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The Mark of Zorro저자:
존스턴 매컬리출판사:
황금가지1800년대 초 스페인 치하의 캘리포니아 지방, 포악한 총독의 학정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해 홀연히 등장한 복면의 의적 '조로'가 불의를 자행하며 폭리를 취하는 악당들을 응징하고 빼앗은 재화를 백성들에게 나눠 준다. 조로가 사사건건 자신의 일을 방해하자 분노한 총독은 조로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내건다. 한편 캘리포니아의 최고 부자 돈 알레한드로 베가의 아들인 돈 디에고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신부감을 물색하다 몰락 귀족인 돈 카를로스 풀리도의 아리따운 딸 롤리타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무기력하고 게으른 돈 디에고의 성품에 질려 버린 롤리타는 그의 청혼을 거절하고 오히려 불쑥 찾아와 사랑을 고백한 조로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의 대장 라몬도 역시 롤리타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겨 그녀에게 저속한 행동을 일삼다가 조로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한다. 이 일로 인해 롤리타에게 앙심을 품은 라몬은 그녀의 가족을 반역 혐의로 고발하는데...
검은 망토에 검은 복면 차림으로 나타나 화려한 검술과 재빠른 판단으로 악인을 응징하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리는 민중의 영웅
조로. 그의 이야기는 이미 무수한 영화나 만화 혹은 TV드라마로 제작되어 뻔질나게 공개되었고,
<시민 쾌걸> 같은 유쾌한 패러디를 낳을 정도로 친근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올해에도 안토니오 반데라스 주연의 영화
<레전드 오브 조로>가 개봉하여 새삼스럽게 조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한
조로 열풍의 원천이 된 것이 바로 이 존스턴 매컬리의 원작소설 제1탄(1919년작)으로, 이 소설에는 후대의 조로 작품들뿐만 아니라 비슷한 종류의 히어로 작품들이 참조했을법한 요소들이 잔뜩 들어가 있다. 압제에 신음하는 민중을 돕는 정체불명의 영웅과 그에게 매료된 정숙한 처녀, 사악하고 비겁하지만 주인공보다는 아둔한 악당들, 아슬아슬한 모험과 숨가쁜 추격전까지,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황금패턴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사실 이러한 요소들은 이전의 권선징악을 모토로 하는 기사 이야기나, 선악 구분을 떠나 파란만장한 모험을 다루는 데 중점을 둔 피카레스크(악한)소설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빼어난 이야기꾼인 저자 매컬리의 손에 의해 보다 단순하면서도 신선하게 다듬어져,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조로의 이야기가 사실상 '로빈 후드'에서 비롯된 유럽식 의적 이야기의 현대적 변용이면서도 단순히 그러한 범위에만 머물지 않고 독자적인 하부장르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은 나름대로 독특한 무언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인데, 그러한 특징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히어로의 이중성'이다.
로빈 후드를 비롯한 전통적인 히어로는 실제 정체와 대외적으로 알려진 신분 사이에 별다른 차이점 없이 일관성 있는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간혹 남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다른 사람 행세를 하거나 위장 신분을 만들어내는 일은 있어도, 그것은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일시적인 위장에 지나지 않았고 작품 전체를 통해 그러한 신분을 계속 써먹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조로는 이러한 관행을 깨고 보통때의 모습과 히어로로서의 모습이 180도 다른 2중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의외로 복잡다단한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돈 디에고 베가는 시와 음악에만 심취하여 한가롭게 지내는 부잣집 외동아들로, 폭력이나 싸움질이라면 질색을 하고 말을 타고 달리는 것도 피곤해하며 여자에게 청혼하는 것도 아버지의 강요로 마지못해 나서는 귀차니즘의 화신이다. 하지만 검은 복면을 쓰고 조로로 변신하는 순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가 믿는 바를 관철하려 하는 행동력과 사랑하는 여성에게 당당하고도 로맨틱하게(다소 뻔뻔스러울 정도로) 구애하는 용기를 지닌 천하무적의 영웅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중생활 히어로의 패턴을 매컬리가 '발명'해낸 것은 아니다. 이런 패턴의 창시자로 거론되는 작품은 1905년에 에무스카 오르치 백작부인이 발표한 모험소설
<스칼렛 핌퍼넬>('장미 의적단' 혹은 '빨강 별꽃'이란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된)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평소에는 유약하고 무능한 귀족 한량으로 지내다가 유사시에는 신비스런 비밀조직의 우두머리로서 위험한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극히 대조적인 두 가지 면을 번갈아가며 연기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다만 이 소설의 경우에는 주인공이 시각적인 변장이나 위장보다는 '소문'이나 '비밀스런 편지 연락' 등의 추상적인 수단에 의존하기 때문에, 조로와 같은 비주얼 면에서의 특징은 찾아볼 수 없다. (편지를 봉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별꽃 도장이 박혀 있는 반지가 유일한 트레이드마크) 따라서 매컬리는 <스칼렛 핌퍼넬>이 아직 덜 무르익은 형태로 제시한 이중생활 히어로의 틀을 보다 알기 쉽게 단순화시키고 눈에 보이는 시각적 특징을 가미하여, 불세출의 캐릭터 조로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줄거리 자체는 예전의 아동용 세계명작 버전 등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완역본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나니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권선징악을 표방하면서도 군데군데 묻어나는 남미 원주민에 대한 편견이나 비뚤어진 계급의식, 낭만적이지만 어째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기사도 정신 등등이 출판된 시대를 실감케 한다. 등장 인물들의 과장된 감정 표출이나 신소설을 방불케 하는 괴악한 대사 센스도 웃음을 자아낸다. 일부 인물들의 행동이 너무나 충동적이고 무계획적이라 저래도 괜찮은가 싶은 부분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특히 조로를 잡겠노라고 핑계를 대고 돈 알레한드로의 집에 쳐들어와 신나게 술판을 벌이다 진짜 조로가 짜자잔 하고 나타나 '총독의 압제를 바로잡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연설을 하자 '좋았어!'하고 의기투합하는 귀족 자제들의 일관성 없음에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가면놀이를 즐기는 우리의 부잣집 도령 돈 디에고의 명물행각(?)도 볼만하다. 만사가 귀찮다는 식으로 무성의하게 대응하며 조용히 예술이나 즐기고 살았으면 하는 태도로 일관하면서도 은근슬쩍 어딘가가 비비 꼬인 대사를 내뱉고 때로는 무력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등 의외로 복잡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조로라는 것을 알고 나서 조로일 때의 행동과 디에고일 때의 행동을 비교해 보면 대조적인 듯 하면서도 묘하게 일관된 부분이 느껴져서, 가면 히어로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어찌보면 이 작품은 조로가 압제를 타파하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돈 디에고가 자신의 분열된 인격을 인식하고 재통합하는 과정을 그린 사이코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 후반부로 가서는 정치적 혁명이나 민중의 구원보다 마을 사람 전체를 앞에 놓고 벌어지는 조로의 커밍아웃(?)이 더 중요한 이벤트로서 부각되는 걸 보면 그런 의심은 더더욱 짙어진다. (그에 비해 악당들 중에서 진짜 응징이라 할 만한 응징을 받은 것은 감히 롤리타 아씨에게 손을 댐으로써 조로의 개인적인 원한을 산 라몬 대장 한놈뿐이고 총독과는 내키지 않는 타협으로, 뚱땡이 곤잘레스와는 '좋은게 좋은거지'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는 결말로 일단락된다. 결국 스페인 총독부의 지배에서 지역유지들의 자치로 바뀐 것 뿐이니 원주민이나 하층민들에겐 달라질 게 없잖아!)
원래 조로의 가면이 이후의 영화나 만화 등으로 익숙해진 '눈과 머리털만 덮어 가리는 바가지 가면'이 아니라 '얼굴 전체를 덮어싸는 은행강도식 복면'이었다는 것도 신선했다. (따라서 음식을 먹거나 애인과 키스할 때는 복면 아래쪽을 약간 올려서 입을 드러내야 한다. 어찌보면 스파이더맨이 여기의 영향을 받은 걸지도;;;) 하긴 입 부분이 그대로 드러나는 가면이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정체를 감추고 다닐 수가 없지 않나... (게다가 쓰고 다니는 모자가 무려 솜브레로! 누가 이 묘사 그대로 그려놓은 프로토타입 조로 일러스트 좀 봤으면 좋겠다;;;)
재미있고 유쾌하고 술술 잘 읽히는 책이라 돈이 아깝지는 않았지만, 너무 직역 티가 나는 황금가지판의 번역은 좀 짜증이 나기도 했다. (특히 영어 원문에서 'xx는 xx를 -oo가 oo하여 xx했던 바로 그 xx를- oo하였다'라는 식으로 수식하는 절이 중간에 떡하니 들어가있는 문장을 그대로 한국어로 옮겨놓아서 무지무지 어색했다. -_-) 이점을 보완하여 더욱 완벽에 가까운 한국어판이 나온다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말하다 보니 생각났는데 그 옛날 새소년 클로버문고로 나왔던 한국 오리지널 만화판 조로[상/하권]가 다시 보고 싶어진다. 원작 스토리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훨씬 재미나게 각색이 되어 있었는데...)
그나저나 마지막에 디에고가 만천하에 대고 자기 정체를 밝혀버리는데... 대체 매컬리는 그 이후에 발표한 조로 소설에서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을까? (오히려 90년대에 나온
아니메판 <쾌걸조로>에서는 원작에 꽤 근접한 결말을 보여주면서도 조로의 정체는 롤리타를 비롯한 일부 믿을만한 사람만 알게 되는 걸로 바꾸었던데 말이지;;;;;;)
그거야 어쨌든...
다음에는 드디어
아옌데판 조로에 도전이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