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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캐릭터를 만든다! - 명탐정 번개

목소리가 캐릭터를 만든다! ― 『명탐정 번개』

text by ZAMBONY 2005.07.10. (성우사랑 제1호에 게재)


■ 어떤 작품인가?

원제는 『명탐정 홈즈』로, 1984년 11월부터 1985년 5월까지 방영된 전26화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이다. 토쿄무비신샤(현재는 쿄이치 도쿄 무비 사업본부, 약칭 TMS)와 이탈리아 국영 텔레비전(RAI)의 합작으로서 만들어졌다. 제작 과정에 얽힌 복잡한 사정 때문에, 1981년 여름부터 1982년 6월까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하의 텔레콤 사(社)에서 만들어진 6화분과, 마침내 방영이 결정된 이후 1984년에 TMS에서 만들어진 20화로 구성되어 있다.

기본적으로는 영국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모티브로 하고 있으나, 사람이 아닌 개[犬]를 의인화하여 활약시킨다는 점이 특이하다. 등장인물 전부를 개[犬]로 디자인한다는 것은 이탈리아 측의 요구대로이지만, 작품의 세계관을 포함한 창작의 거의 대부분은 일본 오리지널이다.

특히 파일럿 필름 삼아 제작된 초반 6화는 미야자키와 그가 거느리고 있던 정예 스태프들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걸작 에피소드로서, 『미래소년 코난』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사이에 미야자키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스스로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갔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명탐정 홈즈와 그의 단짝친구이자 조수인 왓슨이 허드슨 부인의 하숙집에 세 들어 살면서 런던 시민을 위협하는 온갖 범죄와 맞서 싸운다는 기본구도는 원작 소설과 같지만, 그 밖의 요소는 전부 이 작품만의 오리지널 설정. 특히 원작에서는 딱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았던 희대의 범죄왕 모리아티 교수를 뚜렷한 개성을 지닌 고정 악역으로 배치하여, 매회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는 점이 특이하다.

영국 현지 취재를 바탕으로 그려진 정밀한 배경미술, 미야자키 본인의 취향이 여실히 반영된 증기기관 메카의 액션,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맞물리며 펼쳐지는 슬랩스틱 개그,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하네다 켄타로의 서정적이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음악 등등이 멋지게 어우러져, 당시의 TV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상당히 높은 퀄리티를 이끌어내고 있다.


■ 더빙판 성우진의 위력

『명탐정 홈즈』가 『명탐정 번개』라는 제목으로 KBS2에서 방영된 것은 1980년대 중반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에서의 방영이 1985년에 끝났으므로 아마도 1985년 후반에서 1987년 사이의 어느 시점이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당시 녹화해 둔 비디오에 날짜를 적어두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주인공 번개(홈즈) 역은 엄주환 씨가 담당. 인생의 무게가 실려 있는 적당히 깊은 저음과 부드러운 톤이 인상적인 분으로, 애니와 외화를 가리지 않고 착실하게 실력을 발휘해 오신 분이다. TV 미니시리즈 『남과 북』에서 주인공인 어리 메인(패트릭 스웨이지)의 목소리를 담당하셨고, 1985년 당시 KBS1을 통해 첫 방영된 『스타워즈』에서 한 솔로(해리슨 포드)의 능청맞은 연기를 잘 소화하셔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애니 시청자들에게는 KBS2의 『출동 바이오용사』에 나온 발명천재의 흑인청년 아이큐원이 더 친숙할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대우비디오를 통해 출시된 후지-5 계열의 SF 애니 시리즈(『특수장갑부대 돌북』, 『지구방위군단 ⅩⅤ』, 『선더버드 2086』)에서도 주인공이나 해설자, 사령관 역을 맡아 멋진 연기를 보여주셨다. 지난 2003년에는 KBS에서 방영한 『반지의 제왕 ~ 반지원정대』에서 엘론드(휴고 위빙) 역으로 등장하여, 건재함을 과시하시기도 했다.

원판에서 홈즈를 연기한 히로카와 타이치로(극장판 『우주전함 야마토』 시리즈의 코다이 스스무, 『캡틴 퓨처』의 커티스 뉴턴)가 꽤 점잖고 귀족적이라 약간은 답답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인 데 비해(게다가 왓슨에게도 꼬박꼬박 존대를 한다!), 엄주환 씨의 번개(홈즈)는 훨씬 사람냄새가 나고 연기 폭도 넓다. 평소에는 피로에 찌들어 모든 게 다 귀찮은 듯한 목소리를 내다가도, 사건이 생기면 목소리 쫙 깔고 진지모드로 돌변하고, 때로는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여 무지하게 망가지는 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여자와 어린이에게는 기막히게 친절하고 신사다운 톤으로 자애롭게 말을 걸어주니, 주인공으로서는 그야말로 최강. 이후 SBS에서 『명탐정 셜록 하운드』라는 제목으로 방영해 준 버전에서는 황윤걸 씨(『유령 대소동』의 윈스턴, 『오거스 02』의 게라치 재상)가 하운드(홈즈)를 연기하셨는데, 이쪽은 원판의 중후함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엄주환씨의 번개만큼 친근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번개의 둘도 없는 단짝인 털보(왓슨) 역은 악역이나 노인 전문 성우로 다방면에서 활약하신 노 민 씨가 담당. 다소 촐랑거리고 덤벙대며 우왕좌왕하는 편이지만 사람 좋고 성실한 왓슨의 이미지를 잘 살리면서 특유의 개그 연기를 유감없이 보여주셨다. 이분은 『날아라 슈퍼보드』의 저팔계 역이 너무 잘 알려져서 그쪽으로만 이미지가 고정된 감이 없지 않으나, 사실 그보다 훨씬 다양한 작품에서 폭넓은 연기를 보여주신 분이다. 대영팬더에서 출시한 로봇만화 비디오에도 빠짐없이 등장하셨으니, 이분의 성함은 몰라도 목소리는 다들 한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2004년에는 극장용 국산 애니메이션 『날으는 돼지 해적 마테오』에서 스나우트 역으로 출연. 참고로 원판의 왓슨은 『철완 아톰』의 수염아저씨나 『철인 28호』의 오오츠카 서장으로 유명한 베테랑 성우 토미타 코우세이가 연기했다.

번개의 영원한 호적수이자 이 작품 전체에 활기를 주는 중요한 역할인 거이타(모리아티) 교수 역은 장정진 씨가 담당. 아시다시피 모리아티 교수는 이 시리즈 전체를 움직이는 엔진과 같은 인물로, 항상 자기의 천재적인 두뇌와 발명 솜씨를 뽐내며 갖가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동원하여 범죄를 저지르지만, 반드시 성공을 한 발 앞둔 시점에서 번개에게 뒷덜미를 잡혀 실패하고 마는 불쌍한 캐릭터이다. 그 범죄 동기가 세계 정복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저 ‘배불리 먹기 위해서’라는 게 상당히 현실감을 주는데, 공원 연못이나 템즈강에서 잡은 말라빠진 생선을 내키지 않는 얼굴로 구워 먹으면서 다음 범죄 계획을 짜는 모습에서는 왠지 모를 페이소스[哀愁]마저 느껴진다. 이러한 모리아티의 독특한 캐릭터와 장정진 씨의 국보급 목소리가 결합하여, 멋지고도 귀여운 악역인 ‘거이타’가 탄생한 것이다.

오오츠카 치카오가 연기한 원판 모리아티가 사악하고 교활하지만 다소 좀스러운 구석이 있는 ‘늙은 악당’인데 비해, 장정진 씨의 거이타는 훨씬 젊고 활력이 넘치며 변화무쌍한 캐릭터이다. 상황에 따라 부드럽고 멋진 저음과 돼지 목 따는 고음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장정진 씨의 연기력이 거이타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원판을 능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별개의 새로운 캐릭터를 창출한 것이다. 장정진 씨는 그 뒤로도 퀴즈게임 나레이션이나 각종 CM, 오락프로 출연 등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시며 한국 성우계의 대들보 역할을 해 오셨으나, 안타깝게도 2004년 10월에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떠나셨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 작품의 헤로인이자 번개 일당의 든든한 서포터이기도 한 천사부인(허드슨 부인)은 박영남 씨와 이진화 씨가 번갈아가며 담당. 박영남 씨는 주로 『날아라 슈퍼보드』의 손오공이나 『아기공룡 둘리』의 둘리 등 까불거리는 개구쟁이 주인공 목소리로 알려진 분이라, 이런 정통파 여성 캐릭터로서의 출연은 오히려 희귀한 편이다. 따라서 이분의 소년 목소리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를 가지고 화면을 지켜보았을지도 모르겠다. (필자야 그때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런 건 전혀 생각 안 하고 보았지만) 하지만 실제 작품을 보면 그러한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기막힌 호연(好演)을 보여주신다.

19세라는 설정상의 연령에 비해 다소 나이 먹은 듯한 음성이란 게 약간 걸리지만, 낭랑하고 힘이 넘치는 박영남 씨의 미성(美聲)을 듣다 보면 그런 건 이미 아무래도 좋다. 같이 연기하신 이진화 씨도 푸근하고 편안한 목소리이긴 하지만, 가사 만능에 마음도 넓고 액션까지 해치우는 미야자키 헤로인의 전형이라 할 만한 허드슨 부인을 소화하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던 면이 있다. KBS측 제작진도 그 점을 의식했었는지 천사부인이 메인으로 활약하는 에피소드에서는 박영남 씨가 천사부인을 맡고 이진화 씨가 게스트 캐릭터를, 그리고 그 외의 에피소드에서는 그 반대의 패턴으로 캐스팅을 하고 있다. 참고로 원판의 허드슨 부인은 『우주전함 야마토』의 모리 유키, 『시티헌터』의 노가미 사에코로 알려진 아사가미 요코가 연기했다.


■ 맺으며

『명탐정 번개』는 개인적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필자는 그전까지 단순명료하고 장난스런 분위기로 일관하여 그냥 머리를 비우고도 볼 수 있는 미국제 ‘카툰’에 익숙했던지라, 보다 현실에 가까운 분위기와 굴곡이 많은 스토리를 보여주는 일본 애니와는 도무지 친해질 수가 없었다.

그런 필자를 뒤늦게 ‘아니메’의 세계로 이끌어 준 작품이 바로 이 『명탐정 번개』였던 것이다. 미국제 ‘카툰’, 아니 일반 실사영화에도 뒤지지 않는 유쾌한 희극과 통쾌한 액션이 잔뜩 등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양한 게스트 출연자들을 통하여 표출되는 민중의 생계 문제라던가, 거이타 일당을 통하여 보여주는 밑바닥 인생의 애환 등등이 은근슬쩍 끼어들어가 있어서, 마음 편히 볼 수 있으면서도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명탐정 번개』가 필자에게 각별한 작품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원판 자체가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더하여 원판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면서도 우리나라의 어린 시청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더빙제작에 심혈을 기울인 KBS 스태프와 출연 성우진의 노력 덕분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 와서 보면 번역도 다소 어색하고 연기 면에서도 대사 처리를 잘못한 부분이 눈에 띄는 등, 허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열악한 방송 환경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너그러이 보아줄 수 있을 것이다.

멋진 더빙을 통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준 출연진과 제작진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블루레이 발매특별상영회 개최 기념으로 올려 봅니다. 공교롭게도 저 글을 쓰던 2005년경에 엄주환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더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by 잠본이 | 2008/03/30 21:13 | ANI-BODY | 트랙백 | 핑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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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나이브스 at 2008/03/30 22:08
개를 의인화 하다보니 후각, 청각에 대한 비약적 발달이 사건 해결을 하고

거기다 도구 없이 물기로 위기 모면도 많았군요....
Commented by 세바스찬 at 2008/03/30 22:16
몰랐던 사실들이 많군요. 성우들 중 두 분이나 돌아가셔서 안타깝기도 하고.. 허드슨 부인이 19살? (허걱)
글 읽다보니 더빙판이 더더욱 보고 싶은.. 상영회 못가서 아쉽네요 (털썩)
Commented by 리언바크 at 2008/03/30 23:47
허드슨 부인이 19살?
그럼 19살이 되기도 전에 그 숱한 일들을 다 겪었다는 건가요?
이 만화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ㅋ
Commented by rumic71 at 2008/03/31 01:14
주인공은 물론 모리아티죠.ㅋㅋ
Commented by 풍신 at 2008/03/31 04:52
개인적으로 증기기관이 엄청 멋지게 느껴졌었던 작품이죠. 배 타고 추격전 벌이는 장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Commented by 대마왕 at 2008/03/31 09:24
어릴때 저는 번개보다는 모리아티교수의 팬이었답니다~
역시....뭐든 방해하는 번개는 눈에 가시랄까....

ps. 번개가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바람의 방향을 파악하는 씬이 아직도 기억에 나는군요....
Commented by 음음군 at 2008/03/31 10:46
생각해보니.........이 구도가 '몬타나존스'로 그대로 전승된거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번개가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바람의 방향을 파악하는씬도 그대로 재현해 냈었죠.......<설마 오마쥬?>)
Commented by rumic71 at 2008/03/31 12:05
모리어티와 홈즈 둘 다 앞발가락(?)으로 바람 방향을 파악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둘 다 장갑을 끼고 있었던 것 같아서 고민중...(뭔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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