캇 리치는 자기의 기원과 동족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 하면서도 별 굴곡 없이 조용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누리던 평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의문의 소녀 에이프릴이 등장하면서 산산조각으로 깨어진다. 모종의 목적을 위해 에이프릴과 스캇의 ‘기억’을 노리는 정체불명의 노신사 빅터의 공격을 받고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된 스캇은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겉보기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는데…

현재는 ‘콜린’이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경력 초기에는 ‘로비’라는 필명으로 활동했었던 저자의 첫 번째 장편소설. 2001년부터 2002년에 걸쳐 작품 전체의 토대에 해당하는 제1부 「에비터젠의 유령」을 완성하고 2003년에 제2부에 해당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소설」을 집필한 뒤, 여러 번의 리메이크와 내용 추가를 거쳐 단행본 버전으로 확정된 버전이다. 본래 두 권 분량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작품을 한 권으로 압축한 만큼 설명이 부족하거나 정신없이 넘어가는 부분도 적지 않으나, 저자가 전하려 하는 핵심은 확실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판타지 문학상 응모작이고 서평 등에서도 대개 판타지 소설로 소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독자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판타지 소설’과는 많이 다르다. 본래 판타지라는 장르 자체는 마법으로 대표되는 초자연적 요소를 핵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되 과학기술이나 인간의 근본적인 공포(macabre) 등 SF와 호러에서 다루는 요소는 의도적으로 배제한 거의 모든 환상소설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만 이 세 가지가 교집합이나 합집합을 이루는 작품도 적지 않기 때문에 이를 따로 분류하기 위해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 등의 용어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창작되고 소비되는 판타지 작품의 대부분은 서양 신화와 중세 무용담에서 유래한 영웅담 판타지(heroic fantasy)와 청소년을 주인공 및 독자층으로 삼은 청소년 판타지(juvenile fantasy)의 2가지로 양분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메이저 판타지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 스캇을 주인공으로 하는 제1부는 현대를 배경으로 초현실적인 존재들의 대결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볼 때 현대 판타지(contemporary fantasy)라고 볼 수 있고, 이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중첩적으로 다룬 제2부는 심리 호러물에 가깝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빅터의 진짜 목적이 밝혀지고 소설과 현실, 그리고 소설 속에 구축된 거짓 현실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경악스러운 설정이 제시되면서 그러한 분류는 거의 의미가 없게 된다. 여기까지 오면 오히려 현실과 가상현실의 충돌을 다룬 사이버펑크나 인물들이 여러 평행세계를 넘나들며 영향을 주고받는 다세계 SF의 구도에 더 가깝다. (가상인물과 작가의 대립이라는 구도에 주목한다면 장르 구분을 넘어서서 ‘소설 자체에 대한 소설’ 혹은 ‘메타픽션’이라고 규정지을 수도 있다) 게다가 제4부 이후에서는 그런 문제에서도 한 걸음 물러서서 주인공 스캇의 숨겨진 과거와 내면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탐구하는 사이코드라마 비슷한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이 소설의 장르를 한 마디로 규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사실 이 작품은 장르문학이나 소설창작론에 관심 없는 일반 독자가 읽기엔 다소 까다로운 편이다. 저자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SF, 판타지, 컴퓨터 게임, 낭만주의 시대 회화, 애니메이션, 영화, 로맨스, 신화, 유머, 독설, 패러디, 퀴어, 호러 등 많은 요소가 들어가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명확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미리 계산한 위치에 정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더더욱 독자를 골치 아프게 한다. 소재도 특이하고 나름대로 흡인력도 있지만 상당히 불친절하고 혼란스러운 면도 겸비한 만큼, 제대로 이 작품을 읽으려는 독자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뛰어들든지 아니면 편안한 마음으로 저자가 깔아둔 레일에 몸을 맡기고 그 흐름 자체를 즐기며 읽어나가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저자는 자신이 이 작품을 통해 추구한 것은 ‘요소들이 우연히 부딪히는 것을 보며 얻는 모호한 즐거움’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작품을 ‘재즈 뮤지션들의 즉흥연주’에 비유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오히려 총명하지만 한 군데 얽매이는 것을 꺼리는 어린이가 자유분방하게 레고블럭을 갖고 노는 것을 지켜보는 느낌이라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의 ‘블럭쌓기 놀이’는 단순한 놀이의 차원을 벗어나서, 이렇게도 조립해 보고 저렇게도 조립해 보다가 마음에 안 들면 허물어버린 뒤 다시 시작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조합을 발견하여 기뻐하거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 갈등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국면을 내포하고 있는 고도의 정신 활동에 가깝다.

레고블럭에서 각각의 조각이 어떤 모양인가 하는 점은 별 의미가 없듯이, 이 작품에서도 개개의 인물들이 어떤 설정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하며 움직이는가 하는 것은 일견 그럴싸해 보이면서도 의외로 별 의미가 없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서로 얽히면서 짜내는 전체적인 그림, 즉 블럭이 조립되어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형상이다. 그 때문에 독자는 계속 읽어나가면서도 도무지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고 기상천외한 사건의 연속에 압도되기를 거듭하다가 지쳐버릴 위험성도 있다.

이 작품 자체는 다분히 실험적인 면이 강하고 습작에서 정식 작품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아직 덜 여물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반대로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이 소설 이후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 오면서 작가로서의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저자를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을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 리뷰는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68호 '콜린님 특집기획'의 일부로 게재)
by 잠본이 | 2009/01/31 13:17 | 대영도서관 | 트랙백 | 핑백(1) | 덧글(5)
트랙백 주소 : http://zambony.egloos.com/tb/186605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Linked at 에비터젠의 유령 –.. at 2016/11/25 02:16

... 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 오면서 작가로서의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저자를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을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원문 작성: 2009-01-31 김이환북하우스장편판타지평행세계한국소설 Previous article Be the first to comment Leave a Reply 응답 취소로그인을 해야 댓글을 ... more

Commented by 타벳 at 2009/01/31 13:59
에비터젠의 유령이 출간됐나요? 연재할 때 읽은 이후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리뷰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데프콘1 at 2009/01/31 15:16
오랜만에 좋은 작품이 나오는 군요
Commented by 입진보 at 2009/01/31 18:56
사실 실험적인 게 아니라 미숙한 거죠...
Commented by 카바론 at 2009/01/31 20:17
예리하군.
Commented by utena at 2009/02/01 08:53
흥미를 일으키지만 '미숙'이라는 낱말이 있으므로 일단 신중하게 도서관으로 고고(...)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이전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