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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백수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209 '만화 속 백수 이야기'
저자: 김성훈
출판사: 살림

흔히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지 않고 놀고먹는 건달'을 의미하는 백수라는 단어는 한국사회의 변화와 함께 본래 의미를 떠나서 보다 폭넓고 다양한 경우를 포괄하는 일반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IMF사태 이후 청년실업과 만성적 불경기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면서 백수는 감춰야 할 사회악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생활의 일부분으로 떠올라, 백수라는 단어나 그 단어가 지칭하는 계층에 대한 사회적 함의와 사람들의 태도도 미묘하게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본서는 그러한 '백수'라는 계층과 그에 못지않게 우리 사회에서 천대받아 온 예술장르인 '만화'를 연결지어, 196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백수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왔고 만화에서는 그러한 백수의 세계를 어떻게 직/간접적으로 묘사해 왔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1960년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피폐한 시기였기에 전국민이 하루 하루의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만 했고, 그런 가운데 백수라는 존재는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한 낙오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지배하는 중심 정서는 일그러진 세상과 자신의 처절한 운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분노'와 '울분'이었으며, 그러한 정서는 박기정의 <도전자>에서 권투에 입문하는 재일교포 주인공의 피튀기는 싸움을 통해 표현되었다.

1970년대는 군부독재 하에 근대화된 국가의 기반을 다지면서 경제성장을 위한 물적 토대를 마련해나가는 개발의 시대였기에 모든 이들이 단순한 생존의 차원을 넘어 '나라'라는 더 큰 틀을 키워나가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자신을 희생해야만 했고, 그렇기 때문에 할일 없이 밥만 축내는 백수들은 눈치 하나로 버텨나가며 대본소나 만화가게 같은 자기들만의 문화공간에 은둔하여 무료한 일상을 보내야만 했다. '가방끈'과는 거리가 먼 그들을 위로해 주었던 것은 이상무의 '독고탁'처럼 가난한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삶을 이어나가는 투지의 캐릭터들과, 길창덕의 '꺼벙이'처럼 모든 것을 웃음으로 승화시켜 사람들의 답답한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재치의 캐릭터들이었다. (초등학생인 꺼벙이가 '백수'에 해당되는지 어떤지는 솔직히 좀 논란거리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저자는 광범위한 의미의 백수로 보고 있는 듯하다.)

1980년대는 군부독재의 광풍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사회과학에 의한 역사의 재평가가 시작되었고 그동안 개발과 발전의 이름 아래 무시되어왔던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민주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백수들은 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의를 손에 넣게 되었으며, 내부적으로도 대학생 이상의 고학력층 백수나 결혼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새 길을 모색하는 여성 백수 등등 다양한 계층으로 세분화되었다. 이 험한 시기를 광기어린 열정과 카리스마로 헤쳐나갔던 캐릭터가 이현세의 '오혜성'(까치)이고, 반대로 갑갑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자신의 본능에만 충실함으로써 오히려 돌파구를 바라는 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캐릭터가 강철수의 '김달호'(발바리)였던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백수의 위상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80년대에 시작된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세상은 하루가 멀다 하고 놀랄 만한 사건, 사고로 들썩거렸다. 70~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청춘의 첫 테이프를 끊게 된 아이들이 백수의 대열에 편입되면서 백수계에도 세대교체가 일어났고, 사회의 격변에도 불구하고 무엇 하나 좋게 바뀌지 않는 암담한 현실과 그들의 이상이 충돌하면서 그들은 나아갈 목표를 잃은 채 방황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박흥용의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에서는 외부적인 투쟁을 넘어서 자기 속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칼잡이로서의 백수'상이 소개되었고, 허영만의 <비트>에서는 낭만을 잃어버린 채 일류병에만 사로잡혀 황폐해져가는 현실을 개탄하는 '낭만 백수'상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인 2000년대, IMF사태 때문에 이전에는 미미하게만 인식되었던 '실업자'라는 존재가 갑자기 대량으로 증가하여 기존의 '본래부터 직업이 없었던' 백수군에 편입됨으로써, 백수는 일상 생활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친숙한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제 백수는 타인의 문제가 아닌 나 자신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고(보편성), 여유로움과 가능성을 지닌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받아들이게도 되었으며(특수성), 전통적인 의미의 백수건달이나 실업자 등은 물론 훨씬 더 다양한 계층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으로 진화하게 되었다(계층성). 저자는 이러한 '긍정적인 백수'의 전형을 윤태호의 <발칙한 인생>에 등장하는 '무한한 열정과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매진하면서 결국 그 과정에서 다른 (백수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신세대 백수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앞으로도 백수라는 계층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만화라는 장르도 어떤 식으로든 변신을 거듭하면서 생명력을 이어나가게 될 것이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듯하면서도 실은 의외로 밀접한 연결고리가 존재하는 이 두 요소를 잡아내어 한국 현대사와 함께 양자의 변화를 짚어나가는 저자의 노력은 특기할만하다. 여전히 경기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생각하면 저자가 제창하는 '자유로운 백수'상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 혹은 개념으로서 얼마만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기기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러한 색다른 문제제기가 가능하게 된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그만큼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by 잠본이 | 2006/04/30 00:57 | 대영도서관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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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oldman at 2006/04/30 06:26
흥미로운 주제로군요 ~
나중에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Commented by 깃쇼 at 2006/04/30 21:12
살림지식총서 시리즈가 꽤 흥미롭더라구요. 이 책도 읽어봐야겠습니다 :)
Commented by hansang at 2006/05/01 21:19
살림지식총서... 책에 따라 편차가 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Commented by 실꾸리 at 2008/09/17 10:40
소설가 한수산의 자서전에서 본 내용인데요..연애 시절 아내에게 감명깊게 읽은 책이 뭐냐고 했더니 "박기정의 [도전자] 너도 읽어 봐." 하고 대답을 했답니다...순수한 문학 청년은 좀 충격을 받았고, 똑똑하고 도발적인 그 아내와 결혼을 했다는군요... 그거 읽고, 이 만화 한 번 보고 싶었는데, 구할 수가 없더군요...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8/09/17 21:48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2090074
2005년에 복각되긴 했는데 지금도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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