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은
극장에서 봤을 때와 별 차이는 없지만 아무래도 DVD용 자막이 극장용 자막보다 글자수가 많이 들어가고 문장이 길어서 좀더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며 볼 수 있었다. 가끔 원문을 개무시하고 상황에 맞춰 의역한 듯한 부분이나 전문용어가 미묘하게 잘못 쓰인 부분도 보여서 약간 거시기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정신과 의사인 샘슨을 '심리학자'라고 하는 건 좀 걸렸다만 희한하게도 삭제장면에서는 제대로 정신과 의사라고 자막이 나온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왜 저렇게 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딱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영화 본편에서 '헐크 스매시!'를 무려 '헐크 죽어라!'(...)로 옮겨버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록으로 들어있는 마블애니들 예고편에서 '어벤저스 어셈블(집합)!'을 무려 '어벤저스 합체'!'(...)로 옮겨버린 것이다. 후자야 어벤저스가 뭐하는 애들인지 잘 모르니 대충 한 거라 그렇다 쳐도 아니 도대체 헐크가 상대방에게 내지르는 소리를 '헐크 죽어라!'라고 번역한 건 무슨 센스야 대체? ('헐크, 부숴버린다!'라고 옮긴 극장용 자막은 차라리 상을 주고 싶을 정도) 이 대사는 당연히(?) 특전영상 중의 헐크 전투신 메이킹 다큐 안에도 그대로 들어가 있어서 할말을 잃게 한다. (이거만 아니었으면 진짜 100% 만족할만한 상품인데 정말 너무하는군)
-오프닝 화면도 여러번 훑어보면 그때마다 새로운 게 발견될 정도로 여러 가지 장난이 숨겨져 있다. 군의 조사선상에 오른 배너의 지인들 명단으로 영화에는 등장 안 하는 코믹스 캐릭터들의 이름이 실려 있다던가, 배너를 추적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승인하는 공문서에 스타크 인더스트리나 쉴드국장 닉 퓨리의 이름이 슬쩍 들어가 있다던가, 신문 헤드라인의 나열을 통해 배너의 도주 과정과 그에 수반된 여러가지 강력사건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던가 등등. 중간에 로스장군이 '미스터 블루'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 사용한 인터넷 감시 시스템도 알고보니 쉴드의 DB를 이용한 것이었다. (극장에서는 대사 생략이 많아서 모르고 넘어갔는데 로스장군의 대사에 '쉴드'란 이름이 확실히 들어있다. 또한 그 다음 장면에서도 PC화면에 쉴드 마크가 떠있다. 닉퓨리 본인은 등장조차 안 하지만 의외로
<아이언맨>에서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하는군) 또한 로스장군이 브론스키에게 주입할 시약을 꺼내는 장면에서 냉동보존 용기에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이름이 적혀있는 부분도 나오는데, 이것과 <아이언 맨>에 등장한 캡틴의 방패를 떡밥 삼아 '토니 스타크의 아버지가 슈퍼솔저 프로젝트에 관여했던 게 아닐까'라는 추측도 나돌고 있어서 꽤 즐겁다.
-개봉판과 다른 오프닝은 이미 소문이 돌아서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의 거지왕 김배너가 아무도 없는 극지방으로 도망가서 권총자살하려다 헐크가 타이밍 좋게 튀어나오는 바람에 못하고 그냥 옷만 날려먹은 채 빙하속으로 사라진다는 생고생 버전 되겠다. 여러 가지 면에서 헐크에게 영감을 주었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의식한 듯한 시퀀스인데(그 소설에서도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가 만든 괴물은 북극을 무대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배너의 깊디깊은 자책감과 죄의식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가 자의든 타의든 위험에 빠지면 헐크가 보호본능에 따라 즉각 튀어나온다는 설정을 보여줌으로써 클라이맥스의 복선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다만 여기저기서 DVD 발매 전부터 떡밥으로 나돌았던 '얼음속에 파묻혀 있는 캡틴 아메리카의 실루엣'은 워낙 빨리 지나가서인지 아니면 최종 편집분에서는 잘렸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삭제장면은 DVD 발매 전의 소문으로는 70분도 넘는다는 얘기가 있었으나 DVD에 실제로 수록된 것은 40분 남짓 되는 분량이다(사실 이것도 꽤 많은 편이다). 잘려나간 부분은 대부분 드라마 파트이며 액션장면은 하나도 없다. 전체 스토리를 보다 매끄럽게 흘러가도록 손질함으로써 액션장면의 임팩트를 강화하고 관객이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려는 마블 측의 배려에 따른 것이겠지만, 덕분에 에드워드 노튼이 대본작업에까지 참가하여 만들어 놓은 여러 장면들이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최종편집을 둘러싼 노튼과 마블 측의 갈등이 한동안 뉴스거리로 떠올랐던 적이 있다. (실제로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으나 노튼이 극장 개봉 이후의 거의 모든 홍보행사에 불참하고 본작의 DVD 코멘터리에도 참가하지 않은 것은 분명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전체 삭제장면은 대략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1) 브라질에서의 배너의 일상생활과 귀국 후 피자 배달 장면, 2) 로스장군과 군 관계자들(특히 여성부관인 스파 대령이나 동료 장성인 그렐러 장군)과의 대화, 3) 귀국 후 배너와 베티의 대화, 4) 베티의 현재 남자친구인 샘슨 박사의 등장장면 등이다. 1)은 사실 배너의 일상적인 면을 보여준다는 면에서는 귀중한 장면들이지만 전체 스토리상 별 영향이 없기 때문에 빼도 상관없긴 하다. 2)는 극중에서는 1차원적으로만 묘사되었던 로스의 심정이나 동기에 보다 깊이를 부여하고 군 작전이 전개되는 양상을 관객에게 보다 명확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필요한 장면들이지만 자칫 극의 전개를 지루하게 만들 수도 있어서 삭제한 것도 이해할 수는 있다. 다만 로스가 작전 속행을 망설이는 스파에게 헐크의 힘이 인류에게 새롭게 부여된 에너지이며 자기들은 그것을 길들이는 막중한 사명을 띠고 있다고 설득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출격 직전에 스파가 브론스키의 불안정한 상황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내자 로스가 '작전이 끝나면 개줄에 묶어둘걸세'라며 그녀를 안심시키는 장면은 분명 극중에 들어가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특히 후자의 경우 스턴스를 심문하던 스파를 브론스키가 난데없이 기절시키며 '정말 성가시다니까'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에 대한 복선이라서 더더욱 문제다).
-3)은 베티와 배너의 관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보여주며, 헐크의 힘에 대하여 배너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어서 캐릭터 묘사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긴 한데, 리브 타일러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웅얼웅얼하는 연기가 도무지 듣기 싫어서 그대로 넣었어도 좀 난감했을 것 같기는 하다(같이 연기하는 노튼의 공들인 연기가 아까워보일 정도라니). 절대 삭제해서는 안된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바로 4)인데, 샘슨이라는 제3자를 통해 베티와 배너의 상처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며 샘슨 본인의 배너에 대한 질투심과 그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장면이라던가 오래간만에 편안한 식사와 농담을 즐기며 웃던 배너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끼는 등의 명장면도 들어 있어서 본편에 못 들어간 것이 정말 아쉽다. 특히 극지방 오프닝과 샘슨-배너의 난롯가 대화 장면은 개봉 전 예고편에서도 꽤 비중 있게 다루었던 장면들인 만큼 제작진도 상당히 신경써서 만들었을 터인데 정작 개봉할 때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 날려버려야 했을테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또한 헐크의 탄생을 '자연법칙을 인간이 멋대로 주무른 결과 생겨난 힘의 폭주'로 해석하면서도 그 대처방안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생각을 드러내는 로스-스파의 대화 및 배너-베티의 대화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영감을 얻어 본작의 각본을 대폭 수정한 에드워드 노튼의 핵심 아이디어가 들어간 부분인데 이걸 들어내버리니 상당히 지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던 영화가 그냥 도망치고 부수고 터뜨리는 공허한 액션 스토리라는 뼈대만 남아버렸다(노튼이 화났다고 소문난 것도 이해가 간다. 내가 노튼이었다면 이런 취급을 받은 이후로는 마블하고 상대도 안할 거다).
-그런 뜻에서, 저런 삭제장면들을 활용하여 좀 더 캐릭터들에게 깊이를 부여하면서도 적당히 지루하지 않도록 균형을 맞춘 감독판을 따로 편집한다면 상당히 괜찮은 물건이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솔직히 이 영화의 흥행 자체가 뭐라 말하기 애매할 정도라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게 무슨 <블레이드 러너>처럼 역사에 남을 컬트영화도 아니니 장사도 안되는 판에 팬들이 요구한다고 무조건 감독판을 따로 내줄리도 없고) 삭제장면들 중 일부는
피터 데이비드가 쓴 소설판에서 더욱 확장된 모습으로 만나볼 수 있다. (애초에 소설판 작가는 각본 초고를 받아서 작업하므로 실제 개봉한 영화의 내용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제작 다큐는 영화 전반에 대한 것 1개와 헐크 및 어보미네이션의 CG캐릭터 작업에 대한 것 2개, 그리고 전 3막의 줄거리에 각 한 번씩 등장하는 3개의 전투신 제작에 대한 것 3개로 이루어져 있다. 모션캡처와 얼굴표정 모델링을 통한 자연스러운 캐릭터의 표현이나 여러 사소한 장면에 응용된 특수효과 기술들, 그리고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철두철미한 준비를 거쳐 브라질과 캐나다 등지에서 펼쳐진 로케이션 등이 주요 내용이다. 당초 캐스팅 제의를 받았을 때는 '어릴 때 헐크의 팬이긴 했지만 만화를 영화화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 힘들다'며 거절했지만 일단 캐스팅이 되고 나자 감독보다 더욱 풍부한 의견을 내면서 제작에 열정적으로 참가하는 에드워드 노튼의 프로다운 모습은 발군. (그런만큼 최종 편집본이 그의 비전을 반도 살리지 못한 허수아비 영화가 되어버린 게 더더욱 아쉽다. 뭐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긴 하지만)
-특전의 마지막은 본 영화의 동굴 장면에 영감을 제공한 원작만화 에피소드 <헐크 : 그레이> 중의 일부 장면을 디지털 애니메이션 방식으로 재현한 클립인데, 여기서는 헐크에게 구조된 베티가 공포와 혐오감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헐크에게 집으로 데려가달라고 하지만 헐크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헐크 너 지킨다'만 연발하는 좌절스런 전개로 나가기 때문에 실제 영화에 들어간 장면과는 분위기가 180도 다르다. (어찌보면 베티 입장에선 저게 더 현실적인 반응이긴 한데 이미 실사판 베티는 제니퍼 코넬리가 맡았을 때부터 성모 마리아스러운 대인배로 굳어진 듯해서 눈물이...)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거나 영화의 감춰진 면에 대하여 더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추천 아이템(다만 저놈의 '헐크 죽어라'라는 자막만은 용서가 안됨). 그러나 헐크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이런 부류에 별로 관심없는 사람에게는 좀 미묘한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2011년을 바라보고 장대한 어벤저스 사가를 꿈꾸는 마블 영화 팬이라면 당연히 구입은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