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주요 세일즈 포인트는 속도감 넘치는 액션과 현란한 메카닉의 향연이지만 사실 이 영화의 핵심은 주인공 토니 스타크의 성격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사건들을 펼쳐보이는 데 있다. 엄청난 유명인사에 집안도 부자이고 십대에 대학을 졸업할 정도로 천재인 데다 고철 덩어리만 갖고도 전장의 개념을 확 뒤엎을 만한 신병기를 뚝딱 만들어내는 기적의 손재주까지 갖고 있으니 이쯤 되면 마블 유니버스뿐만 아니라 슈퍼히어로계 전반을 봐도 찾아보기 힘든 엄마친구아들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어찌보면 대선배인 DC의 '배트맨' 브루스 웨인과 비교될만한 인물이긴 하지만, 어린시절의 불행으로 인해 트라우마에 빠져 항상 음울하고 고독한 독불장군의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웨인씨와 달리, 스타크는 어른이 될 때까지 트라우마라는 걸 모르고 자기 하고싶은 대로만 하면서 룰루랄라 살아온 터라 굉장히 유쾌하고 때로는 경박스러운 느낌까지 준다. 물론 백만장자 플레이보이 노릇이야 웨인씨도 자기 정체를 숨기기 위해(혹은 기분전환 삼아) 가끔씩 하는 짓이긴 하지만 작품 밖의 관객에게는 어디까지나 '저놈 연기를 하고 있구나 사실은 어두침침한 놈이 쯧쯧쯧'이라는 인상을 주는 데 비해, 스타크는 원래 생활 자체가 백만장자 플레이보이 노릇으로 점철되어 있고 특별히 연기를 할 필요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배트맨의 경우는 과묵하고 음침하긴 해도 대충 관객에게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군'이라는 인상을 주는 정직한 캐릭터인 데 비해, 스타크는 작중인물들은 물론 관객의 눈에도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다음에는 대체 어느쪽으로 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골때리는 인물로 그려진다. (마지막 기자회견에서의 폭탄선언은 이 친구의 그러한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라 하겠는데, 이게 단지 한때의 농담거리에 그칠지 아니면 속편에서 뭔가의 형태로 발전되는 복선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주변 인물과의 관계에서도 배트맨은 어느 정도 가족적인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데 비해(대표적인 것이 집사 알프레드와 파트너 로빈) 스타크도 믿고 의지하는 주변인물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 역시 스타크에 대하여 일종의 벽을 느끼는 순간이 있으며 완전히 그를 신뢰하지는 못하고 그의 기행으로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는 점이 다르다. (특히나 강화복을 만들 때 일체 사람과의 접촉을 끊고 인공지능 집사와 로봇팔들의 도움에만 의존하여 작업을 하면서도 전혀 외로움을 드러내지 않고 기계를 상대로 농담까지 거는 스타크의 모습을 보노라면 배트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종의 애수마저 느껴진다. 자기가 외로운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고독 자체를 아예 느끼지 못하는[혹은 느끼긴 하나 드러내는 법을 모르는] 캐릭터에 대한 연민이라고나 할까)
-스타크가 자기 심장(글자 그대로)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는 미인비서 버지니아 '페퍼' 포츠는 연애노선으로 이어질락말락하다가 결국 주인과 고용인이라는 선을 넘지 않고 이성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실 매일 스타크가 저지르는 괴상한 짓거리들을 (한숨을 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습하는 걸 보노라면 헤로인이라기보단 대범한 누나나 어머니 역할에 가깝지 않나 싶기도 하다. (군 관계의 친구인 제임스 '로디' 로즈는 이와 반대로 항상 '내가 니 시다바리가'를 연발하면서도 결국 돕게 되는 투덜이스머프 역할) 집안 관리를 맡은 홈 오토메이션 시스템 '저비스'는 인공지능의 한계 때문에 일정 이상의 캐릭터성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두 번이나 침입자를 허용하는 허점을 보인다. (특히 첫번째에서는 그 때문에 스타크가 죽을 뻔한다) 이거야 뭐 스타트렉 레벨의 초미래 SF가 아닌 한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스타크는 억만장자에다 타고난 천재라는 두 가지 요소의 조합 때문에 다른 마블 캐릭터들과도 구별되는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일단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처럼 서민의 애환을 겪을 여지가 거의 없다. 회사 수입과 특허료 덕에 넘쳐나는게 돈이라 생활고에 시달릴 일도 없고 주변의 친한 인물들은 다 자기 정체를 알고 감싸주기 때문에 쓸데없는 오해나 비틀리는 관계 때문에 고민할 일도 없는 것이다. (특히 스파이더맨의 경우 전자 못지않게 후자의 문제가 주인공을 두고두고 괴롭히는데 이게 참 못해먹을 노릇이다) 그가 발휘하는 파워는 자기 손으로 개발한 강화복을 입음으로써 후천적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헐크나 엑스맨처럼 특이체질이나 이중인격으로 인한 고민도 없고 언제든 필요없으면 한구석에 처박아둘 수도 있어서 아주 편리하다. (물론 심장에 박힌 파편을 막기 위한 보조장치를 달고 다녀야 한다는 장애인스러운 핸디캡은 있지만) 마찬가지로 '빛의 세계'를 지향하며 유명인사로 활동하는 캐릭터라면 판타스틱 4가 있겠으나 이들은 대략 중산층인 데 비해 스타크는 태생 자체가 상류계급이라 게임이 안 된다. (대신에 판4에게는 막강한 유사가족 파워[라 쓰고 시트콤 개그라고 읽는다]가 있긴 한데 스타크는 워낙 혼자놀기에 익숙한 인물이라 별로 신경 안 쓸 것 같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태도로 노세노세 젊어서노세 분위기를 풍겨가며 유유자적하게 인생을 즐기다가 회사에서 채근하면 잠시 돈도 벌어주던(...) 엄마친구아들 스타크가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자기 인생이 갖고 있는 모순을 돌아보게 되고, 결국 돈처바른 가내수공업(...)에 맛들여 슈퍼히어로의 수렁에 빠져든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관객의 양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국제사회에서 드러나는 미국의 모순을 적당히 밝혀주고 곧이어 그 모순과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내부의 적을 폭로한 다음 주인공의 손으로 내부의 적을 처단함으로써 정반합의 과정을 완성하는 서커스가 펼쳐진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민감한 정치적 이슈를 건드리지는 않는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스타크 본인도 보통사람의 한계를 넘는 여러가지 고난을 겪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어느날 갑자기 엄청난 깨달음을 얻고 성인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의 동굴에서 생환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성급하고 제멋대로이며 기행을 남발하지만 동시에 자기의 능력과 재산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곧바로 계획을 세워 실행해나가는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다. 토니 스타크라는 인간의 성격이나 가치관이 확 바뀐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방향이 미묘하게 바뀐 것이다. 자칫하면 전달되지 못하고 묻힐 수도 있었던 이런 미세한 부분이 잘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스타크와 비슷한 인생역정을 겪어서 인간적으로 성숙해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연기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배우진도 훌륭히 제몫을 하고 있지만 역시나 이 영화는 스타크라는 중심축을 지탱하기 위해 다우니 주니어의 카리스마에 절반 이상을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특기할만한 점은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스타크의 강화복 개발과정을 보여주는 데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광고문구를 그대로 체현하기라도 하듯이 카메라의 시선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끊임없이 강화복의 개발과 개선에 몰두하는 스타크의 모습을 속속들이 잡아낸다. 이 장면들은 단순한 과학자나 사업가라는 틀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몸을 움직여가며 손을 써서 일하는 것을 즐기고 물건을 만드는 일 자체에 일종의 페티시즘마저 느끼는 '발명가'로서의 스타크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며, 관객들에게는 영웅의 비밀스런 탄생 과정에 동참하는 듯한 일종의 쾌감마저 느끼게 한다. 물론 다소 지루하게 보일 수 있는 위험도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시행착오를 밟아나가는 과정을 묘사해준 덕에 후반부의 강화복 대 강화복 액션이 황당하지 않고 제법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시행착오 중에 발견한 결점 중 하나를 활용하여 적을 엿먹이는 보너스도 있다. 그다지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하지만)
-영화를 재미나게 보기 위한 몇 가지 사소한 포인트:
0. 영화 시작 전에 나오는 마블 로고의 아래쪽에 '스튜디오'라는 부분이 추가된 것이 눈에 띈다. 이 작품은 마블이 독자적으로 영화 제작사를 차린 뒤 선보이는 첫번째 영화다. (두번째는 몇달 뒤에 개봉할 <인크레더블 헐크>)
1. 자기가 공동원작을 맡은 마블 영화에는 100% 등장하시는 우리의 '싸나이' 스탠리 형님이 여기에도 당연히 등장. 중반부의 자선파티 장면에서 스타크가 파티장으로 들어가다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파이프담배를 피우는 영감님의 어깨를 툭 치며 인사하는데 그분이 바로 스탠형님. (판4에서의 깜짝출연보다 시간은 짧았지만 훨씬 강렬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OTL)
2. 스타크의 보디가드 및 운전사이자 짐꾼이기도 한 호건 역으로 파브로 감독이 특별출연. 이 아저씨는 원작에서 헐크급의 괴물로 변신하는 사고를 당한다고 들었는데 설마 속편에서 그 설정이 나온다면 그때는 누가 하려나?;;;
3. 아이언맨의 마지막 출격 이후 그걸 지켜보던 짐 로즈가 작업실 한구석에 놓인 마크2 강화복을 흘낏 보고 "다음에 보자, 친구(Next time, baby)."라고 지껄이는 장면이 있다. 원작에서 로즈가 아이언맨의 파생형 강화복 '워머신'을 장착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뒤집어질 수밖에 없는 대사다.
4. 시작부터 끝까지 잊을 만하면 튀어나와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은근슬쩍 감초 역할을 하는 콜슨 요원. 그가 소속된 기관은 너무나 긴 이름 때문에 '거 웬만하면 바꾸지 그래'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 모양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의외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그 기관의 약자는... 이에 더하여 엔딩 크레딧이 지나간 뒤에는 소문만 막연하게 돌았던 '전설의 그분'이 마침내 등장함으로써 '역시 마블의 최종목표는 어벤저스 실사판인 건가!'라는 덧없는 희망을 불태우게 만든다. 아직까지는 3. 과 더불어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낚싯밥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팬서비스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 (원작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대체 뭔 소린지 뜬금없어 보이겠지만 OTL) 참고로 스타크네 집을 관리하는 인공지능 '저비스'의 이름 역시 어벤저스에 등장하는 인간 조연의 이름에서 따온 것.
5. 솔직히 말해서 이 영화에서 가장 만화스러운 부분은 최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인 강화복이나 동굴에서 일주일 사이에 뚝딱뚝딱 만들어낸 초소형 아크 원자로 따위가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별별 험한 꼴을 다 당했는데도 반창고나 얼음찜질 정도로 다 해결해버리는 스타크의 무지막지한 맷집이다. 심장에 폭탄 파편 박히고 물고문 당하고 사막에서 마구 구르고 하는 거야 다른 액션영화 주인공들도 웬만큼은 해내는 경지이니 상관 없지만 강화복 추진기 시험하다가 이리 날라가고 저리 부딪히고 하는데도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고 멀쩡한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닌가. (보통 사람같으면 죽었거나 살아도 며칠은 병원신세일텐데) 뭐 그렇게 따지고 들면 사실 아무리 강화복 입었다지만 초고공에서 땅에 처박혔을 때도 아무런 부상이나 후유증 없이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거 자체도 말이 안되는 건 마찬가지다. (충격으로 인한 내상은 있었을 법도 한데...) 역시 이 영화 최대의 불가사의는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최첨단 과학이나 콧수염 토니씨의 천재성이 아니라 아무리 얻어맞아도 벌떡 일어나는 저 무한맷집이라 하겠다. (스파이더맨이나 엑스맨처럼 신체 자체가 강화된 것도 아니니 충격에 대한 저항력은 보통사람 레벨일 텐데...)
6. 이제까지 영화화된 마블 히어로들이 대부분 유전공학이나 생물공학, 혹은 정통 범죄 느와르의 향기가 강했던 데 비해(아, 고스트 라이더는 미국 중서부 괴담이겠군) 이 작품은 히어로의 특성에 걸맞게 기계공학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영화 전체의 비주얼을 통제하고 있다. 배경음악도 중후한 클래식풍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벗어나 샤프하고 경쾌한 록음악의 스타일을 띠고 있다. (꽤 취향인지라 OST 따로 나와있나 살펴볼 예정) 엔딩 크레딧을 보니 옛날 애니판 아이언맨의 주제가 및 유명 밴드 블랙 사바스가 부른 <아이언 맨>(내용은 마블의 아이언맨과 관계 없음) 등이 수록곡으로 끼어 있던데 어느 부분에서 나오는지 약간 궁금하다.
7. 이전에 돌았던 썬더볼트 장군(from 헐크)의 우정출연 소문은 결국 오보인 듯하다. 하지만 헐크 쪽에 스타크가 나와준다는 얘기는 거의 확실하게 굳어진 듯하니 그쪽을 또 한번 기대해 봐야겠다. (힐러리 스웽크가 깜짝출연한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이 역시 제작진이 웹상의 호사가들 주의를 딴곳으로 돌리기 위해 유포한 거짓정보라고 한다)
-마지막 숨은 장면을 보다가 떠오른 망상 하나:
의문의 남자 - "자네에게 어떤 조직에 대해 알려주러 왔네."
스타크 -
"제다이요? 아니면 팔라딘?"의문의 남자 - "아직 매운 맛을 덜 봤구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