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바벨2세>에 등장하는 요미의 부하들이 가장 그럴 듯한 악당들로 여겨졌다. 괜히 이상망칙한 센스의 제복이나 재질불명의 유니폼을 맞춰입고 나오는 건 너무 설득력이 떨어지고 자칫 잘못하면 유치찬란한 인상만 주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냥 동네 양아치처럼 아무렇게나 걸쳐입고 건들거리며 몰려다니는 악당들도 영 절도가 없어 보이고 통일감이 떨어져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요즘은 어느 쪽이나 재롱만 잘 떨면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평범한 양복 정장에 해골마크 넥타이로 액센트를 가미한 요미의 부하들은 전체적으로는 그런대로 현실감이 풍기면서도 그 해골마크나 그들이 숨기고 있는 특수능력 덕택에 초현실적인 매력 또한 겸비하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좀더 나이가 들면서 다른 요코야마 작품을 찾아봄에 따라 그들의 계보는 <철인28호>의 갱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특수능력 또한 미국의 초능력물보다는 닌자의 비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양복 정장으로 쫙 빼입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악의 조직이라는 컨셉이 주는 아련한 매력은 여전히 강렬하다. (정체를 숨길 필요가 있을 때에는 그냥 넥타이만 보통 것으로 바꿔 매고 다니면 되고, 신비감을 줄 필요가 있을 때에는 두건이나 색안경만 씌워주면 다 해결된다. 이 어찌 편리하지 않을소냐) 요코야마 최후의 SF작품인
<마즈>에서도 6신체 조종자들은 검은 양복으로 통일된 패션을 보여주었고, 이 센스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는 이마가와 감독 역시 OVA판
<자이언트 로보>에서 BF단 주요인사 대부분(쥬죠지나 도키같은 일부 제외)의 의상을 양복 정장으로 어레인지하는 정성을 보여주었다.
만화가가 되기 전에 평범한 은행원으로 일하며 권태로운 일상을 보냈다는 요코야마 선생의 이력을 생각해 보면 어찌하여 하고 많은 옷을 다 놔두고 양복 정장이 '악의 유니폼'으로 등극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구속의 상징인 양복을 입고 숨은 본능을 해방시키는 '악의 길'로 들어서서 폭주하는 쾌감을 대리체험할 수 있고, 어린이의 입장에서는 위압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가 곧 악의 제국으로 구현화되어 자신을 덮쳐오는 듯한 스릴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내가 바로 그 유니폼을 입고 일터에 나가는 입장이 되었으니 참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골마크 넥타이를 일부러 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화산고>의 초능력 교복액션과 <매트릭스>의 스미스 대부대를 결합하여 바벨2세 실사화를 꾀하는 용자는 정녕 없단 말인가? 어설픈 CG와 늘어지는 줄거리로 죽도 밥도 안된 철인28호 실사판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만들기 쉽고 재미도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주인공은 장혁보다는 좀 미모가 되는 녀석으로 캐스팅해야겠지만 촬영기술 자체는 꽤 잘 갖춰진 셈이니...;;;)
※관련:
아저씨 (잘 그리는) 만화가를 찾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