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본? 성은요?' '그냥 잠본이야. 그를 아는 사람들은 포털 잠본이라고도 부르지만.' '포털... 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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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올드 데이스
저자: 박규원
출판사: 민음사

1911년 12월, 왕진가방을 챙겨든 의사 한 사람이 급한 발걸음으로 기차에 올라 한성(서울)에서 신의주를 향하여 출발했다. 그의 이름은 김필순. 한국 최초의 양의사로 세브란스 병원의 외래 책임자였던 그는 독립 운동 단체인 신민회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미움을 사서 갑작스럽게 야반도주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한 발 늦게 합류한 가족들과 함께 중국 퉁화를 거쳐 북만주의 치치하얼로 피신한 필순은 그곳에서 독립 운동의 거점이 되는 조선인 이상촌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차근차근 준비를 진행해 나간다. 그러나 준비를 시작한지 3년 만인 1919년, 필순은 일본인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그의 가족은 살 길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지는 신세가 된다.

필순의 셋째 아들인 김덕린은 기개 있고 다재다능한, 꿈많은 소년이었다. 홀어머니의 곁을 떠나 둘째 고모 집으로 가서 자라야 했던 덕린은 당시 대중을 사로잡던 영화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서러운 자기 신세를 잊기 위해 영화 감상에 몰두했다. 아버지의 이름을 들먹이며 열심히 공부하여 큰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는 집안 어른들에게 환멸을 느낀 덕린은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공부를 계속하기보다는 자기의 꿈을 향해 돌진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열일곱 살 때 친구들이 마련해 준 뱃삯과 어느 영화 감독 앞으로 된 소개장만 들고 영화의 도시 상하이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은 기상을 품고 살겠다며 스스로에게 김염[金焰]이라는 예명을 부여한다. 이때만 해도 그가 중국 영화계를 뒤흔드는 대 배우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중국 영화 100년 역사에서 유일하게 '영화 황제'라는 애칭을 얻은 기념비적인 인물인 한국계 중국인 영화배우 김염(중국 발음은 진옌)의 일대기를 그린 르포 형식의 논픽션.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번째 파트에서는 저자이자 김염의 조카외손녀에 해당하는 박규원씨가 우연한 계기에 김염의 존재를 알고 흥미를 갖게 되어 마침내 그의 일생을 추적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두 번째 파트에서는 김염의 아버지이자 저자의 외증조부인 김필순의 이력과 생애에 대해서 3인칭으로 서술하며, 세 번째 파트에서는 드디어 진짜 주인공이라 할 만한 김염의 일대기가 1인칭 시점으로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네 번째 파트에서는 저자가 김염의 생애를 추적하는 동안 겪었던 고생과 관계자들의 후일담, 그리고 김염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김필순 일가와 관계 있는 사람들의 증언 등등이 부록으로 곁들여져 있다.

저자가 40여년 간 책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다가 늦깎이로 집필을 시작하여 완성한 작품인 덕에 문체도 다소 거칠고 포현도 군데군데 어색한 데가 보인다. 하지만 아마추어의 글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으면 그렇게 흠 잡을 만한 곳은 없으며, 투박하고 세련미가 부족한 대신 진실성과 서정성이 그 자리를 메꾸고 있어서 꽤 읽을 만하다. 물론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존인물 김염의 생애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내용 자체보다도 그의 인생을 복원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저자가 들인 노력과 정성이 더 감동적이었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별다른 변화 없는 일생을 보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알게 된 선조의 면모에서 불가사의한 친근감을 느끼고, 급기야는 그의 일생을 문자로 되살려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려고 고생하는 길을 택하면서, 저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어려움에 직면했을까. 본서에서는 그러한 과정이 곁가지로 취급되어 극히 일부분밖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분명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소녀시절, 햇빛 속에 모든 것이 녹아버리고 백색의 무(無)밖에 남지 않은 어느 여름날에 느낀 근원적인 질문 -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늘 가슴 속에 품고 살았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잊고 있었던 그 질문이, 김염의 생애를 추적하고 그가 걸었던 길을 걸으면서 서서히 되살아나, 마침내는 오래 전에 죽은 김염에 대한 사랑과 동질감 속에서 그 해답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본서는 잃어버린 과거의 인물을 발굴하여 거대한 역사 속에서 그가 어떤 운명을 헤쳐나갔는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인물을 추적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뿌리를 찾아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나는 할아버지의 영혼이 내 마음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내 영혼 또한 오랜 시간의 벽을 넘어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느낌은 어느 한순간의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고요하고 조용한 가운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406쪽)

만약 이 작품을 영화화한다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처럼 과거사를 메인으로 그리면서 중간중간에 저자가 과거를 추적하는 장면을 살짝 끼워넣고 라스트에 둘이 교차하는 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위에 인용된 마지막 장면은 작은외조부 김염을 생각하며 그가 일찍이 걸었었던 인도로 가는 길을 걸어가던 저자가 마침내 김염의 영혼과 마주하며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가'를 깨닫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글로 써놓으니 닭살 만점이지만 영상으로 잘만 꾸미면 꽤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대부분의 얘기가 중국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제작비가 만만찮을 거라는....)


PS1. 에필로그 중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딸 안수산 여사와의 만남을 그린 부분이 있는데, 김염 본인과는 큰 관계가 없지만 김필순과 도산 선생이 죽마고우였다는 인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안수산 여사가 건네 준 당시의 자료들 중에 특히 깨는 문서가 하나 인용되어 있는데, 바로 이승만 박사가 1924년 미국 이민국에 '지금 안창호라는 볼셰비키 지도자가 미국을 공산주의로 오염시키러 오고 있으니 빨리 체포하라'고 찔러대는 편지였다. -_-

PS2. 영화가 좋다고 징징대는 어린 김염을 '네가 그러면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시겠느냐'고 여러 번 윽박질렀으나 결국 조카의 뜻을 꺾지 못한 둘째 고모부. 그의 이름은 바로 김규식. (두두둥) 임시정부 요인까지 지낸 사람도 결국 이런 일에서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by 잠본이 | 2005/08/28 12:21 | 대영도서관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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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작가 at 2005/08/28 15:12
도산은 스스로 아나키스트라 말했는데 초대 폭주족 이 박사 말씀대로라면 볼셰비키즘 주장하려 아나키즘 주장하려 참 바쁘셨겠습니다 그려.
Commented by marlowe at 2005/08/28 20:52
저는 스즈키 스네카스의 '상해의 조선인 영화황제'를 먼저 읽어서, 많이 실망했습니다.
너무 성의없이 내놓았다는 생각입니다.

도산선생의 아들 필립 안은 영화배우였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너의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인 데, 너는 딴따라 노릇을 하느냐?"고 질책하면,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이 밥 먹여 주나요?" 친일파 후손은 땅을 되찾겠다고 하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일제에게 빼앗긴 재산에 대해 청구조차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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