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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사(원작판)
이형(異形)의 존재와 인간이 공존하는 ‘또 하나의 생태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
― 『충사(蟲師)』 / 우루시바라 유키 ―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시대의 일본. 그곳에는 동물도 식물도 광물도 아닌 기묘한 존재들이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마치 유령처럼 형체도 흔적도 없지만 가끔은 주변 환경에 작용하여 여러 가지 기괴한 현상을 일으키는 그들을 사람들은 ‘녹색의 존재’ 혹은 ‘벌레’라고 부른다. 전국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그러한 ‘벌레’들을 전문으로 연구하여 대처법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바로 ‘벌레선생’ 즉 ‘충사’인 것이다. 다종다양한 벌레들과 그들이 일으키는 여러 가지 기묘한 작용에 따라, 대처하는 방법도 무궁무진. ‘충사’의 한 사람인 주인공 ‘깅코’는 오늘도 새로운 ‘벌레’의 소식을 쫓아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닌다. 가는 곳마다 그를 맞이하는 것은 ‘벌레’ 때문에 고민하거나 고통받는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들려주는 가슴 뭉클한 사연들…

『충사』는 우루시바라 유키[漆原友紀]의 만화작품으로, 1999년부터 코단샤[講談社]에서 발행하는 「월간 애프터눈」에 격월간 연재되고 있다. 단행본은 애프터눈 코믹스에서 제7권까지 나온 상태이며, 한국판은 세주문화에서 4권까지 나왔다가 세주의 도산으로 인해 대원씨아이로 판권이 넘어가, 다시 1권부터 새로 번역되어 7권까지 간행 중이다. ‘벌레’라는 특이한 존재를 중심축으로 하는 기묘한 세계관과, 마치 털붓으로 그린 듯한 수묵화풍의 선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그림체, 그리고 이형의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와 희망을 보여주는 깊이 있는 스토리로 인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2005년에 전 26부작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후지TV계 네트웍을 통해 방영되었으며, 2007년 봄에는 『아키라』로 유명한 오오토모 카츠히로[大友克洋]가 감독을 맡은 실사영화로 개봉될 예정이기도 하다. (『메종 드 히미코』 등으로 유명한 오다기리 죠가 주인공 깅코를 연기한다.)

{*이 글을 쓴 이후 한 권이 더 추가되어 한국어판 8권이 발매 중이다. 일본에서는 코믹스와 같은 판형으로 팬북이 나오기도 했으나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는 않았다. 영화는 예정대로 개봉되었지만 원작과 여러모로 달라진 탓에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듯하다.}

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는 설정은 바로 ‘벌레’의 존재다. 이 세계에서의 ‘벌레’는 그 이름과는 달리 곤충이나 파충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인식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보다 근원적인 형태의 생명체를 뜻한다. 물론 그 존재양식 자체는 옛날 전설이나 민담에 나오는 요괴나 유령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새로울 것은 없지만, 그러한 이형의 존재들을 ‘생명의 또 다른 형태’로 재정의하여, 인간의 감각에는 잡히지 않지만 분명 다른 생물들과 같은 세계에 공존하는 ‘생태계의 일부’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여기에 나오는 ‘벌레’들은 본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존재로, 어디까지나 주변 환경에 적응하여 서식할 뿐이며, 인간들이 체험하는 괴현상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부작용에 ‘우연히’ 말려들어 생긴 것이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극중 인물들은 ‘벌레’가 일으키는 여러 가지 작용으로 인해 기쁨과 슬픔이 뒤범벅된 여러 가지 감정에 빠져들고, 때로는 생명이나 인생 전체를 희생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처하지만, 그 원인은 인간의 가치 판단을 초월한 ‘시스템’에 의해 아무런 악의 없이 돌아가는 생명의 흐름에 있는 것이다. 이야기 자체는 다분히 회고적인 풍경 속에서 벌어지는 이생물계 판타지에 가깝지만, ‘벌레’의 설정이나 그에 대처하는 깅코의 이지적이고 분석적인 자세는 이 작품을 하나의 SF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마을에 기묘한 사건이나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가거나 혹은 의뢰를 받고 찾아온 깅코가 그 사건에 도전하여, 마치 괴질을 치료하는 의사나 범인을 쫓는 탐정처럼 집요하게 정보를 수집한 뒤에 그 정보와 자기가 축적한 지식을 바탕으로 원인을 밝혀내고 사건을 해결하는, 미스터리 드라마의 구조로 되어 있다. 깅코는 우선 원인이 ‘벌레’인가 아닌가를 판별하고, 만약 ‘벌레’가 원인이라면 대체 어떤 ‘벌레’이며, 그들의 생태는 어떠한지 알아낸 뒤에, 그들을 퇴치하거나 달랠 방법은 없는지를 모색한다. 그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의 숨겨진 사연이나 애달픈 과거가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연들은 대체로 사건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는 ‘벌레’의 생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결국 수수께끼를 풀어낸 깅코는 ‘벌레’를 처리하여 사람들의 삶(혹은 그와 연관된 주변 환경)을 정상으로 되돌리고, 마을 사람들도 깅코와의 교류나 ‘벌레’를 처리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전과는 다른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 조금씩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작품 안에서는 ‘벌레’ 역시 자연의 일부인 만큼 무조건적인 퇴치나 박멸의 대상으로 나오지는 않으며, 그들의 작용이 반드시 인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다. 인간도 ‘벌레’도 서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 주변을 바꾸고 영향을 주고받을 따름이지만, 냉엄하고 때로는 부조리하기까지 한 자연(물론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연’과는 좀 다르지만)의 법칙이 생각지도 않은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본 작품도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은 않는다. 깅코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벌레’의 습성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대로 살다가 파멸의 길을 걷는 사람도 나오고, 이대로 두면 위험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다른 절실한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극적인 결말을 택하는 사람도 나온다. 또한 애초부터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깅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못한 채 쓸쓸하게 끝을 맺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러한 불가항력에 대한 솔직한 묘사와 결코 전능하지 않은 주인공의 갈등, 그리고 다양한 입장에 놓인 게스트 캐릭터들의 인간적인 반응 덕분에 이 작품은 단순한 변종 퇴마물에 머물지 않고 보다 깊이 있는 ‘인간 드라마’로서 당당하게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깅코가 ‘벌레’를 대하는 태도 역시 남다른 데가 있다. 대부분의 충사들은 사람들을 구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벌레’를 퇴치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지만, 깅코는 그들과 달리 보다 대국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편이다. 단순히 ‘벌레’를 몰아내는 것만으로 해결될 일이라면 망설임 없이 해치우지만, 상황이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을 경우에는 한 발짝 물러서서 ‘좀더 나은 해결책은 없을까’라는 고민을 거듭한다. 때로는 ‘벌레’가 존재함으로 인해 행복을 얻는 사람들도 있고, ‘벌레’들 자신도 엄연히 살 권리를 지닌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태도 때문에 사람들과 충돌하거나 비극적인 결말을 막지 못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과 ‘벌레’가 결코 상극인 존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서로에게 본의 아니게 악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적당히 균형을 이루고 서로를 간섭하지 않으며 자연 속에서 공존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깅코의 태도나 ‘벌레’에 숨겨진 ‘또 하나의 자연’이라는 함의(含意)를 잘 생각해 보면, 이 작품은 오컬트의 형식을 빌린 에콜로지계 SF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Article (C) ZAMBONY 2006.12.24.
※JoySF 회지 준비호에 게재한 글.
by 잠본이 | 2007/07/22 01:21 | 만화광시대 | 트랙백 | 핑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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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半道 at 2007/07/22 06:36
심도있는 리뷰에 감탄했습니다.
솔직히 이정도로 쓸수있으면 좋으련만, 부럽습니다.
Commented by 이피 at 2007/07/22 10:09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Commented by 사각사각 at 2007/07/22 10:22
평소 제가 충사를 읽으며 하던 생각이나 충사를 읽은 분들의 전체적인 감상요소도 다 들어있는 것 같군요 좋은 리뷰입니다
Commented by 영원제타 at 2007/07/22 19:16
제목만 복 그냥 넘겼는데, 깊은 내용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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