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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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 40년
저자: 변영로
출판사: 범우사 (범우문고 020)

일제시대부터 해방 후에 걸쳐 시인, 수필가, 영문학자, 신문기자, 대학교수로 일세를 풍미했던 문필가인 수주(樹州) 변영로(1898~1961)의 수필집. (한국의 젊은이라면 중고교 교과서를 통해 한번쯤은 만나게 되는 시 <논개>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책이 다른 수필집들과 구별되는 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모든 이야기가 술(酒)과 관련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대부분의 내용이 저자의 술에 얽힌 실수, 추태, 발광, 개망신, 기타 여러가지 민망한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은근히 술을 좋아했던데다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아버지의 음주 조기교육까지 받았고 타고난 건강체질 덕분에 술을 아무리 마셔도 제정신을 잃고 난동을 부릴지언정 속탈이 나거나 내장이 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저자의 약 40여년에 걸친 음주편력을 기술한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제목에 사용된 명정(酩酊 ; drunkenness)이란 단어 자체가 '술에 취하여 대뇌의 정신기능에 대한 자제력을 잃은 상태'를 뜻한다 하니 할 말 다했다.)

저자의 고약한 음주습관과 폭넓은 교우관계 덕택에, 이 책에 기술되는 경험담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이 많다. 취한 상태에서 노상방뇨를 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걸려서 곤욕을 치를 뻔한 이야기라던가, 친구와 대작하다가 둘 다 취해서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은 나머지 저자가 친구를 2층 창문 아래로 집어던져 살인이 날 뻔한 이야기, 대취하여 전차를 타고 귀가하는 도중에 좀더 취한 동행인이 건너편에 앉은 건달들에게 시비를 거는 바람에 재빨리 동행인을 먼저 다른 차에 태워 보내고 자기 혼자 남아 건달들과 일당백의 한판승부를 벌인 이야기, 술에 취한 김에 충동적으로 열차를 잡아타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평양에 올라갔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귀성한 이야기 등등 기상천외하지만 실제로 일어나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경험들이 저자의 물 흐르는 듯한 필치를 통해 사정없이 펼쳐진다.

때로는 도가 지나쳐서 주변 사람들에게 크나큰 민폐를 끼치고 사고를 내기도 하지만, 결코 굴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며 유쾌하게 세상을 즐기는 저자의 뻔뻔한 자신감은 꽤나 감명깊다. (아마 실제로 이사람에게 당한 당사자들은 아주 이를 바득바득 갈며 분노를 삭이거나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겠지만서도;;;) 혹자는 이 수필들에 나타난 기행(奇行)들을 식민지 시대와 불완전한 해방이라는 어지러운 역사를 헤쳐나가며 어쩔 수 없이 술로 울분을 달래야 했던 당시 지식인의 비뚤어진 한풀이로 해석하기도 한다. (현진건의 단편 <술 권하는 사회>에서 비극적인 아이러니로 그려냈던 그 정서를 반대로 해학을 통해 전개했다고나 할까...) 무슨 변명을 해도 내 눈에는 그냥 술버릇 나쁜 개망나니 영감이 글재주 하나를 방패 삼아 신나게 자기변명을 해대는 걸로밖에 안 보이지만 뭐 그건 그거고.;;;

평소에도 주도(酒道)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재미있는 책까지 권해주신 아버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PS. 사실 이 책의 진정한 교훈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1) 건강하기만 하면 무슨 일을 벌여도 살아남는다 (-_-)
(2) 웬만큼 깽판을 쳐도 빽이 든든하면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다 (-_-)
by 잠본이 | 2006/05/05 15:50 | 대영도서관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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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에버마인드 at 2006/05/05 16:06
취중에 백주 대로에서 옷을 모두 벗어던지시는 바람에, 우리나라 최초로 신문 보도된 스트리킹(...) 사건의 주인공이 되셨다는 그 문인이, 혹시 변영로 선생이었던가요?;;; 언뜻, 고교 문학 시간에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 기억이...;;;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6/05/05 16:13
친구 세명과 함께 들놀이 나가서 퍼마시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는 바람에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돌아오다가 옷이 방해된다고 다 찢어버리고 맨몸으로 길거리에 매여 있는 소를 훔쳐타고 대로로 진입하려다 실패한(...) 이야기는 있는데 그것과 같은 얘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功名誰復論 at 2006/05/05 17:11
술버릇 개망나니... 에 동감입니다. 워낙 저 시대에 괴걸이 많지만 이분은 정말.
Commented by euphemia at 2006/05/05 23:33
으아, 이거 너무 좋아요. 중학교 때였나 처음 읽고서 진짜 '.......'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술버릇 나쁜 개망나니 영감이지만 그래도 귀여우니 됐어요. 저 소 타는 얘기가 제일 유명하지 않던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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