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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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는 누구?
원제: Whose Body?
저자: 도로시 리 세이어즈
출판사: 시공사

평범한 건축가의 집 욕조에서 신원불명의 중년남자가 알몸의 시체로 발견된다. 남겨진 단서는 금테 코안경과 사슬 뿐. 소문난 애서가이자 범죄수사가 취미인 명문귀족의 아들 피터 윔지 경은 즉각 수사에 착수한다. 경찰은 같은 날 실종된 유태인 사업가가 문제의 시체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하지만 조사 결과 시체는 사라진 사업가와 전혀 별개의 인물로 밝혀진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점점 미궁 속으로만 빠져들어가는 이 사건을 수사하던 피터 경은 그 이면에 숨어있는 인간의 추악한 일면과 마주하게 되는데...
세계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시기를 무대로 애거서 크리스티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영국의 추리작가 도로시 세이어즈의 첫 번째 추리소설이자 그녀의 간판 캐릭터인 귀족출신 아마추어 탐정 피터 윔지 경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작가 본인은 시, 수필, 신학논문 등 다양한 분야의 문학작품을 배출했고 단테의 <신곡> 번역을 자기의 최고 업적으로 생각했지만, 오늘날의 독자들은 그녀를 추리소설의 황금기를 개척했던 거장들 중 한 명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

본 작품의 가장 특이한 점은 분명 살인이 발생했고 시체도 발견되었지만 도무지 시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어서 범인의 정체나 동기도 밝혀내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시체와 함께 발견된 단서들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서로 연관성도 없어 보여서 수사에 혼선만을 더할 뿐이다. 피터 경은 이런저런 추리와 삽질을 거듭한 끝에, 결국 진짜로 중요한 것은 시체의 정체가 아니라 그 시체가 거기에 있었어야만 하는 필연성과 그 시체를 거기에 갖다놓은 범인의 의도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시체의 발견 그 자체가 다른 사건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어 더 큰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책략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트릭은 처음 발표되었던 1920년대의 시각으로 보면 탁월하게 보일지 몰라도, 닳고 닳은 요즘 추리독자의 눈으로 보면 진부하고 빤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범인의 동기나 행동 배경,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여건 등등이 거의 중반쯤에 다 밝혀진 거나 마찬가지고 나머지 부분은 '어떻게 이자를 눈치 안 채게 함정에 끌어넣을까'라는 데 소비하기 때문에 약간 긴장감이나 속도감이 떨어진다는 문제도 있다. 상당한 시간 동안 피터 경을 고민하게 만들었던 코안경의 수수께끼에도 너무나 허탈한 해답이 준비되어 있어서 다 읽고 나면 힘이 쭉 빠진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도로, 사건을 추적하는 피터 경이나 그 주변인물들, 그리고 수사 도중에 만나는 여러 인물들의 독특한 성격이 서로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재기발랄한 희비극은 이 소설이 나온 지 80년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선하고 재미난다. 20세기 초의 영국 사회를 가감 없이 묘사하면서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 드라마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 (이 점은 동업자이자 경쟁자인 애거서 크리스티와도 통하는 데가 있지만, 크리스티가 중산층 사회를 중심으로 꽤 스트레이트한 감성의 인물들을 묘사하는 데 비해 세이어즈는 훨씬 완곡하고 세련된 수법으로 귀족층과 하류층을 아우르는 넓은 계층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 책 한 권만 갖고는 정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개그센스 쪽도 어째 세이어즈가 더 뛰어난 것 같다 OTL)

현학적이고 유머러스한 화법으로 사람 약을 슬슬 올리면서도 수상한 점은 절대 놓치지 않는 날카로운 안목의 소유자 피터 경은 겉으로만 보면 그냥 우아하고 럭셔리한 생활을 즐기면서 경찰들 일에 참견하고 다니는 한량으로밖에 비치지 않지만 참전 경험으로 인한 신경증을 앓는가 하면 작위를 물려받은 형에 대한 '둘째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모습을 슬쩍 내비치기도 하는 등 꽤 복잡한 성격을 보여준다. 빈틈없이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면서도 가끔씩 주인에 대한 신랄한 비평을 일삼는 충직한 집사 번터나, 사람들 앞에서는 그냥 마음씨 좋고 가끔씩 횡설수설하는 귀부인 티를 내지만 사실은 아들 못지 않은 배짱과 두뇌를 지닌 피터 경의 어머니, 그리고 추리력은 피터 경보다 떨어질지 몰라도 철저한 책임감과 행동력으로 그를 서포트하며 공권력과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파커 형사 등등 조연들의 매력도 강렬하다. (사실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별로 등장 장면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피터 경과의 대치장면 하나로 엄청난 포스를 발하는 모 아저씨였지만 자세한 건 천기누설이 되니 생략)

재미가 떨어질 만하면 군데군데 끼어들어 독자에게 폭소나 미소를 선사하는 재치 넘치는 장면들도 많아서, 전체적으로는 상당히 '영국적'으로 투박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비유하자면 좀 텁텁한 파운드 케익을 커피와 함께 먹다 보니 빵 중간 중간에 숨어있는 과일이나 견과류의 맛이 의외로 뛰어나서 빵 전체에 대한 호감도도 한 단계 올라가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

학교 다닐 때 이후로 꽤 오랜만에 정통 추리물을 읽은 셈은데,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런 독서를 할 수 있어 다행스럽다. 좋은 책을 리뷰할 기회를 주신 이글루스와 시공사에 감사드린다.


렛츠리뷰
by 잠본이 | 2008/03/09 20:54 | 대영도서관 | 트랙백(1) | 핑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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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잠보니스틱스 at 2008/03/09 22:07

제목 : 명장면은 어디?
는 전체적으로 보면 그냥 평범한 추리물이지만 군데군데 장면이나 대사들이 꽤 인상적인 게 많아서 두 손으로 꼽기도 어려울 정도다. 이를테면 게임과 실제상황의 차이에 대해 피터 경을 깨우쳐주는 파커의 멋진 충고(사실 이 소설에서 가장 정신 제대로 박힌 인물은 파커뿐인 것 같다)라던가, 주인 없는 자리에서 다른 집 하인들의 환심을 사서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은근슬쩍 주인 뒷담화를 하거나 주인의 술을 꺼내마시는 번터의 뻔뻔함이라던가, 피터 ......more

Linked at EBC (Egloos Broa.. at 2008/03/2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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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소드 at 2008/03/09 21:30
정통 추리물이라...
오랜만에 셜록 홈즈나 다시 볼까 싶군요.
Commented by kelly at 2008/03/09 22:26
님이 wikepedia댓글을 다신 그 글 이후에 제가 번역해놓은 부분이 있는데 놓치셨군요 ^^

..Sayers began working out the plot of her first novel sometime in 1920–1921. The seeds of the plot for Whose Body? can be seen in a letter Sayers wrote on January 22, 1921:

"My detective story begins brightly, with a fat lady found dead in her bath with nothing on but her pince-nez. Now why did she wear pince-nez in her bath? If you can guess, you will be in a position to lay hands upon the murderer, but he's a very cool and cunning fellow..." (p.101, Reynolds)
세이어즈는 첫소설의 플롯에 대해 1920-1921년 경에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시체는 누구?]의 시작인데, 이에 대해선 그녀가 1921년 1월 22일에 쓴 편지에서 읽을 수 있다.



"나의 탐정소설은 뚱뚱한 여인네가 코안경만 걸치고 나신으로 욕조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가볍게 시작된다. 왜 그녀가 욕조에서 코안경을 끼고 있었는지 당신이 추적을 하는 순간 살인자를 뒤좇게 된다. 그러나 살인자는 매우 냉정하고 교활한 사람이다...."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8/03/09 22:34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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