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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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퀀텀 오브 솔러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황량함과 무상감이었다(주 무대가 사막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카지노 로얄> 때와 비교해서 확실히 액션의 함량은 높아졌지만 너무나 빠르게 진행되는 액션은 평범한 관객의 눈으로 따라가기에는 좀 불친절했고 쉬는 시간 없이 자극이 계속되다보니 나중에는 점점 극중의 본드 못지않게 나도 무덤덤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크레이그 본드는 여전히 무심한 듯 시크한 표정으로 열심히 피땀 흘리며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저러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M국장과 같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언뜻언뜻 인간적인 표정과 대사를 내비치기도 했지만(완전히 걱정 많은 경찰 엄마와 조폭 아들의 모자만담 보는 기분이다), 다른 장면에서는 냉혹한 살인기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는 주변에서 '저자식 복수심에 치우쳐서 임무를 내팽개치고 있어!'라고 걱정하는 동안에도 그가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는 인상은 별로 받지 못했다. 이건 크레이그가 연기를 못해서라기보다는 어떤 면을 어느 정도로 보여주고 어디서 맺고 끊는가를 조율하는 연출과 편집의 실수라는 생각이 들지만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그녀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본드의 고뇌와 기껏 이룬 복수의 무상함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였을지도 모르지만 입 안에 모래가 한가득 들어간 듯한 이 깔깔함은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영화는 카지노 로얄처럼 시리즈의 관성에서 벗어난 채 막나가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기존의 007시리즈처럼 시대착오적인 난장을 펼쳐보이지도 못했다. 뭔가 둘 다 열심히 시도하긴 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러닝타임이 다 지나가버린다는 느낌이 든다. 역대 007영화의 명장면이나 등장 요소를 오마주한 부분은 꽤 있지만 기존 팬에게는 생뚱맞고 팬이 아닌 사람에겐 별 의미가 없다. 본드카로 유명한 애스턴 마틴은 그래도 전편보다는 좀 오래 나오지만 엄청 고생스런 추격전을 거친 뒤 넝마조각이 된다. 전통적인 본드걸의 포지션에 충실한 스트로베리 필즈(이름 또한 얼마나 촌스럽고 알기 쉬운가!)도 약간의 베드신과 개그신을 보여준 뒤 가차없이 석유를 뒤집어쓰고 퇴장당한다(죽어넘어진 정황이 <골드핑거>를 얄궂은 방향으로 오마주한 게 좀 깨기는 하지만 비극적이라기보단 진짜 뜬금없다. '쟤 대체 왜 나왔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피튀기는 리얼 액션이나 국익을 위해 악당과도 손을 잡는 각국의 비밀외교에 대한 폭로 등은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를 가진다기보다는 시대상황에 맞춰가기 위해 우리도 이렇게 노력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장식이라는 인상이 더 강하다. (후자의 경우는 중간에 M에게도 협박이 들어오고 007 카드 정지시키고 기타등등의 장애물로 기능하긴 하는데 뒤로 가면 갈수록 별다른 설명 없이 흐지부지되어 버린다) 요약하자면 007영화로 보기엔 007다운 요소가 현저히 부족하고 그렇다고 뭔가 색다른 새로운 작품으로 보기엔 독창성이 형편없이 떨어진다. 좀 다르게 보면 전편에서 도입했던 요소들을 서서히 완화시켜가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007 이미지를 무리 없이 도입하기 위해 요리조리 모색한 결과 이렇게 어중간한 물건이 나온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과연 다음 편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궁금하기도 하다.

-헤로인이지만 본드걸이라 불리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그 자체는 별로 문제될게 없다) 카밀의 역할은 애초부터 본드와 병행하여 사건을 이끌어가는 더블 주인공으로서 '복수에 따르는 피로감과 무상감'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캐릭터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Z건담식으로 말한다면 본드는 샤아고 카밀은 카미유가 되려나? OTL) 올가 쿠릴렌코의 이국적인 외모와 진심 어린 연기는 그런대로 빛을 발하고 있지만 이 캐릭터의 설정 자체가 오락가락하는 게 영 마음에 안 든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특별한 훈련이나 기술 없이 그냥 악과 깡과 잔머리만으로 버티는 인물처럼 보이는데 말로는 또 볼리비아 정보부 요원 출신이라고 하니 그런 것치고는 너무 아마추어스러워서 혼란스러운 거다. 어찌보면 전편의 베스퍼가 그랬듯이 이번의 카밀도 얼굴에 철판 깔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본드 대신 그의 감정을 대변하는 분신으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에바 그린보다는 관록이 부족한 탓인지 영 포스가 딸리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어찌보면 그게 또 현실에 근접한 인물상으로서 적절할지 모르지만 주변세상이 다 할리우드 액션으로 가득찬 첩보 판타지 세상인데 혼자서만 다큐멘터리 주인공 흉내를 내도 좀 문제니까 말이지 OTL

-분명 극장에서 감상하는 동안에는 압도적인 물량과 빠른 화면전개에 압도당하고 크레이그 본드의 차가운 카리스마에 가슴 졸이며 그런대로 재미있게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보고 나서 아쉬움이 앙금처럼 가슴 속에 서서히 가라앉는 그런 영화다. 오프닝 크레딧의 CG나 주제가도 전편에 비해 힘이 딸리고 가장 중요한 떡밥이었던 비밀조직의 실체도 파헤치지 못한 채 결국 중간보스 한놈 처리하는 걸로 마무리되니 좀 기운이 빠진다. 중요 악역인 마티유 아말릭은 훌륭한 배우이지만 그가 맡은 도미닉 그린이란 캐릭터는 너무 소박하고 찌질했다. 머리와 입만으로 먹고 살던 놈이 본드와 일대일 몸빵으로 부닥치니 왜 그리도 안돼 보이던지;;; 이건 전편의 르 쉬프르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쪽은 사이코스런 광기와 특이한 외모라도 있었는데 도미닉은 진짜 무슨 시골 복덕방 업자처럼 보여서 미치겠다. 제발 다음 편부터는 클라이맥스에서 본드와 대등하게 맞붙을 만한 육체파 최종보스 좀 내보내주길(굽신굽신). 전편에서 등장한 인물명이나 기타 고유명사가 아무런 설명도 회상장면도 없이 '다들 아실테니 술렁술렁 넘어가겠습니다'라는 식으로 툭툭 던져지니 전편을 안 봤거나 본 뒤로 시간이 너무 지나서 내용을 다 까먹은 관객에겐 좀 쥐약이라는 것도 약점이다. (특히나 전편에서는 거의 줄 잘못 서서 피보는 바보로밖에 보이지 않던 마티스 할배가 그렇게 중요한 역을 맡다니;;;)


ps1. 최후의 승자는 역시 유유히 도망쳐서 오페라 구경하는 미스터 화이트. 근데 '화이트'에다가 '그린'이라... 퀀텀 조직의 중간보스들은 색깔로 이름 짓는 관행이라도 있나? 그럼 다음편에는 '로버트 레드'나 '요크셔 옐로'나 '브라이언 블루'같은 이름이 나올 차롄가? (설마 예상을 깨고 '파니 핑크'나 '프랜시스 퍼플'이 나올 리는...그만두자)

ps2. 필즈가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하루밤 묵어야 한다며 본드를 허름한 호텔로 데려가자 금세 표정을 바꾸고 걸어나와 더 비싼 최고급 호텔로 가자고 하는 본드... 카드 정지당해서 마티스에게 빌붙어 사느라 스트레스가 쌓였던 거야? 그런거야? (하지만 저게 다 영국 국민들 세금으로 충당하는거라 생각하니 '우이씨 저래서 공무원들이란...'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OTL)

ps3. 비행기 추격장면 등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등의 고전 서스펜스를 참고했다고 하는데 사실 도미닉의 목적이나 카밀의 복수극 등등이 다 눈길 돌리기 위한 떡밥이고 진짜 전편에서 이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은 마지막의 베스퍼 옛남친(죽은척 위장하고 잠수탄 뒤 다른여자 꼬셔서 정보 빼내던중 본드에게 걸림 OTL) 뒷덜미 잡는 부분이니 어찌보면 히치콕 아저씨의 '맥거핀 이론'에 무지하게 충실한 영화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왠지 낚인 듯한 이 기분은 누구한테 하소연하지? OTL)
by 잠본이 | 2008/11/23 21:58 | 시네마진국 | 트랙백(6) | 핑백(2)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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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Kain君 at 2008/11/23 22:49
크레이그본드랑 맞짱 한번 뜰 보스가 떳음 진짜 좋겠습니다.
도미닉은 기껏 해준게 마지막에 관객들 한번 웃겨준거 말곤
특별히 기억도 잘 안나고;
Commented by 작가 at 2008/11/23 22:59
본드에게서 경찰전단지 사방에 돌아도 절대 얼굴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는 엄친아 첩보원의 향기를 느꼈다.

......!?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8/11/23 23:44
그거야 뭐 전통 아닙니까? 요즘은 제이슨 본도 따라하고...;;;
Commented by rumic71 at 2008/11/23 23:31
* 카밀은 제리드고 본드는 마우아 (이잉?)
* <Living Daylights>의 카라(미리암 다보)도 무려 KGB의 스나이퍼면서 아마스럽기 그지없었지요.
* <카지노 로열>이 <가면라이더 퍼스트> 처럼 느껴진 입장에서는 <퀀텀>이 그래도 꽤 괜찮게 느껴졌습니다.
Commented by kyung at 2008/11/24 00:10
..카지노 로얄은 기대를 하나도 안하고봤기 때문에 아직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는것 같아요. 봐도봐도 재밌더라구요. 퀀텀 오브 솔러스는 카지노 로얄만큼은 아니지만 재밌게 보긴 했는데, 떡밥을 지나치게 많이 뿌린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개인적으로는 오페라 토스카가 중간에 적절히 삽입된것 하고...마티유 아말릭이 휘두르던 도끼에 발등 찍어버린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네요..
Commented by NIZU at 2008/11/24 00:18
아무래도 후속편이 나오겠죠..?
본드걸의 애매한 포지션과 몸빵의 본드가 기억에 남는군요.. ^^
Commented by imago at 2008/11/24 01:25
본....시리즈가 007 시리즈를 모방한 것이라면 크레이브 본드의 007은 본 시리즈를 모방한 것 같은 느낌이네요.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8/11/24 07:22
공감하면서 잠본이님의 리뷰를 읽었습니다. 내용은 <카지노 로얄>과 이어지는데 전편과는 전반적으로 어찌 이리 다른지.. -_-a

진보(카지노 로얄)와 보수 사이에 걸쳐있는 좀 애매한 연출이였다고 해야 할까요. 개인적으로는 후자로 다시 돌아가는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조금씩 본성을 드러내는듯한.. T.T

Commented by 시무언 at 2008/11/24 09:38
뭐 카밀이나 카미유나 둘다 Camille이니까요(...)
Commented by 나이브스 at 2008/11/24 10:30
사실 이번 속편은 조금은 제작사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거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도 시나리오 중심이라기 보단 비쥬얼 위주라...
Commented by 바구미 at 2008/11/27 02:51
화이트...그린...이딴 식으로 나오길래 혹시 레드리본군인가 했습니다.
Commented by 쵸코찡 at 2013/02/24 20:54
생각해보니 엄연히 007도 공무원이군요....으악....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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