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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 루즈 제1권
원제: 어떤 개인 날 (환상문학웹진 '거울' 연재)
저자: 김주영
출판사: 서울문화사

모든 것은 맑게 갠 어느 날에 갑작스럽게 시작된다. 존재감 없고 소심한 이십대 직장인에 불과했던 주인공 ‘이카’는 사귀던 남자에게 차이고 직장에서도 쫓겨나는 수모를 당한다. 게다가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고 친구와 약속을 잡지만 보기 좋게 바람을 맞는다. 그런 이카의 앞에 용궁의 공주를 자칭하는 이상한 소녀가 나타나면서, 지루하기만 하던 그녀의 일상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제까지의 평범한 생활이 모두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카는 봉인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뒤편에 감춰진 또 하나의 세상과 마주하게 되는데…

이 작품이 제시하는 세계관은 일견 복잡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주 단순하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이면에는 또 하나의 현실이 존재하고, 그곳에는 설화나 동화, 민담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진 이형(異形)의 존재들이 인간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 이카는 종족은 비록 인간이지만 이러한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탐지하고 교섭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을 지닌 해결사이며, 그쪽 세계에서는 꽤 이름을 날린 편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밝혀지지 않은 과거의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해결사 노릇에 염증을 느끼고 ‘내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억을 봉인하고 평범하게 살아온 것이다.

별 볼일 없는 일상에 파묻혀 지루해하던 주인공이 특별한 체험을 계기로 잘나갔던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모험에 뛰어든다는 도입부의 전개는 테라사와 부이치의 만화 <우주해적 코브라>나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 <토탈 리콜>을 연상케 한다. (이 두 작품도 사실 훨씬 먼저 나온 필립 K. 딕의 소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다만 이카의 경우는 기억이 한꺼번에 완전히 돌아오지 않고 스토리 전개에 필요한 최소한의 부분만 서서히 돌아오는 식으로 되어 있으며, 진짜 중요한 기억은 쉽사리 떠올리지 못하도록 주문까지 걸어놓은 터라서 더욱 더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 덕분에 이카 본인도 그 부분을 기억해내려 하면 두통에 시달리게 되고 주변 인물들도 말해주고 싶은 눈치는 역력한데 저주에 걸려 험한 꼴을 당할까봐 애써 입을 닫고 있어서 여러모로 재미있다)

이 작품은 동일한 주인공과 설정을 기반으로 하여 차례로 사건이 일어나고 주인공이 그것을 해결해나가면서 주인공의 성격이나 세계관의 전모가 자연스럽게 밝혀지는 에피소드 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독자가 질리지 않도록 다양한 변화를 주면서도 공통되는 복선을 군데군데 깔아서 점차 큰 줄기를 완성해나가는 데 알맞은 구조이긴 하지만, 한정된 분량 안에서 독립적인 이야기들을 무리 없이 완결지어야 한다는 제약이 따르기도 한다. 이러한 구성은 작가의 초기작인 ‘나호’ 시리즈와도 통하는 데가 있지만, 현실 뒤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라는 2중적인 세계관이나 보다 생동감 있고 왁자지껄한 인물 배치를 통해서 더욱 진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이카가 과거에는 초일류 해결사로 이름을 날리긴 했지만 그동안의 기억상실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배워가면서 힘겹게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제약조건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자칫 주인공이 너무 강해서 생겨날 수 있는 권태감을 미연에 방지하고 극적인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는 점도 플러스로 작용한다. (이야기 전체가 이카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으므로 독자는 이카와 함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작품 속 세계에 녹아들 수 있다)

각각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핵심 테마는 바로 ‘금기에 대한 위반과 일탈’이다. 고향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자가 총애하는 상대의 부름을 떨쳐버리지 못해 다른 세계로 건너오고, 인간에게 절대복종하며 사랑을 기울여야만 하는 자가 배신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복종의 맹세를 깨뜨리며, 차가운 바람 속에 살면서 모든 것에 초연해야 하는 자가 따스한 정(情)을 깨달은 나머지 동족의 규율을 어기고, 꿈의 세계에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는 자가 아름다운 꿈을 붙잡아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싶어서 금지된 행동을 저지른다. 비록 스토리 자체는 환상문학 특유의 설정을 바탕에 깔고 인간 이외의 종족을 매개로 진행되지만, 결국 그 모든 사건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동기는 인간 본연의 다양한 감정과 욕구인 것이다.

기존의 국내외 설화나 동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엎고 기본설정만을 따 와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이리저리 뒤틀어 놓은 솜씨도 특기할 만 하다. 우렁이 각시는 특수한 유통망을 통해 원하는 주인에게 애완동물처럼 분양되어 생활을 돕고, 네버랜드는 변태와 무책임한 사회부적응자들만 모여 사는 개막장 동네이며, 이계의 주민들은 자기들을 위한 방송을 통해 다른 종족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다음 활동을 계획한다. 독자는 자기들이 익숙하게 알아 온 캐릭터나 개념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각색된 것을 보고 일단 한 번 놀라고, 그렇게 각색된 캐릭터나 개념들이 매력적인 스토리와 연결되면서 매우 그럴 듯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고 두 번째로 놀란다. (도무지 한국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국적 불명의 고유명사들이 당당하게 21세기 한국을 무대로 난무하기 때문에 다소 위화감이 든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궁극의 악이라고 할 수 있는 ‘형체 없는 증오’ 다르케의 존재나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이카의 과거 등 본 작품만의 오리지널 요소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강조되고 있어서, 앞으로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되기도 한다. 출판과 함께 붙여진 <이카, 루즈>라는 시리즈 타이틀의 정확한 의미도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데, 이카가 잃어버린 어떤 것 - 이를테면 ‘과거’나 ‘기억’ 혹은 그 기억 속에 묻혀있는 ‘인연’ 등이 이후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본 리뷰는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by 잠본이 | 2008/11/24 19:26 | 대영도서관 | 트랙백 | 핑백(3)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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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잠보니스틱스 : 이카, 루즈 .. at 2008/11/30 23:17

...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꿈의 교차로에서 그물을 드리운 사내’나 ‘네버랜드의 해적선’ 등 전편의 에피소드에서 소개된 설정도 간간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첫 번째 권을 먼저 읽은 뒤에 감상하기를 권한다. 전편에서 소개된 무대들이 네버랜드나 꿈의 세계, 지하철 0호선 등 다른 차원에 존재하거나 우리 머릿속의 개념으로만 상상 가 ... more

Linked at 잠보니스틱스 : [경] 이카,.. at 2011/03/02 00:27

... 끝나는지 궁금한 독자는 단행본 3권까지 복습한 뒤 이후 연재분을 정주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관련링크: 연재 게시판 | 작가 공식홈페이지 +잠본이의 단행본 리뷰: 1권 | 2권 | 3권 ... more

Linked at 이카, 루즈 제1권 &#821.. at 2016/11/22 01:01

... #8211; 이를테면 ‘과거’나 ‘기억’ 혹은 그 기억 속에 묻혀있는 ‘인연’ 등이 이후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원문 작성: 2008-11-24 김주영라이트노벨웹진거울장편판타지 Previous article Be the first to comment Leave a Reply 응답 취소로그인을 해야 댓글을 남길 ... more

Commented by rumic71 at 2008/11/24 20:13
스토리 전개에 필요한 기억만 슬슬 돌아온다는 점은 <신데렐라의 함정>을 연상시키는 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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