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경찰관인 주인공은 어느날 갑자기 병원에서 깨어나 자신이 이미 서류상으로는 사망 처리되었고, 자기에게는 새로운 이름과 얼굴이 부여되었으며, 자신의 장례식도 이미 치러졌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한다. 게다가 그는 자기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일부 사람만이 그 존재를 알고 있는 극비의 정보기관에 편입되어 살인병기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기에 이른다. 그를 가르치는 스승은 소갈머리없고 비뚤어진 성격이지만 솜씨는 일류인 동양인 할아범이고, 그가 상대해야 할 적은 온갖 무기와 술수로 무장하고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전세계의 악당들이다. 새로 태어난 그의 이름은 바로... '리모 윌리엄스'.
-대략 위와 같은 줄거리로 시작되는
워렌 머피 & 리처드 사피어 콤비의 인기 펄프소설
<디스트로이어> 시리즈를 실사 극영화로 제작한 것이 바로 1985년 작품인
『Remo Williams: The Adventure Begins』. (혹은 Remo: Unarmed and Dangerous 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기획 당시 혹은 해외 판매시에 붙여진 타이틀로 짐작되는데, 보통 사용되는 표현인 'armed and dangerous'[무장했으며 위험함]를 뒤집어서 '맨주먹 말고는 아무런 무기도 없지만 그래도 위험하다'는 주인공의 특징을 잘 살려낸 제목이라 하겠다.) 국내에서는 80년대에 원작소설 초반부가 모음사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영화판도 <레모>라는 제목으로 대우비디오에서 출시된 이래, <리모>라는 제목으로 다시 KBS에서 더빙 방영되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작품이 되었다. (달리 말하면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모른다는 거지만)
-영화의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원래 저 작품은 계속해서 이어질 시리즈의 제1편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탄생 스토리였지만 영화 자체의 퀄리티가 너무 형편없었던 탓에 별로 호응을 얻지 못하여, 결국 제1편이 그대로 마지막편이 되는 슬픈 결말을 맞이했다. (이후 캐스팅을 완전히 갈아치운 TV시리즈의
파일럿 필름이 제작되었지만 이것도 1회용 이벤트로 끝나 버렸다.) 원작소설 자체는 그 뒤로도 작가진을 바꿔 가며 110여편에 가까운 속편이 쏟아져 나왔고, 인터넷에서도 아직까지
팬사이트를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뿌리깊은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 독자나 관객들에게 <리모>를 권하기는 어렵다. 절세무공을 익힌 백인 남성 주인공이 동양인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미국을 위협하는 악인들을 용서없이 응징하는 초 울트라 판타스틱 바이올런스 슈퍼히어로 액션 스토리인 원작 소설을 베이스로 삼아, 뭔가 어정쩡한 디즈니식 액션과 사정없이 늘어지는 연출, 그리고 원작의 나쁜 점인 왜곡된 오리엔탈리즘까지 팍팍 깔아놓고 만든 영화다 보니,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딴지감이고, 그냥 영화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는 재미없다는 푸념을 자아내는 그저 그런 B급 영화로 비쳐질 뿐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측이 대책없이 너무 강한 데 비해 상대편인 악당 측에 그다지 매력이나 카리스마를 느낄 만한 캐릭터가 전혀 없다는 점도 치명적인 패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단점을 모두 극복하고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 영화를 본다면, 전혀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원작소설 <디스트로이어>는 비록 정치적으로 불공정하고 문학적으로도 훌륭한 작품은 아니지만 최소한 독자에게 만족을 주는 '재미있는 오락소설'이기는 했다. (적어도 워렌 머피가 관여하던 초기 시리즈는 그랬다고 한다.) 이 원작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주는 요소가 바로 주인공 리모와 그의 사부인 치운의 사제관계(혹은 유사 부자[父子]관계)인데, 영화판에서도 이 부분은 꽤 그럴 듯하게 살려낸 것이다. 엄청난 자아도취와 늙은이다운 땡깡으로 똘똘 뭉친 능글능글 노친네 치운이 무뚝뚝하고 어리어리한 제자 리모를 무지하게 갈구고 고생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는 동안에 정이 쌓여 마치 아버지와 아들과도 같은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적과 싸우는 액션 장면보다 이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장면이 훨씬 재미있게 느껴질 정도이다. 치운 역은 미국인인 조엘 그레이가 맡아 두꺼운 특수분장(!)까지 소화해 가며 연기했는데, 한국인이라는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한국색이 느껴지지 않는 무성의한 캐릭터 조형이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리엔탈리즘의 세례가 거북스럽기는 하지만, 그 고집불통 늙은이다운 성격만은 확실하게 살려내고 있다.
-KBS 더빙 방영 당시 주인공 리모(프레드 워드)의 목소리는 송두석씨가 연기하셨는데, 비슷한 시기에 <독수리 특공작전
Street Hawk>의 주인공 제시 마크나 <전격 Z작전
Knight Rider>의 대악당 가트 나이트 역으로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주셨던 탓에, 리모를 보는 동안에도 계속 다른 캐릭터가 떠올라서 되게 웃겼던 기억이 있다. 치운은 '전노인'이란 이름으로 나왔는데 성우가 누구였는지는 안타깝게도 기억이 안 나지만, 연기 하나만은 진짜 일품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특히나 마지막에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사부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난 그 이상이다 이놈아"라는 대화가 가히 죽음이었다. 번역자 센스 최고! ;) 여담이지만 이 영화에서 리모에게 도움을 받는 경찰관 아가씨로 나온
Kate Mulgrew는 십수년 후에
<스타트렉 : 보이저>에서
캐서린 제인웨이 선장으로 등장하여 스타트렉 시리즈 사상 최초의 주연급 여성지휘관이라는 영광을 차지했다.
-내용도 흔해빠졌고 영화의 만듦새도 엉성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잊을 만 하면 케이블 방송을 통해 재탕 삼탕을 거듭하는 기이한 작품. (값싸고 만만하니 그렇게 되는 거야 당연하잖아...) 영화 자체의 재미보다는 캐릭터의 성격에 주안점을 두고 이리저리 씹어가며 보는 편이 훨씬 맛있는(?) '숨은 컬트'라 하겠다.
-일본 공개 제목은 무려
<레모 / 제1의 도전>. 위에 소개한 팬사이트에 올라온
홍보용 자료에는 꽤 귀중한 사진이 많이 실려 있다. 그나저나 일본에서는 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려나...
→그런데 한국에 신안주라는 곳이 있긴 한건가?→다시 영화화된다면 이런 캐스팅으로!→'리모'를 리메이크 한다면...