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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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들롱의 조로
스페인 제일의 검사 디에고 데 라 베가는 신대륙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옛 친구 미겔 베가 데 라 세르나를 우연히 만나 환담을 나눈다. 미겔은 남미 식민지인 누오바 아라고나(영어로는 '뉴 아라곤')의 총독이었던 백부가 사망한 뒤 후임으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이었다. 미겔은 새로운 땅으로 건너가서 자유와 평화가 넘치는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디에고는 누오바 아라고나가 수년 간 폭력과 탄압으로 통치되어 왔음을 지적하며 친구의 신변을 우려한다. 결국 그날 밤 미겔은 여관에 숨어든 자객들에게 암살당하고, 뒤늦게 달려와 자객들을 퇴치한 디에고는 그들의 배후인물이 누오바 아라고나의 군사책임자인 웨르타 대령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미겔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디에고에게 자기 대신 총독으로 부임하여 정의를 실현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마지못해 승낙한 디에고는 신분을 위장하고 누오바 아라고나에 도착하여 겉으론 화려하지만 실속은 없는 겁쟁이 총독을 연기하면서 몰래 내정을 살피기 시작한다. 호시탐탐 총독 자리를 노리는 웨르타의 방약무인한 행동과 그의 권세를 등에 업은 부패 관료들의 행패로 병들어가는 민중의 생활상을 두 눈으로 확인한 디에고는 검은 망토와 검은 가면으로 정체를 감춘 수수께끼의 사나이 '조로'로 변장하고 활동을 개시하는데...

-미국 작가 존스턴 맥컬리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1974년에 제작된 이탈리아-프랑스 합작의 유럽산 조로 영화. (자료에 따라서는 1975년으로 표시한 경우도 있는데 프랑스, 이탈리아, 그외 국가에서의 개봉 시기가 각각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프랑스의 국민배우라 할 수 있는 알랭 들롱이 주인공인 디에고/조로 역을 맡고 웨일스 출신 원로배우인 스탠리 베이커가 최강보스인 웨르타 대령으로 출연하는 등 여러모로 다국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이탈리아 감독인 두시오 테사리가 연출을 맡은 덕분에 당시 유행하던 마카로니 웨스턴을 연상시키는 요소도 많이 들어가 있고, 전통적으로 캘리포니아나 멕시코 등 북/중미권을 무대로 한 다른 조로 영화들과는 달리 완전히 남미를 무대로 삼은 것도 특이하다. 다만 30여년 전의 작품인데다 우리가 익숙한 할리우드 영화들과는 여러모로 다른 문법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전개가 늘어지고 심심한 부분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유럽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호쾌함과 세심한 개그(이를테면 보초병의 나팔이나 동네 꼬마의 피리에서 주제곡 멜로디가 흘러나온다던가 하는)는 꽤 볼만하다. 원제는 그냥 '조로'이지만 다른 작품과의 구분을 위해 영어권에서는 '조로(1975)' 정도로 표시하며 일본에서는 '알랭 들롱의 조로'로 더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양쪽 표기를 혼용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본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원작과 엄청나게 달라진 주인공의 기본설정이다. 원작의 디에고는 지방 귀족의 아들로서 어느 정도 지역사회와 밀착되어 있는 내부자였던 데 비해 이 영화의 디에고는 죽은 친구 대신으로 관직에 부임하여 그 지역에 섞여드는 외부자의 입장을 취한다. 원작의 디에고는 순전히 자기 자신의 결심을 바탕으로 지역사회를 정화하기 위해 조로 활동을 시작하지만 이쪽의 디에고는 본래 세상만사에 냉소적인 외톨이 검객이었으나 죽은 친구의 유지를 계승함과 동시에 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이루기 위해 조로로 나선다는 보다 복잡한 배경을 깔고 있다. 그 때문에 웨르타를 타도하고 민중에게 권력을 돌려준 뒤에는 아무런 미련 없이 자기 정체도 밝히지 않은 채 황야로 떠나가버린다. 말하자면 조로라기보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름없는 총잡이처럼 고독하고 니힐한 다크히어로에 가까운 것이다(알랭 들롱의 상쾌한 미소와 흥겨운 슬랩스틱 활극이 그러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 상쇄해주긴 하지만).

-원작에서는 분리되어 있었던 '총독'이라는 역할까지 디에고가 맡음으로써 때로는 조로로서 바쁘게 활동하다가 부하들이 의심하기 전에 재빨리 관저로 돌아와 바보 총독 노릇까지 하는 서스펜스 가득한 전개가 펼쳐지는 것도 본작만의 특색이다. (조로가 아무도 없는 마차에 총 들이대고 짐짓 능청을 떨며 '반항하면 총독의 목숨은 없다!'라고 협박하는 장면은 극중 인물들에게는 서스펜스지만 속사정을 아는 관객에게는 진짜 웃겨주는 코미디다) 스토리와는 별 상관 없지만 조로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콧수염'이 없다는 점도 전통적인 조로와는 좀 다르다고 하겠다(뭐 나중에 아니메판 쾌걸조로에서도 수염이 안 나오니 이 영화만 특이하다고 보기도 힘들긴 하다만)

-원작의 라몬 대장에 해당하는 웨르타는 당연히 악독하고 집요하며 잔인무도한 악인으로 묘사되는데 헤로인을 사이에 놓고 조로와 대립하는 것도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중간의 조로 체포작전이 실패한 것을 계기로 총독의 정체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머리싸움을 벌인다는 점이나, 검술과 싸움 실력으로는 조로를 압도할 정도로 강력한 용사라는 점이 부각되어서 최종보스로 나서기에 손색이 없는 캐릭터이다. (웨르타가 검술연습 중에 양초에 칼질 하여 토막내는 묘기를 디에고에게 보여주고 나중에 조로가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더 복잡한 방법으로 양초를 조각내는 쇼를 보여주는 부분은 남자들 사이의 찌질한 경쟁의식을 유머러스하게 드러내는 명장면이다)

-원작의 롤리타에 해당하는 포지션은 미겔의 사촌이자 몰락 귀족의 딸인 오르텐시아 풀리도가 맡고 있는데, 잘못된 세금징수 관행에 저항하여 민중의 봉기를 호소하거나 사랑하는 조로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다니는 등 훨씬 파워풀하고 적극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결국 마지막에 조로가 정처없이 떠나버리기 때문에 그와 맺어지지는 못하지만 조로의 마지막 부탁을 받아들여 새롭게 각성한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벙어리 하인 베르나르도(일부 버전에서는 '호아킨')는 원작과 달리 처음에는 디에고와 모르는 사이였다가 주인 미겔의 뜻에 따라 디에고의 심복으로 취직한다는 설정인데 조로의 각종 활동을 돕기 위해 별별 위험한 짓을 다 하지만 아무래도 말을 못하는지라 판토마임으로 의사를 전달하려고 삽질을 하는 모습이 의도하지 않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이 배역은 이탈리아 배우 엔조 체루시코가 맡았는데 얼굴 생김새가 젊은날의 로버트 레드포드를 약간 닮아서 깜짝 놀랐다) 원작의 곤잘레스에 해당하는 뚱땡이 중사 가르시아는 이름만 다를 뿐 여전히 주변상황에 잘 휘둘리는 멍청함과 주체할 수 없는 식탐의 화신으로 열연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결말부분에 바보짓하다가 우물인지 뭔지 모를 구덩이로 떨어진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안나온다)

-본 작품에만 등장하는 오리지널 캐릭터들도 꽤 다채롭다. 마을 어린이들의 대표로서 악덕 상인이 기르는 양이나 닭들을 몰래 풀어놓아 소동을 일으키는 장난꾸러기 치코는 디에고에게 '검은 여우의 혼 조로'에 대한 전설과 현장에 Z자 마크 남기는 기술(?)을 전수해 줌으로써 조로 탄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중요인물이다. (본인은 그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만) 가난한 민중의 후견인이자 존경받는 원로로서 압제에 대항하는 상징적 인물인 프란치스코 신부는 조로와 알게모르게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점차 혁명의 중심에 서게 되는 인권운동가로 그려진다. 미겔의 백부와는 명목뿐인 결혼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가 그가 죽은 뒤에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수도원에 들어갈 결심을 하는 백모님도 처음에는 꽤 까칠하게 굴지만 갈수록 귀여운 면모를 보여주며 개그캐릭터로 변신한다. 미겔 백부의 호위병으로 있다가 예기치 않은 일련의 사태를 통해 백모님과 커플이 되어버리는 독일출신 장교 메르켈도 영락없는 바보지만 왠지 밉지 않은 인물이다(후반에는 아예 '나는 조로 편이다!'라고 공식선언하고 병사들과 맞장을 뜨는 걸 보면 아무래도 원작에서 곤잘레스가 갖고 있던 긍정적인 부분만 따와서 새로 만든 캐릭터라 봐야 할 듯).

-그러나 오리지널 캐릭터 중에서 가장 대단한 녀석은 미겔 백부가 남긴 애완견 '암살자'라고 하겠다. 멍청한 외모와는 달리 엄청나게 머리가 좋고 동작도 재빠르다. 디에고를 암살하려고 누군가가 독을 넣어둔 과자를 미리 알아채고 밥상을 뒤집어엎어 디에고의 목숨을 구하는가 하면 백부가 숨겨둔 총독관저의 비밀통로를 디에고에게 알려주고, 후반부의 대 추격전에서는 볼트의 슈퍼목청이 부럽지 않은 울부짖음 공격으로 추적해오는 병사들의 말을 놀라자빠지게 만드는 등 의외로 대활약하는 캐릭터다. (그에 비해서 조로가 타고 다니는 검은 말은 색깔만 빼면 별로 특색이 없다. 보통 조로에 나오는 동물이라면 역시 말이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그점에서도 조로의 전통을 깨고 있다) 그나저나 미겔의 백부님은 대체 무슨 용도로 그렇게 그럴싸한 비밀통로까지 만들어 두었던 걸까? (그전에 조로같이 민중을 위해 싸우는 자가 있었다는 얘기는 없으니 아무래도 밤마다 사이 나쁜 부인 몰래 빠져나가 오입질하는 용도로 만들어뒀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혹은 오래된 유럽의 관습에 따라 적의 습격에 대비한 비상 대피로일 수도 있겠고)

-스카이시네마에서 2003년경에 출시한 코드3 DVD로 감상했는데 스페인어인지 이탈리아어인지 좀 헷갈리는 음성 트랙에 한국어자막을 지원하며, 부록으로는 알랭 들롱의 간략한 출연작 소개(그나마 2페이지 달랑)가 들어있을 뿐이다. 영화 자체는 요즘 관객의 눈으로 보면 너무 소박하고 심심한 구석이 있지만 어린 시절 KBS 명화극장에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보았던 기억이 되살아나 간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당시 성우로는 디에고가 김세한씨, 웨르타가 이정구씨였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나머지 배역은 잘 모르겠다. (그때는 아직 <전격Z작전>이 뜨기 전이라 이정구씨는 주로 터프한 악당 연기가 더 많이 나왔었다. <슈퍼맨 2> 첫 방영판의 조드장군이라던가 기타등등...) 탄생 이래로 상당히 다양한 버전의 조로가 나왔지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제일 먼저 영상으로 접한 터라 그만큼 인상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 이전에 서양 TV애니 버전의 조로도 보긴 했지만 이쪽은 너무 어렸던 터라 기억이 희미하다) 비록 그 이후로 더 많은 조로를 알게 되었고 각각 마음에 드는 점을 찾아내어 즐기고 있지만, 내게 '조로'라고 하면 제일 먼저 이 영화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올리버 어니언스의 경쾌한 주제가 '조로가 돌아왔다'의 리듬과 함께, 그 기억은 앞으로도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다른 분들의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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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본이 | 2009/01/10 21:07 | 시네마진국 | 트랙백 | 핑백(2)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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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잠보니스틱스 : 쾌걸조로 90.. at 2009/01/11 03:41

... e Film / Les Productions Artistes Associés Vocal performed by Oliver Onions 이탈리아-프랑스 합작의 극장영화 (1974). 알랭 들롱의 준수한 외모와 매끄러운 연기가 인상에 남는 쾌작. 그전에는 주로 미국에서만 만들어지던 조로 영화의 국제화를 실현. (참고로 같은 1974년에는 조 ... more

Linked at 잠보니스틱스 : 피자헛이 세트.. at 2009/01/18 22:57

... 자라면 혼자서도 꿀꺽 해치울 정도의 분량이라 가족용이라고 하긴 좀 애매하고, 내숭떠는 커플끼리 나눠먹으면 좀 나을지도? 참고로 먹으면서 같이 본 영화는 알랭씨의 명작 '괴도 검은여우'(푸핫). ... more

Commented by ZinaSch at 2009/01/11 02:27
이 영화 꽤 재미있었어요 :3 그런데 끝까지 다 보고 든 생각은 "그런데 결국 진짜 총독이 죽은 건 아무도 모른다"..........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9/01/11 03:44
미겔 아들에겐 '총독이 되기 위해 떠나셨다'고 구라쳤는데 나중에 그애가 사실을 알면 어떤생각을 할까요 OTL
Commented by marlowe at 2009/01/12 09:08
더글라스 페어뱅크스를 제외한 배우들이 연기한 조로는 게이라는 의혹이 듭니다.
(레이스 달린 하얀 셔츠때문에 그런가 봐요.)
Commented by draco21 at 2009/01/15 03:14
...... 어린시절 정말 재밌게 보았던 '조로'였습니다.,.,,, 알던 것과는 좀 다르긴 해도 정말 재미있게 보았지요. ^^: 그 후 시민 쾌걸의 등장으로 영 잊혀져버린.. ^^: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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